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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Sep 14. 2021

우리는 왜 이런
축구 박물관이 없을까?

숫자, 데이터, 트로피의 나열이 아닌 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곳

National Football Museum @풋볼보헤미안

축구는 끝없이 이어진다. 한 경기가 쌓여 한 시즌을 만들고, 그렇게 시즌이 쌓이면 장구한 역사가 되어 접하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준다. 그래서 지나간 날은 그저 망각의 늪에서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언제든 다시 떠올리게끔 하는 장치가 만들어져야만 한다. 한낱 공놀이에 불과한 게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겠으나, 지금의 축구계가 백수 십 년이 넘는 그 유구한 세월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져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축구를 보기 위해 유럽을 찾는 많은 팬들이 꼭 찾는 장소인 축구 박물관은 저마다의 시각에서 공통분모인 축구를 떠올리는 장치가 되고 있다. 크게는 축구협회 차원에서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박물관부터, 각 클럽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박물관까지 다양하다. 요즘은 스타디움 투어 프로그램과 결부되어 함께 즐기는 코스 정도로 팬들에게 인식되는 듯한데, 그렇지 않다. 꼼꼼히 살피면 제삼자의 시각에서 축구 역사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꽤나 유익한 공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미처 접하지 못했던 생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운 공간이다. 현지 가이드가 꼭 곁에 있어야만 그런 얘기를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더욱 수월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각 섹션마다 상세하게 적힌 알림판을 꼼꼼히 살펴 익힐 수 있다면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는 없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도르트문트·암스테르담·로테르담을 거쳐 런던과 맨체스터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현지에 자리한 축구 박물관을 꼭 찾으려 했다. 향후에도, 그리고 언제고 다시금 유럽이나 남미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축구 박물관만큼은 비용이 들지언정 기꺼이 찾을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껏 다녀왔던 박물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저 트로피 진열의 연속에 불과한 스포츠 관련 박물관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트로피가 박물관을 구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아이템인 건 맞다.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로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번쩍번쩍한 그 트로피는 그 박물관을, 그 클럽을, 그 나라를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도구다.     

아약스의 UEFA컵 우승 트로피 @풋볼 보헤미안

그러나 아무리 트로피가 많다고 한들, 그저 진열을 반복할 뿐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 그렇군요.” 이 한 마디 슬쩍 읊조리고 말뿐이다. 축구 여행이 목적이라면 특히 그렇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오며 그 동네에서 유명한 성당이라는 성당은 모두 다 들렸다. 처음에는 그 멋진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나중에는 무덤덤해지더라.”

언젠가 숙소에서 만난 한 한국인 여행자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갈수록 따분했다는 그의 감상에 정말 동감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내겐 트로피가 그런 존재였다. 하늘이 선택한 선수만이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일명 ‘빅 이어’로 불리는 UEFA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처음 접했을 때 감동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족히 20개는 넘게 봤을 후엔 그 영광의 증표도 그저 수많은 트로피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리되면 축구 박물관 방문은 회를 거듭할수록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축구 박물관의 진정한 재미는 트로피에서 찾을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유럽 대부분의 축구 박물관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트로피가 아닌 스토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언제 우승했다가 아닌, 그때 우승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점을 세세하게 기록해 후세에 전한다. 구단 차원에서 한 설명은 물론이며 당시 신문 스크랩, 혹은 외부에 공개되지 못했던 내부 문서들까지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공개한다.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 결승서 아르헨티나를 꺾었던 독일의 하프타임 전술 노트 @풋볼 보헤미안

일례를 들겠다. 도르트문트에 소재한 독일 축구 박물관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 결승 아르헨티나전 하프타임 때 독일 코칭스태프 및 기술지원 스태프가 꼼꼼하게 기록한 경기 상황 일지다.      


