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하주는 원래부터 예민한 사람이었다. 환자의 표정이나 작은 몸짓만으로도 고통의 정도와 심리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간호를 잘한다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그 예민함은 직장 내 인간관계에선 오히려 독이 되었다.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말투의 떨림에서 모든 감정을 읽어내고 그 모든 걸 온전히 흡수해 버렸다. 어쩌면 자신이 병원 생활과는 맞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샀다.
세상에서 가장 짧고 확실한 문장. 수없이 바라왔던 일이었고, 꿈꾸고 또 꿈꾸던 문장이었다. 막상 이루고 나니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주는 퇴근한 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텅 빈 공간이 낯설었다. 간절히 원하던 공간이었는데도 마음 한구석은 오히려 비어 있었다. 마치 꿈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왔던 시간이 끝나버린 것처럼. 분명히 얻었는데도,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가구도 들어왔고, 멋지게 인테리어가 된 집 안을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젠, 또 뭘 해야 하지?”
휴대폰을 꺼내 채팅 앱으로 들어갔다. 집을 구하는 동안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찬식, 그리고 늘 자기 일처럼 응원해 준 상혁과 태호가 떠올랐다. 그는 세 사람을 하나의 단톡방으로 초대했다.
[마침 내일 다들 쉬는 날이던데, 맛있는 우대갈비 먹으러 갈까요? 제가 집 산 기념으로 한 턱 거하게 쏘겠습니다!]
곧바로 답장이 올라왔다.
[찬식] 오, 하주야 축하한다. 지금부터 굶으면 되는 거냐?
[상혁] 병원 근처 우대갈빗집?? 야, 미쳤다. 나 거기 진짜 가고 싶었는데! 고고고고고!!!
[태호] 이열, 하주 덕에 그 비싼 집도 가보네. 그런 자리에 빠지면 섭하지.
다음 날 저녁, 네 사람은 근사한 고깃집에서 모였다. 하주가 큰 소리로 주문했다. 네 개의 우대갈비가 커다란 숯불 석쇠에 올라갔다. 치익 소리가 나더니 연기가 순식간에 빨려 올라갔다. 냄새까지는 빨아 당기지 못했는지, 네 명의 남자가 의자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양 볼과 어금니 사이에서 이미 군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순간 이보다 더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것은 없었다.
찬식은 최근에 본 모습 중에서 가장 기쁜 모습으로 잔을 들었다. 태호는 특유의 무심함을 최대한 낮추고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다. 상혁이 입안 가득 갈비를 넣고 말했다.
“으 하주, 너 즌짜 으른이다 으른. 나도 금방 따라갈그야. 음. 딱 기다려!”
하주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가 끝나고 하주가 주문서를 챙겼다. 입구로 가서 카드를 긁었다. 계산서에 찍힌 금액은 30만 원. 평소 같으면 부담스러웠을 숫자가 오늘은 유난히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네 사장님, 일시불로 해주세요!"
응급실로 향하는 하주의 발걸음은 어제보다 한결 더 가벼웠다. 연기가 아직 옷에 배어 있었다.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조금씩 옅어졌다. 그럼에도 축하의 잔향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덕분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온몸에 차올랐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성취감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주가 당당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응급실로 들어섰다. 분위기가 유난히 고요했다. 환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소위 ‘화이트 베드’ 상태였다. 그도 간호사 생활 6년 차 만에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주변 선생님들 얼굴에는 편안한 웃음이 번졌다. 당연했다. 환자가 없다는 건 아픈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일을 안 해도 되는 여유로운 아침은 덤이었다.
오래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세 명의 선배들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가볍게 근황 토크를 하다가, 어젯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 선생님 저 어제 찬식 선생님이랑 상혁이, 태호랑 같이 저녁 먹었거든요. 제가 집 산 기념으로 한턱 쐈어요. 여기 앞에 우대갈빗집 갔는데 진짜 맛있더라고요.”
하주는 밝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선배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주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진 걸 직감했다.
“집 샀다고? 어디 샀는데?”
한 선배가 날카로운 말투로 물었다.
"그... 여기 근처는 아니고, 차 타고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요."
“엥 거기? 거긴 왜 샀대? 그냥 전세로 가지. 앞으로 가격 떨어진다고 난리던데.”
또 다른 선배가 뒤이어 말했다.
“그래서 그동안 근무 시간에 핸드폰 붙잡고 부동산 보느라 바빴던 거구나? 우리는 여기서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 말이야.”
하주의 얼굴이 금세 뜨거워졌다. 억울함이 몰려왔다. 하주는 맡겨진 업무를 누구보다 빠르고 꼼꼼하게 처리했다. 남들이 여유로울 때 게임이나 SNS를 보는 동안, 자신은 부동산 정보를 잠깐씩 찾아본 게 전부였다.
"야, 집을 샀으면 응급실 전체에 햄버거라도 돌려야지. 너네끼리 사 먹고 끝내면 다야? 그걸 또 자랑이라고 말해? 얘 진짜 이상한 애네."
선배들의 말이 점점 날카롭게 귀를 파고들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마침 상혁이 급히 뛰어들어 왔다.
“야 하주야! 오늘 왜 이렇게 환자가 없냐? 응급실 맞아 여기?”
하주는 불안한 예감에 상혁에게 급히 손짓했다.
“상혁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징크스...!”
그러나 상혁의 입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아, 오늘 진짜 너무 한가하다. 환자 없어 너무 좋다. 매일 이런 날만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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