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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소설 속 남자처럼

소설연재

by 태섭
그에게 중앙은 안전했지만, 이상하게 아무 데도 닿지 않았다. 모든 곳을 바라보느라 정작 가야 할 길에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균형만 신경 쓰다 보니, 힘을 모아야 할 순간에도 기운이 흩어졌다. 가끔은 균형을 흩뜨려야 했다. 그래야 삶이 재미도 있고, 주변 반응도 좋고, 자신 또한 행복해진다. 외줄 위의 광대처럼, 소설 속 남자처럼.

그날 밤, 하주는 조금 다른 꿈을 꾸었다. 달빛이 가루가 되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아래는 대낮의 저잣거리, 신기하게도 위는 밤이었다. 햇빛과 장사꾼들의 고함이 번지고, 그 위로 별가루가 쏟아졌다. 그는 허공의 외줄 위에 서 있었다. 까마득한 아래에서는 수많은 눈들이 점처럼 박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안에 장대가 미세하게 떨리고, 발바닥 아래 팽팽한 줄이 심장처럼 두근거리며 울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오직 가운데, 오직 균형만을 속으로 계속 외쳤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자 관객들이 흩어졌다. 사방에서 “아, 좀 움직여라!”는 말이 욕설과 함께 날아왔다. 중앙을 지키는 일만으로도 벅찼는데, 비난과 함께 힘이 스르르 빠졌다. 그때, 장대가 날아가고 균형이 툭 무너졌다. 떨어지기 직전, 그는 간신히 외줄에 다시 올라탔다. 함성과 박수가 저잣거리를 흔들었다. 아, 이거구나. 떨어지지만 않으면, 잠깐의 흔들림은 괜찮구나. 그는 잠에서 깰 때까지 그 동작을 반복했다.


함성과 야유가 번갈아 밀려오던 소리 뒤로 알람이 배경음처럼 울렸다. 오전 일곱 시, 하주는 옆으로 누운 채 멍을 잠깐 때렸다. 아직도 외줄 위에 선 듯 어지러웠다. 창틀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오른쪽 협탁을 더듬다 노란 포스트잇이 함께 딸려 왔다.


[독서 하루 1시간, 글쓰기 하루 10분]


알람을 멈추고 포스트잇을 다른 손에 옮겼다. 이불의 포근한 냄새가 깊어지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와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왼손으로 칫솔을 잡고 치약을 짰다. 거울 속 왼쪽 어깨가 조금 올라갔다. 손목이 어색하게 떨렸지만 거품은 금세 입안을 채웠다. 창틀의 물방울이 길게 흘렀다.


하주가 물을 한 잔 떠 마셨다.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책을 펼쳤다. 어떤 책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조금 기울어 보는 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한쪽으로 쏠려 본다는 건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하주에게 책과 글은 그 쏠림이었다. 균형은 언젠가 돌아오겠지만, 이 치우침은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생각보다 빨리 루틴을 만들었다. 다음 날부터 운동보다 독서 시간이 더 늘었다. 생각해 보니, 둘은 닮아 있었다. 누구나 시작은 쉽다. 누구나 이어가기가 어렵다. 재미를 알면 꾸준해진다. 깊어질수록 섬세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미묘한 차이가 결국 큰 차이를 만든다. 어쨌든 운동하는 사람도, 독서하는 사람도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 무언가를 찾을 때 유튜브보다 책을 먼저 펼쳤다. 유튜브는 늘 알고리즘이 취향을 저격해 주었지만, 책은 달랐다. 두어 장, 스무 장을 지나서야 ‘아, 내가 이 이야기를 찾고 있었구나’를 알게 했다. 책은 내가 걸어가서 만나는 알고리즘이었다. 약간은 더 번거로울지라도, 충분히 할 만했다. 아니, 오히려 하면 할수록 만족감이 올라갔다. 속도는 거북이 같이 느릴지라도, 대신 기억만은 깊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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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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