당시 요아힘 뢰브 독일 감독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경기를 치렀는지, 선수들은 왜 그때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뛰었는지를 명확하게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승패만 기억하지만, 독일축구협회는 한 골이 터지지 않아 긴장감이 가득했던 그 경기에서 뢰프 감독과 선수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해법을 찾았는지에 대해 더 의미를 뒀다. 덕분에 박물관을 찾는 팬들은 당시 경기를 복기하며 그때 왜 그랬는지에 대해 손바닥을 치며 더욱 이해할 수 있다.     


고리타분할 수 있는 축구적인 이슈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다. 가십성 얘기도 상당히 많다. 페예노르트 박물관에 축구공에 맞아 죽어 박제된 갈매기, 맨체스터 축구 박물관에 전시된 조지 베스트의 미니 차량이나 마이클 잭슨 동상 등 알고 보면 박장대소할 만한 얘기도 곳곳을 메우고 있다.      

오스트리아 라피드 빈 박물관, 나치 독일 시절 DFB 포칼 우승기 @풋볼 보헤미안

반대로 아픈 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명문 라피드 빈의 박물관 라피디움에는 나치 독일의 그 유명한 휘장이 새겨진 우승기가 자리하고 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가 축구에 개입한 어두운 역사의 이야기도 독일 축구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현지인들에게는 감추고 싶은 기억일 수밖에 없는 얘기들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감 없이 공개한다. 우리 세대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증언들 덕에 박물관 곳곳을 흥미진진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요즘은 여기에 눈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영상 기술 등 여러 하이 테크놀로지까지 접목해 더욱더 생생하게 스토리를 전하는 분위기다. 덕분에 엄중하고 근엄해야 할 법한 축구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늘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여러 축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역사 기록 인식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K리그의 역사가 어느덧 4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 축구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길다. 유럽에 비한다면 짧디 짧은 역사일 수 있으나, 그 세월의 무게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당연히 지금 세대들이 기억하고, 후세에 전해야 할 스토리가 수없이 많다. 다만 제대로 된 자취 남기기가 없어 아쉽다. 우리네 축구 박물관에는 우승 기록, 누군가가 착용한 물품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1956 AFC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가 분실되어 한동안 행방을 찾지 못하다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 일이 있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심지어 1960 AFC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는 여전히 행방불명인 상태다. 트로피 관리마저 이 정도인데, 귀중한 문서 자료 같은 건 남아있을 수 없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옛 스타들이 간혹 방송에 나와 살짝 증언하는 게 전부다. 정작 중요한 스토리는 잊히고 있는 셈이다.     


1986 FIFA 멕시코 월드컵 사령탑이었던 김정남 전 감독과 일화를 잠깐 소개하려 한다. 김 전 감독에게서 현역 시절이었던 1960년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접한 적이 있다. 꼭 이겨야 했던 1968 멕시코 시티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 휘슬 직전 김기복 선수가 날린 회심의 중거리 슛이 크로스바를 강타하고 나오는 바람에 본선행에 안타깝게 실패했다는 등 여러 생생한 증언을 그에게서 들었다. 김 감독은 “휘슬이 울리고도 공에 강타당한 일본 골대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라고 술회했다.     


그저 취재였을 뿐이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접한 그의 ‘무용담’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 그런데 김 전 감독은 성에 안 찼는지 그 후에도 연락해 당시 기억을 보완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는 “꼭 이러한 이야기를 팬들에게 전해달라”라는 당부를 남겼었다.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린 김 전 감독 처지에서는 한때의 축구 영웅으로서 잠깐 언급되고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가 후세 축구계가 기억하고 전승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 시스템상으로는 그저 문서나 숫자로 나열된 데이터 정도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는 국내 몇 안 되는 축구 박물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래서는 지루할 뿐이다. 찾는 이도 없을 것이다 숫자나 데이터가 아닌 스토리가 무궁무진한, 그래서 방문하는 이들이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축구 박물관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한다. 또, 축구 기자된 자로서 그러한 이야기가 우리 축구계의 미싱 링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축구 박물관. 1928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5-1로 꺾은 스코틀랜드의 1920년대 황금 세대 '웸블리 위자드' 1기를 소개하고 있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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