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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Apr 16. 2020

세계 최초의 흑인 프로축구 선수

전 세계 1호 흑인 프로축구 선수

우리는 가봉 출신 피에르 에메릭 오바메양이 아스널 포스터의 메인 모델인 시대에 살고 있다. @풋볼 보헤미안

우리는 인종 차별이 금기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황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살아간다. 그 금기를 어기는 이들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사회적 지탄이 날아들며, 그 비난 섞인 분위기를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종 차별 이슈가 이처럼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힌 건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완전히 몰아낸 것도 아니다. 마틴 루터 킹이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길 소원한다고 외친 게 1963년의 일이다. 그렇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인종 차별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축구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괴짜의 극치를 보이는 마리오 발로텔리만 트집 잡히는 게 아니다. 묵묵히 필드에서 기량을 발휘하는 유색 인종 선수들에게는 그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되지도 않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손흥민만 봐도 그렇다. 손흥민은 어처구니없게도 토트넘 홋스퍼 팬들에게도 황당한 인종 차별 행위를 당한 적도 있다. 누구나 이 행동이 그릇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아직 근절되지 않고 있다. 단지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의도하지 않은 채 은연중에 그런 표현이 서슴없이 나온다는 점일 것이다.     

브라질 축구 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렸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풋볼 보헤미안

대놓고 인종 차별을 해도 당연시되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1920년대 브라질 축구계에서 ‘황제’로 불렸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 사상 최초의 흑인 프로축구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프리덴라이히는 백인처럼 보이기 위해 하얀 분을 까무잡잡한 피부에 바르고,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를 숨기기 위해 포마드를 바르고 머리망까지 뒤집어썼다. 그 실력은 펠레 이전 세대를 통틀어 최고라고 할 만치 대단했지만, 사람들은 그 실력보다는 피부색에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심판마저도 그에게 살인 태클이 들어가도 외면했을 정도라니, 어지간한 ‘인격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을 상황을 계속 접해야만 했다.


하지만 프리덴라이히는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당대 브라질 최고의 선수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프리덴라이히는 흑인 선수로는 최초로 성공한 스타플레이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프리덴라이히와 같은 선수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던 흑인 선수들이 축구계 진입 시도가 없었더라면, 프리덴라이히의 성공 사례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전 세계를 통틀어 1호 유색인종 프로축구 선수였던 아서 와튼의 초상화 @풋볼 보헤미안

그보다 50년 전 영국에서 활동한 아서 와튼은 그런 측면에서 선구자라 할 수 있겠다. 와튼은 1894년 로더햄 유나이티드와 계약해 영국은 물론 전 세계 프로축구 1호 유색 인종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추어까지 합하면 그보다 10년 앞서 스코틀랜드에서 활약했다는 아서 왓슨이라는 인물이 있긴 하나, 영국 내에서 ‘최초의 흑인 축구 선수’라는 상징성은 지금부터 거론할 와튼이 가지고 있다.     


프리덴라이히가 그랬듯, 와튼의 기량 역시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와튼은 ‘스포츠 머신’이었다. 100야드 달리기 세계 신기록 보유자이기도 했고, 사이클·크리켓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그의 첫 클럽이 된 달링턴은 그의 눈부신 운동 능력을 눈여겨보고 계약을 제시했고, 이때부터 와튼은 골키퍼와 윙을 오가며 축구계에서 활약했다. 다른 선수들이 도저히 쫒아갈 수 없는 스피드와 반사 신경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와튼이 활약한 시절은 인종 차별이 당연시되던 때였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영국의 노예제는 1833년 공식적으로 철폐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회적으로 백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건 아니었다. 과거처럼 대놓고 노예로 부리지 못할 뿐, 흑인을 향한 사회적 멸시가 매우 심했던 시절이었다.     

맨체스터 국립 축구 박물관에 전시된 아서 와튼의 소개문 @풋볼 보헤미안

와튼은 필드에서 상대 팀 선수로부터 함께 경기하고 싶지 않다는 차별적 언행을 감수해야 했으며, 심지어 라디오 캐스터로부터는 ‘brunette(까무잡잡한)’이라는 명백히 인종 차별적 표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영국의 일부 역사가들은 와튼이 최초의 흑인 프로축구 선수라는 이력 때문에 온당치 못한 평가를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건 지금은 ‘골키퍼계의 왕자’라는 별칭을 잉글랜드축구협회(FA)가 붙일 정도로 찬사 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와튼은 국가대표가 되거나 1군 팀에서 쓰인 적은 별로 없었다. 1888년에는 셰필드 웬즈데이에 ‘무보수 자원봉사 선수’라는 자격으로 뛰었다가 당대 최강이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 무려 여덟 골을 내주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사이클이나 육상에서 거두었던 눈부신 성과에 비한다면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그리 크지는 않다. 하지만 와튼의 프로축구 데뷔는 당대 잉글랜드 축구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가 된 월터 툴의 현역 시절 플레이 모습 @풋볼 보헤미안

그 덕분에 백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축구의 문호가 유색 인종들에게도 열리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토트넘 홋스퍼와 노스햄프턴 초창기 레전드이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무공을 세우며 지금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월터 툴은 와튼이 벽을 무너뜨린 덕분에 축구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툴은 유색인종이 결코 백원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닌, 얼마든지 영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증명해냈다. 당연히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을 향한 영국 축구 클럽의 시선은 더욱 온화해졌다. 이전보다 유색 인종 선수들을 품으려는 노력은 더 나왔고, 1940년대에는 최초의 아시아 혼혈 출신 잉글랜드 국가대표인 프랭크 수라는 선수가 등장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조금씩 흑인 국가대표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백인 선수와 흑인 선수가 어울린 ‘삼사자 군단’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영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선수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와튼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동상까지 세워진 흑인 선수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앞에서 팬들을 맞이하는 레전드 티에리 앙리의 동상이 아주 좋은 사례일 것이다.


와튼이 활약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분명 세상은 변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더 변해야 한다. 인종 차별은 아직 진행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세대를 살아가는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몇몇 지적 수준이 의심되는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명심하고 인종 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역시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앞에 전시된 티에리 앙리 동상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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