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경에 따라 가격은 바뀐다

까짓것 한번 하지 뭐

by 태섭

아빠는 나에게 '사장‘이 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주셨다.


나는 삼 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큰누나(6살 위)와 작은누나(3살 위)가 있다. 우리는 과자를 엄청 좋아했다. 서로를 견제하며 몰래 먹었다. 엄마가 나에게 주는 용돈은 하루에 겨우 300원. 하루마다 불량식품 3개 혹은 조금 덜 불량식품 1개를 사 먹으면 용돈이 동났다. 언제나 명절만 기다려졌다. 명절에는 오천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불량식품 10개 정도와 명품식품(떡볶이, 피카츄, 냉면) 3개를 사 먹어도 몇 백 원이 남았다. 당시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는 맛이었다. 아직까지 그때 그 맛이 잊히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 맛이 하나 또 있다. 나는 군생활을 강원도 철원에서 했다. 눈 오던 겨울 야외 작전 때 바람 정도만 막아주는 참호 안에 들어갔다. 영하 20도. 주변 흙덩어리는 콘크리트가 되었다. 바지 옆에 달린 건빵주머니 안에서 구두약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바닥에 두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양 옆으로 단단한 나뭇가지를 세웠다. 그 위로 반합에 눈을 넣어 라면을 끓여 먹던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맛을 말하면 딱 그 두 번이다.


아 수능 끝나고 작은누나가 고생했다고 같이 위스키를 신나게 먹다가 기억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추운 발코니에서 아빠한테 물세례와 뺨을 맞고 있었다. 아빠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들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는데, 진짜 죽을뻔한 맛이었다. 그럼 총 세 번이네.


초등학교 때 기억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명절마다 오 천 원의 힘을 맛봤던 나는 어느 날 엄마와 딜을 했다. 하루에 300원씩 용돈을 주면 엄마도 귀찮고, 나도 별로 먹을 게 없다며 한 달치를 한 번에 달라고 했다. (일주일 300*5=1,500원, 한 달 1,500*4=6,000원) 나는 육천 원을 정확하게 계산하며 말씀드렸지만, 이거라도 고맙게 생각하라며 결국 오천 원을 손에 넣었다.


내가 오천 원을 갖고 어떻게 했을까? 한 번에 다 썼을까? 아니다. 그렇게 집에 과자를 왕창 가져오면 항상 누나들에게 다 빼앗겨 버렸다. 나는 오천 원을 꾹 쥐고 잠에 들었다. 아침 학교 갈 때 조금 일찍 나갔다. 문방구로 가서 오천 원어치 먹을 것들을 샀다. 거기까지는 똑같았다. 다만, 그걸 집으로 들고 가는 게 아닌 교실로 모두 가져갔다. 문방구 입구에 있던 커다란 박스 안에 가득 넣어서.


일찍 도착한 나는 내 책상과 짝꿍 책상을 합쳤다. 모든 물건들을 진열했다. 하나 둘 친구들이 와서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하나씩 달라고 했지만, 나는 박스의 네모난 한 부분을 찢어서 [태섭 상점]이라는 팻말을 함께 올려뒀다. 그렇게 문방구보다 100원, 인기 많은 건 300원씩 올려서 팔았다. 담임선생님이 보기 전에 굳이 치울 필요조차 없었다. 생각보다 잘 팔려 오전 9시 아침 조례를 하기 전에 다 팔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성을 봤다. 이번에는 대형할인 마트로 갔다. 과자 묶음과 할인 제품을 위주로 만 원어치를 구매했다. 다음날 [태섭 상점]을 다시 오픈했다. 한 일주일 하니까 다른 반에도 소문이 났다. 매일 30분이면 장사가 끝났다. 돈이 점점 불어나니 무섭기보다 재밌었다. 난생처음 만져보는 돈이 자꾸만 생겼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내가 옆에서 돈 세는 모습을 보던 짝꿍이 담임 선생님에게 고자질을 했다. 당시에는 체벌이 합법(?)이었다. 선생님에게 머리와 엉덩이를 신나게 맞았다. '돈놀이하는 새키는 오늘 수업도 듣지 말라'며 '복도에 나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라고 했다. 화가 잔뜩 난 담탱이가 집에도 전화를 했다.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도 신나게 혼이 났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학교에서 장사를 해? 내가 장사하라고 너 학교에 보냈어?!"


온종일 혼나니까 기운이 쭉 빠졌다. 엄마 눈치를 보며 꾸벅꾸벅 졸았다. 그때 집 전화기가 울렸는데 설마 또? 하는 생각에 눈은 커지고, 심장은 콩닥 거렸다.


