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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태섭 Feb 28. 2019

번역가 이야기

금태섭의 <금씨책방> 36

존경하는 친구 김도영님이, 존 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에 대한 포스팅에 제목이 왜 "돌아온"으로 번역되었느냐는 댓글을 달아주신 김에 생각나서 번역가들에 대한 이야기 잠깐 ㅎ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번역한 사람은 김석희 선생님이다. 번역의 양이나 질 모두 우리나라 최고의 번역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분. 제목을 잘못 이해하고 오역할 분은 아니다. "추운 나라"라는 부분부터 그렇다. 원제의 "The Cold"는 주인공이 변절한 척 동독의 첩보기관을 속이고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기 위해서 원래 소속되어 있던 영국 정보부와 관계를 끊고 절연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the cold라는 영어에 그런 뜻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쪽 업계에서 쓰는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에 그런 설명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이라고 번역한 것은 분위기를 살리려고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원제의 뜻을 살리자면 너무 복잡해지니 출판사 쪽에서도 이런 제목을 붙이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김석희 선생님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번역가로서 만난 최고의 작품으로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꼽은 일이 있다. 첫 작품인 "콜렉터(번역서는 현재 절판)"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파울즈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외에도 "마구스"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안 읽어보신 분들께는 최고의 번역가가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린다.


번역가로서 김석희에 필적하는 명성을 얻었던 분은 돌아가신 이윤기 선생님. 이윤기 선생님은 특히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을 도맡아 번역했는데 불행히도 에코의 작품에는 워낙 많은 배경지식이 깔려서인지 오역으로 지적을 많이 받았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이윤기 선생님은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서 "장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다시 번역을 하다시피 했다. 최종 번역판에는 60페이지에 걸쳐 지적을 한 강유원 박사에 대한 감사의 글도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영문학자 이재호 교수님도 이윤기의 번역에 대해서 날 선 지적을 많이 했는데, 그의 책 "문화의 오역" 2쇄 머릿말은 아예 이윤기의 번역에 대한 비판으로만 되어 있고, 제2부는 "문화의 오역이 많은 책들"이라는 제목 아래 이윤기가 번역한 책에서 오역을 찾아낸 내용으로 채워놓았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번역이라는 분야에서 고집스럽게 의견을 밝히는 게 존경스러워서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비판을 했던 이재호 교수님이나 그런 지적들을 받아들여서 실수를 솔직히 인정을 하고 개역을 했던 이윤기 선생님이나 모두 훌륭한 분들이지만, 두 분의 논쟁에서 굳이 편을 든다면 나는 이재호 교수님 쪽이다. 나는, 읽다보면 번역자가 누구겠구나 짐작이 가는, 말하자면 색깔이 드러나는 번역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번역판에는 ‘불목하니’라는 단어가 나온다. (“식료계 수도사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함께 온 수도사들, 불목하니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오른쪽 오솔길로 내달렸다.”) 그런데 불목하니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즉 수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원문에는 servant로 나온다. 그냥 “일꾼” 정도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짐작이지만) 이윤기 선생님은 불목하니 같은 단어를 써서 원작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식으로 번역가가 원작에 자기 색깔을 입히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데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윤기 선생님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번역가들 중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시는 분들은 정영목, 공경희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는데 내가 고명하신 번역가 선생님들을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내 취향엔 이쪽이 더 맞다. 언젠가 정영목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존경해왔다는 말씀을 드린 후에 “저... 저도 책을 한권 번역해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가, “그런가요?”라고 무시당한 상처가 있지만, 그래도 팬심에는 변함이 없다.ㅋㅋㅋ


영어는 그나마 가끔 원작과 비교해볼 수 있지만, 그 밖의 언어들은 아예 그럴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번역을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 소설을 번역해주시는 송병선 선생님, 오르한 파묵이 터키어로 쓴 책들을 번역해주시는 이난아 선생님 등등


페친들 중에도 번역을 하시는 분들이 꽤 많은데 (박산호 선생님, 신견식 선생님 등등) 좋은 책을 골라서 번역해주셔서 항상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끝으로 밥 먹으러 가는 수요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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