- 1972년 봄부터 가을까지 미군 사격장 부근 목장에서 겪은 일들
달밤에 소를 찾다
뿔뿔이 흩어진 소들을 앞세우고 이 쪽 저 쪽에서 목동들이 모이기 시작한 때는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소들은 멀리까지 달아났으며 꽁꽁 숨어 있었기에 아직 많이 모자랐다. 나중에 박 씨가 한 떼의 소들을 몰고 합류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소들은 대부분 그 꼴통 소들이었다. 윤 씨와 나는 목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이르렀건만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사격장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보름달이 올라와 있었건만 산그늘 풀숲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앞장선 윤 씨와는 달리 나는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칡넝쿨은 소들이 좋아하는 풀이었다. 윤 씨가 어디선가 금방 싼 쇠똥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코를 큼큼거린 지 얼마 안 되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쇠 눈깔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뿔이 삐뚜름한 대가리 하나를 확인했다. 그놈이 이 쪽 무리들의 대장이었다. 다행히 다른 소들도 모두 근처에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되새김질을 하며 앉아 있는 소들이 얄미워서 엉덩이를 내지르는 시늉을 하자 소들이 여기저기서 일어섰다.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는, 눈치가 빤한 놈들이었다.
- 가자, 이 도깨비 같은 놈들아. 배고파 죽겠다.
윤 씨가 싸리 가지를 꺾어 들고 달빛 속에 쳐들자 도깨비들이 걸음을 빨리했다. 나는 생각했다. 저 커다란 덩치에, 형형한 두 눈에, 뿔까지 달린 놈들이 사람에게 길들어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가축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자정이 다 될 무렵에야 우리는 목장으로 돌아왔다. 다들 걱정이 돼서 자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막걸리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먼저 온 박 씨가 여우 고개 마을에 가서 받아 온 막걸리였다. 형제지간이나 다를 바 없었던 목장 책임자 전 씨의 부인, 즉 형수가 따뜻하게 데워준 막걸리가 뱃속에 들어가자 그토록 볶아대던 허기가 달아나는 것 같았다.
형은 아직 몇 마리가 모자란다고 걱정했으나 박 씨는 걱정 말라고 했다. 내일 사격장에 나가면 저절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다 돌아왔다. 그러나 새끼 밴 소가 사격장에서 유산했다. 형에 의하면 그 암소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씹고 있어서 자세히 보니 태였다고 했다. 형은 암소 주변을 살폈고,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송치를 발견했다고 했다.
너 댓 명에 달하는 목장 남자들은 그때 겨우 스무 살 새댁이었던 형수가 해주는 밥을 먹었다. 형수는 양양 쪽 산골 태생이어서 산나물이나 버섯을 잘 알았다. 우리는 형수가 직접 캐 오는 산나물국에 산나물 반찬으로 고봉밥을 먹었으며, 항고에 꾹꾹 눌러 담아 주는 점심을 보자기에 싸서 둘러메고 사격장으로 나갔다.
밤에는 형네 방에 둘러앉아 막걸리 내기 뽕을 치며 떠들썩하게 놀다 잤다. 뽕이요! 하면 웃음소리가 나고, 낙장불입이니 뭐니 해서 시끄럽기 마련이다. 그날도 그러다가 오줌을 누러 나왔는데 짙은 안갯속에 소 같은 것들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소 마당을 바라보니 소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안갯속에서 꼬리를 빳빳이 쳐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들이 우리 소인 것을 알았다. 동이 트도록 안갯속을 헤매며 소를 찾았다. 일부의 소들은 마을까지 내려가서 남의 밭을 망쳐 놓아 변상해야 했다.
그날 밤 소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호랑이나 표범이었을 거라는 얘기는 있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김 씨와 닭다리와 표범
그로부터 얼마 후 새로 온 목동 김 씨가 면소재지의 처가에 다녀오다가 큰 짐승을 만나 혼비백산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서울에 볼 일이 있었고, 볼 일을 보고 며칠 놀다가 돌아왔을 때는 김 씨가 목장 일을 그만두고 하산해 버렸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주로 형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내 기억의 의심스러운 대목은 형에게 물어 보충하면 되는데, 형은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으니 형수에게 물어야 한다. 40년 전 일이지만 형수도 그때 같이 살았으니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 씨는 닭의 두 다리를 새끼줄로 묶어 자전거 핸들에 꿰고서 여우 고개를 향해 올라오는 중이었다. 장모가 바빠서 닭 잡아 줄 사이가 없으니 목장에 가서 삶아 먹으라고 준 생닭이었다. 그는 급히 마신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고, 날은 슬슬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다리 힘이 부친 그는 진작부터 자전거를 신부 부축하듯이 끌면서 산굽이를 돌고 또 도는 중이었는데 산비탈 위에서 모래가 날아왔다.
처음 그랬을 때 그는 그냥 토끼 같은 작은 짐승이 지나가며 튀긴 모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산굽이에서 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위를 쳐다보니 눈에 불을 켠 커다란 짐승이 버티고 서 있었다.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지만 못 본 체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는데 다음 구비에서 또 모래를 끼얹었다. 다시 위를 쳐다보니 눈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불을 켠 아까의 그 커다란 짐승이 훨씬 가까운 데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전거에서 닭만 떼어 들고 부리나케 뛰었다. 그는 '호랑이다! 호랑이다!' 또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소리치며 뛰었던 기억 밖에 안 난다고 했다. 형에 의하면, 그는 목장에 도착하여 형을 보자마자 호! 호! 호! 이렇게 세 마디 말만 간신히 하고는 맥없이 주저앉았는데 손에는 몸통이 떨어진 닭발을 꼭 잡고 있었다.
