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하면서 대학원 다니던 시절, 형사소송법 수업 시간에 현직 검사인 후배들과 조서를 놓고 격론을 벌인 적이 몇번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작성되는 것과 같은 조서는 없애야 한다는 주장. 후배들은 물론 우리 검찰이나 경찰이 작성하는 조서가 믿을만하고 꼭 필요하다는 주장.
(당시 솔직하고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존경하는 한인섭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몇 차례 예의바른 쨉이 오고가다가 양측이 조금씩 열이 받고 pulling no punches 하기 시작하면 후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배님도 저희 잘 아실텐데 정말 저희가 허위로 조서를 쓴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마 부인하는 피의자를 상대로 자백하는 조서를 만들어놓고 도장 찍으라고 강요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후배 검사님들의 정직성은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분도 저의 정직성은 믿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제 의뢰인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 제가 조서를 작성하겠습니다. 검사들이 읽어보고 서명, 날인해서 증거로 쓰면 어떨까요? 설마 제가 피의자가 자백하는데 허위로 부인하는 조서를 만들 거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죠?"
우리식 조서가 문제인 것은 검사나 경찰관이 고의로 허위 조서를 만들기 때문인 것이 아니다. 다만 1) 오고간 문답을 정리하는 권한이 일방적으로 수사기관에 있고, 2) 그 결과 조서가 정면으로 허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 진술 내용과 매우 다른 뉘앙스를 가질 위험성이 높고, 3) 그러다보니 단순히 수사과정의 결과물이 조서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조서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엉뚱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한번 보자.
우리나라에서 검사나 경찰관이 작성하는 조서는 문답식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문 : 피의자는 다른 사람을 때린 일이 있나요.
답 : 예, 있습니다.
문 : 언제, 어디서 그랬나요?
답 : 2017년 11월 13일 광화문을 지나던 000번 버스 안에서 그랬습니다.
문 : 왜 그랬나요......
이런 식이다.
그런데 조서를 작성할 때는 문답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요지"를 적게 되어 있다. 위의 예에서 처음에 검사가 피의자에게 다른 사람을 때린 일이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피의자가 약 1시간에 걸쳐서 극구 부인했다고 치자. 그런데 검사의 설득(!)과 호소(!)에 못 이겨 결국 폭행 사실을 인정하면 그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위와 같은 조서를 작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간 과정을 모르고 위와 같은 조서를 읽는 판사의 입장에서는 검사가 피의자에게 첫 질문으로 폭행을 했느냐고 물었는데 바로 인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당시에 타고 있던 버스가 어디를 지나고 있었는지도 정확히 기억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실제로는 피의자는 잘 기억을 못하는데 검사가 "광화문 쯤 지나고 있지 않았겠어?" 하니까, "아마 그랬을 겁니다."라고 답했는데 저렇게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이게 얼마나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대부분의 검사들은 그런 경우에 진술이 변경된 과정도 조서에 적는다고 항변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적어넣을지 여부, 얼마나 자세히 적어넣고 얼마나 생략할지 등등에 관한 재량권은 모두 검사에게 있다)
이것은 마치 남북회담을 하면서 오고가는 대화를 정리해서 발표하는 권한을 남한이나 북한 일방이 갖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설사 정면으로 '허위'라고는 할 수 없는 대화록이라고 하더라도 작성권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정리(!)될 위험성은 너무나 크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이런 문답식이 아니라 경찰관 혹은 검사가 "피의자가 이런 저런 진술을 했습니다."라고 쓰는 진술서가 대부분이다. 간혹 문답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도 매우 간결하고 2-3 페이지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조서는 수백페이지에 이르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즉 실제로는 "요지"를 적으면서도 마치 대화내용 전부가 담긴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거나 적어도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첨부한 기사를 작성한 류인하 기자도 지적해놓았듯이 조서를 읽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질문에는 손 댈 수 없다는 점이다.
(기사 내용 중 “‘아까 질문하셨던 내용이 조서에 없습니다’라고 하니 검사가 ‘그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거라 따로 조서에 적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했다.라는 부분)
그나마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은 검사가 질문했던 내용을 조서에 쓰지 않고 빼놓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항변이라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몇 시간 긴장해서 조사를 받는 사람은 그런 걸 모두 기억할 수가 없다. 조사 과정을 피의자나 변호인이 녹음하거나 타이핑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피의자에게 유리한 부분은 빠지기 쉽고, 때로는 그것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기도 한다. 바꾸어말하면 억울한 사람을 처벌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검찰 조사를 보도하는 기사에는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서 검토시간'이란 얘기가 나온다. "00씨는 검찰에서 10시간 조사를 받았는데, 실제 조사가 이루어진 시간은 7시간이고 조서를 검토하는데 3시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는 식이다. 심지어 때로는 조서를 오래 검토하는 것 자체가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뉘앙스로 보도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가 된지가 언젠데 왜 이런 관행이 아직도 계속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수사기관에서 조사하는 과정 전체를 (피의자의 동의를 얻어) 녹음이나 녹화를 하고, 그 중에서 증거로 쓰고 싶은 부분은 수사기관 스스로 증언하거나 진술서로 작성해서 제출하게 해야 한다.
한겨레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방법"을 연재하려고 하다가 중단되었을 때 싣지 못한 부분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서를 작성하면 피의자에게 읽어보라고 하고 도장을 찍게 한다. 그런데 피의자가 조서에 도장을 찍을 의무는 전혀 없다. 때문에 도장을 안 찍겠다고 하면 조서를 작성하는 관행이 없어질 수 있다. 그 글의 제목은 "조서에 도장을 찍지 맙시다."였다.
그런데 실제로 수사를 받는 피의자가 검사 앞에서 도장 안 찍겠다고 버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현직 검사가 그런 기고문을 쓰면 도움이 될까 했던 것인데). 때문에 정부가 스스로 그런 관행을 없애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은 많고 반론을 하고 싶은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전세계 선진국들 중에 우리처럼 무식하게 수백페이지짜리 조서를 작성하고(그것도 문답한 것이 그대로 기재되는 것도 아니고 요지만 쓰는 건데), 여러 시간에 걸쳐서 읽어보고 한장한장 일일히 도장을 찍게 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뉘앙스가 재판 과정에서 해석과 반박을 거치는 곳은 없다는 점이다.
조서를 없애는 것도 검찰의 수사 관행을 바꾸고 개혁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만 맞춰 가면, 바꿔 말하면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등등에서 하는 그대로만 하면, 쉽게 검찰 개혁을 할 수 있다. 그런 나라들에 공수처가 있고, 대한민국에는 공수처가 없어서 대한민국 검찰이 이 모양 이꼴인 것이 아니다. (공수처는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관이다) 왜 법무부에서 이런 것부터 안 바꾸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170901001&code=94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