'여보세요? 아 선생님. 네 태섭이 집에 들어왔어요. 걱정 마세요 혼내지는 않을게요.'


아씨! 담탱이구나라고 생각하던 그때 엄마가 한 손으로는 빨간색 수화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내 귓바퀴를 잡아 올렸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다음부터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그날 결국 저녁도 못 먹었던 것 같다. 그놈의 빨간색 집전화기, 그 이후로 집전화기에서 벨이 울릴 때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로 심장이 벌렁 거렸다. 공포증이라는 걸 처음 얻게 됐다. 지금은 집전화기를 안 쓴 지 오래됐다. 집안 어디 구석에 박혀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고향 가면 가져다 부숴야지.


어린 시절 나와 누나들은 엄마한테 자주 혼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덕에 엇나가지 않고 잘 컸다. 아빠는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쁘셨다. 투잡, 쓰리잡도 하셨으니까. 집안 자식 농사는 엄마가 다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혼을 많이 내니까 참 무섭기도, 밉기도, 내가 주워온 자식인가? 했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솔직히 감사하다.


아빠도 자식들에게 관심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고되게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혼나고 있는 우리를 천사처럼 감싸줬다. 물론 아빠도 혼을 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신기하게도 엄마가 천사가 되어 우리를 감싸줬다. 만약 두 분 다 감싸주기만 하거나, 두 분 다 혼만 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아빠가 나에게 한 말도 기억이 난다.


'하하하. 으구 시키야. 니 거서 장사를 했나? 나중에 뭐가 될라카노! '


생각해 보면 아빠는 나의 첫 번째 투자자였다. 엄마 몰래 내 손에 5만 원을 쥐어줬다. (내가 학교에서 벌었던 돈이었다) 그건 단순한 용돈이 아니었다. '태섭이는 돈 계산이 빠르니까 나중에 사장 한 번 해봐라. 내가 투자할게!‘라는 아빠의 농담 섞인 칭찬은, 어린 나에게 '창업은 나쁜 짓이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아빠는 조용히 나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빠와 함께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며 나는 처음으로 '매입'과 '매출', 그리고 '시장 테스트'를 배웠다. 어떤 걸 위주로 사야 ‘손익 분기점’이 넘을지도 고민했던 것 같다. 그 5만 원으로 직접 결제까지 하고 나왔다. 작은 손으로 과자들과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어느새 박스 두 개가 가득 찼다.


내 방에 작은 발코니가 있었다. 거기에 책상을 피고 사가지고 온 것들을 잔뜩 폈다. [태섭 상점]을 다시 오픈했다. 위치가 구렸고, 손님은 한정적이었다. 역시나 망했다. 가끔씩 누나들과 엄마와 아빠가 사주긴 했었던 것 같은데, 같은 집안사람들에게 등 처먹을 수도 없고, 이익도 제대로 안 나고, 재미도 없으니 그냥 접었던 것 같다. 역시 도파민 터지는 강렬했던 기억들만 머릿속에 남는다.


나는 그때 '사장‘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물려받았는 지도 모르겠다. 사실 부모님이 '부자'는 아니셨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립심을 키울 수 있었다.


수능을 치자마자 알바를 시작했다. 간호학과에 들어가서도 알바를 했다. 공부하는 게 벼슬도 아니고, 아르바이트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누나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까.


26살에 대학병원 신규로 입사했다. 나 혼자 서울로 올라와서 월세방을 구했다. 2년 차가 되자 대출이 된다고 했다. 빌라 투룸 전세로 옮겼다. 29살에 전세 사기를 당할 뻔했다. ‘마음 고생 하지 말고 집을 사야겠다'며 아파트 50군데를 둘러봤다. 어떤 부동산에서는 내가 어려 보였는지 공부하러 온 거 아니냐고 화냈다. 주변 병원에 다니는 전공의 연기를 해서 위기를 벗어났다. 집을 다 보고 부동산 아줌마가 자기 딸이랑 동갑이라며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바로 빤스런했다. 어릴 적 [태섭 상점]에서 보여준 배짱이 부동산 현장에서도 발휘되었다. 은근 살 떨리고 재밌었다.