형은 닭다리부터 빼앗아 팽개치고 나서 업어다가 방에 뉘었다. 온몸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젖어 있었고 열이 펄펄 나더라고 했다. 찬물을 떠다 먹이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머리에 찬물 수건을 놓고 하면서 한참 부산을 떨었더니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목동 김 씨는 내리 사흘을 심한 몸살 앓듯이 앓고 나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일을 그만두겠다 하고 보따리를 쌌다고 했다.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사람에게 모래를 끼얹는 짐승은 호랑이는 아니더라도 개호주 정도는 된다고 했다. 살쾡이는 아무리 커봤자 똥개만 하며, 사람에게 모래를 끼얹기는커녕 인기척이 나면 먼저 달아나는 짐승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 소들을 울타리 밖 안갯속에서 쫓아다니던 짐승이 바로 그 개호주, 즉 표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을 노인들은 또, 여우 고개 부근에 있던 서낭당에서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는데 새마을 운동을 하느라고 서낭당을 헐고 산신제를 지내지 않게 되자 산신령이 노해서 개호주를 보낸 것이라고도 했다. 새마을 운동이란, 1970년 초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이른바 '농촌 현대화'를 위해 범국가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박정희가 직접 만든 새마을 노래 가사에도 들어 있듯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는 운동이었다.
잘 살아 보자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마을 동구의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잘려 나가고, 서낭당 같은 사당들도 미신타파의 일환으로 없애 버리는 일도 범국가적 새마을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런 일은 휴전되면서 남한 땅이 된 삼팔선 이북 지역처럼 토착민은 적고 이주민이 다수인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 여우 고개는 바로 그런 지역이었다. 게다가 군 작전 지역이기도 했으니 서낭당이 남아날 수가 없었다.
윤 씨와 뱀
나는 휴전 직후에 태어났지만 전 씨는 전쟁 나던 해에 이미 두 어 살쯤 되었다. 윤 씨는 전 씨보다 서너 살 많았고, 박 씨는 윤 씨보다 또 서 너 살 많았다. 그러나 전 씨, 박 씨, 윤 씨 세 사람은 객지에서 만난 처지라서 그런지 서로 성에다 씨를 붙이며 말을 높였다. 나는 전 씨를 형이라 불렀고, 다른 분들에게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전 씨는 고향이 목장에서 멀지 않은 삼팔선 부근이지만 박 씨는 휴전선 북쪽인 평강이 고향이고 윤 씨는 고향을 몰랐다. 윤 씨는 고향은 물론 부모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부러 감춘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군 장교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려주었다.
미군 장교가 고아원의 아이들 중에서 윤 씨만 특별히 귀여워 한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미군 장교는 고아원에 찾아와서 윤 씨만을 데리고 나가 부산의 어시장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것도 사주고 부대의 피엑스에도 데리고 가서 야구 글러브와 야구 모자와 야구공을 사주기도 했다. 어린 윤 씨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업어 주기도 했고, 가죽점퍼 냄새가 고소하게 나는 넓은 등에 업혀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 보니 고아원 원장실이었던 기억도 있다고 했다. 나는 윤 씨가 비록 고아였지만 그 당시로서는 부잣집 아이들도 못 가져본 것들을 한 때나마 가져봤음이 부러웠다.
윤 씨가 잊지 못하는 장면 중에는 눈물 나는 장면도 있다. 그날은 어린 윤 씨가 미군 장교와 헤어지던 날이었다. 윤 씨에 의하면, 미군 장교는 자기를 그 안에 넣어서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커다란 나무 상자까지 짜서 부두로 가져왔으나 무슨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윤 씨는 나무 상자와 함께 남겨졌다. 그때 윤 씨는 카우보이모자에 카우보이 복장에 쌍권총까지 차고서 그 나무 상자 위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울었다.
미군 장교는 다시 와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으나 돌아오지 않았고, 미군 장교가 나무 상자 가득히 장만해 준 모든 선물은 고아원 원장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윤 씨에 의하면, 고아원 원장은 그 미군 장교로부터 가죽점퍼도 '빼앗아'입었다. 예전에 미군 장교가 입고 다닐 때는 그렇게도 고소한 냄새가 나던 가죽점퍼가 주인이 바뀐 후로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더라고도 했다.
사격장에는 뱀도 많았다. 윤 씨에 의하면, 뱀은 화약 냄새를 좋아하여 사격장에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능사, 화사, 구렁이, 살모사 ……. 윤 씨는 뱀을 보면 기어코 잡았다. 소를 몰고 걷는 중에도 그는 어느 틈에 잡았는지도 모르게 뱀을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화사(꽃뱀)는 알불에 얹어 노릇하게 구워서 먹었고, 살모사는 대가리만 떼어내고 날로 씹었다.
살모사는 워낙 독한 짐승이어서 껍질을 벗기고 창자를 훑어내고 대가리를 떼어 낸 후에도 세차게 요동을 쳤다. 몸통을 씹는 중에도 요동을 치면서 윤 씨의 뺨에 피를 묻히기도 했다. 어느 날은 땅바닥으로 떼어 던진 살모사 대가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눈이 자기 몸통을 씹는 윤 씨를 쏘아보고 있기도 했다. 구렁이 종류는 살 속에 보이지 않는 사충(뱀에 기생하는 벌레)이 있고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반드시 푹 과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윤 씨는 구렁이를 잡으면 땅꾼처럼 목에 걸고 다니다가 점심밥을 먹고 난 항고에다 푹 고아서 국물만 마시고 찌꺼기는 바위에다 털어버리곤 했는데, 찌꺼기를 버린 자리에는 어느 틈엔가 불개미가 새빨갛게 몰려 있곤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