'살면서 한 번쯤 서울에 내 집마련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현실로 다가왔다. 성취감이 엄청났다. 걸어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서 '혹시 집 매매 하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힘들었던 순간들을 서로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30살에는 여자친구 명의로 경기도의 대단지 입주권까지 손에 넣었다. 31살에는 결혼과 장편 소설도 완성했다. [프라하의 아침-김태섭 장편소설] 브런치 공모전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성취감은 대단했다. 자립심이 없었다면 이 모든 걸 시도조차 못하지 않았을까? 신기하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는 고마운 인연들이 많기에 자산을 모아갈 수 있었다. 다시 되돌아봐도 나 혼자서는 절대 못했을 거다.


물론 부정적인 사람도 있었다. '네가? 어떻게 서울에 집을 사냐 말을 되는 소리를 해라'며 몇몇 동기들은 웃었다.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님이 다 해줬다. 나이 30이 넘어도 부모님이 월세방을 구해주거나, 간호사 7년 차가 되어도 월세집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모아둔 돈이 있어도 막상 투자를 하려니 잃을까 무서워 아무것도 못했다. 심지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신혼집도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님이 하자는 대로 했다. 어쩌면 부럽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모두가 업보(카르마)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이사를 가야 할 때나, 자산을 모아서 갈아타야 할 때 '엄마 나 어떻게 할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하시겠지. 아니 ‘엄마가 직접 다 해줄게’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크다 보면 나이가 40, 50이 되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부모님은 평생 살아계시지 않는다. 언젠가는 무조건 자립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자식에게 그러지 않아야지. 훗날 부자가 되더라도 그러지 않아야지. 수능 치면 바로 니 혼자 알아서 살고, 나는 너네 엄마랑 세계여행 다닐 거라고 빠빠이 하고 싶다. 맞다. 아직 애도 없는데 무슨. 아직 부자도 아닌데 무슨. 내 코가 석자다. 우선 나부터 잘하고 봐야겠다.


3대가 먹고살 수 있는 엄청난 '부'를 물려받을 게 아니라면, 차라리 자립심을 물려받는 게 훨씬 낫다. 나는 '부'를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립심을 키울 수 있었다. 아빠는 돈은 없으셨지만, 나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칭찬으로 키워주셨다. 항상 '까짓것 해봐라'며 응원해 주셨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자신감을 갖고 어떤 일이든 행동으로 먼저 옮긴다.


하지만 나는 게을렀다. 시작은 잘하지만 꾸준하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주위에 떠벌려야 겨우 움직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꾸준하게 움직이기 위해 쓰고 있다. 나는 항상 배수의 진을 쳐놔야 한다.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주위 환경에 대한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물은 마트에서 사면 500원이다. 편의점에서 사면 1,000원이다. 비행기에서 사면 5,000원이다. 똑같은 물인데도 환경에 따라 가격이 바뀐다. 만약에 자신이 살아가면서 가치대로 평가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는 환경을 바꾸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이나, 내가 있는 곳, 내가 속한 직업. 이런 것들을 바꾸면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든다. 간호사 7년 차가 되니 확실히 일이 편해졌다. 후배도 많고, 일도 손에 익었고, 돈도 안정적이다. 계속 이곳에서 머물게 된다면 어떨지 선배 남자 간호사들을 봤다. 얼굴이 퀭하다. 언제나 지루하다고 말한다. 지겹다고 말한다. 20년이 지나도 밤 근무는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얼굴에는 전혀 희망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걸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다.


'3교대 근무라고 해도, 몇 년 뒤에는 억대 연봉을 손에 쥘 수 있어. 그런데 건강과 열정을 모두 잃어. 아무 힘조차 남지 않은 너의 모습을 상상해 봐. 그때의 너는 지금의 너에게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얼마 전 나는 결혼을 했다. 안정적인 환경이 중요하겠지만 나는 아직 애가 없다. 지금 내가 뭐라도 하나 더 도전해야 할 시기다. 해보고 안되면 경력은 있으니까 다시 간호사로 돌아가면 된다. 지금 안 하면 안 된다. 몇 년 후 아이가 생긴다면 나 또한 더욱 안정적인 것들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걸 안다.


환경을 조금씩 바꾸면서 나의 가치를 다시 한번 평가받아보고 싶다. 어릴 적 나를 다시 생각해 봤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과자를 팔 때 신이 났다. 환경에 따라 가격이 바뀌는 걸 봤을 때 즐거웠다. 마트 진열장 안 오백 원짜리 물병으로 남기엔 아직 나는 목이 너무 마르다. 평생 3교대 간호사로 남기에는 안쓰럽다. 당연히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일하는 만큼 돈을 더 벌 수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그래, 언제나처럼 나는 행동해야 한다.


까짓것 한번 하지 뭐!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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