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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Mar 27. 2020

브라질 명문 코린치앙스의 어머니
코린티안 FC

최강을 잉태한 최강의 전설

브라질 최고 명문 코린치앙스 박물관에 전시된 1930년대 유니폼 @풋볼 보헤미안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을 현장 취재했을 때의 경험이다. 마리오 괴체의 결승 골로 독일이 통산 네 번째 월드컵을 우승했던 당시 대회를 현장에서 취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회가 막바지에 들어감에 따라 취재 일정에 다소 여유가 생겨 브라질 현지 명문 클럽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상파울루 주리그에 자리한 4개 명문 클럽(코린치앙스·상파울루 FC·파우메이라스·산투스)을 들러 그들의 역사에 대해 귀중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언제고 그때 기억을 더듬어 그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어쨌든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팀은 이른바 ‘국민 클럽’이라 불리는 코린치앙스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브라질은 당연하고 남미에서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클럽이며 덕분에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어지간한 유럽 빅 클럽에 못잖은 구단이라 한다. 당연히 그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는 팀이다. 그 팀이 클럽의 모태가 됐다는 이유로 마치 스승님처럼 모시는 클럽이 있다. 무려 100년이 넘은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존경심을 잃지 않고 있다.


맨체스터 축구 국립 박물관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전설의 팀’ 코린티안 FC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팀명에서 느껴졌겠지만, 코린치앙스가 그 실력을 흠모한 나머지 팀명의 모티프로 삼았던 잉글랜드 클럽이다. 코린치앙스 박물관의 큐레이터는 당시 세계 최강의 클럽이었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는데, 솔직히 말해 사실 와 닿지 않았다. 나중에 기록을 살피니 1939년에 해체되어버린 역사 속의 클럽이 되어버린 터라 도대체 어떤 팀인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축구 국립 박물관에서는 거의 백 년 전에 사라진 이 팀을 명확히 기억함은 물론, 나아가 잉글랜드 클럽 축구의 세계화에 기여한 위대한 팀이라는 점을 후세에 전하고 있어 뒤늦게나마 그들의 위대함을 알게 됐다.  그 내용은 이렇다.


코린티안 FC는 19세기 말 잉글랜드 스포츠계에 주류 사상이었던 아마추어리즘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팀이었다. 생계를 위함이 아닌 그저 즐기기 위해 축구 경기를 했던 팀이다. 그런데 그 시절의 아마추어리즘 클럽과 비교해서도 독특했다. 


이를테면 비슷한 노선을 걸었던 스코틀랜드의 레전드 클럽 퀸스 파크 FC만 하더라도 스코티시 FA컵은 물론 잉글랜드 FA컵 등 여러 대회에 출전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코린티안 FC는 클럽의 정관에 대회 출전을 스스로 금지할 정도였다. 축구는 승패가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로 만족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신념이었다. 당시 FA(잉글랜드축구협회)도 코린티안 FC가 대회 출전을 거부하자 정식 클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보통 이런 클럽들은 실력이 좋을 수가 없다. 즐겁게 축구를 하는 것과, 이기기 위해 축구를 하는 것 자체는 지향점 자체가 다르다. 당연히 경기 내용과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코린티안 FC는 달랐다. 오로지 친선전만 치렀던 팀인데도 불구하고, 그 실력은 영국 제일이었다

코린티안 FC 소속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가 된 윌리엄 오클리. 코린티안 FC의 레전드다. @풋볼 보헤미안

그 친선전을 통해 남은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곳이 있다.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1904년 11월 2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코린티안 FC에 무려 3-11이라는 대패를 당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클럽 역대 최다 점수 차 패배로 남아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만 피해자가 아니다. 1880년대에 FA컵 4연패를 달성한 블랙번 로버스를 8-1로 대파하기도 했다. 심지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A매치에 출전한 양 팀 선수 22명이 모두 코린티안 FC라는 믿기지 않는 기록도 존재한다. 참고로 이 팀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가 된 이들만 무려 86명이다.


이처럼 굉장한 실력을 갖춘 팀이었는데, 그 실력보다 더 큰 위상을 가진 계기가 있으니 바로 그들의 해외 원정 투어다. 1907년부터 7년간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덴마크·오스트리아·스웨덴·스위스 등 유럽 국가는 물론이며 캐나다·미국·자메이카 등 북미 지역, 브라질과 같은 남미는 물론 중국까지 다녀왔다. 총 14개국을 들려 95경기를 치렀는데, 이는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클럽을 통틀어 사상 최초의 해외 투어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코린티안 FC 선수들이 탑승했다는 여객선 @풋볼 보헤미안

코린티안 FC가 이러한 해외 투어를 다니게 된 건 사실 자의 반 타의 반 내린 결정이었다. 앞서 대회 출전을 거부하는 클럽의 독특한 정책 때문에 FA와 날을 세웠다고 설명한 바 있다. FA는 더욱 강한 족쇄를 채웠다. 1907년 잉글랜드 내 모든 클럽에 자신들의 정책을 굽히지 않는 코린티안 FC와 친선전을 벌이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자신들의 품에 들어오지 않고 버티는 자세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며, 최고 권위 대회인 FA컵 챔피언이 코린티안 FC와 친선전에서 대량 실점으로 나가떨어지는 상황 역시 불편했을 것이다. 


어쨌든 FA의 이런 결정 때문에 코린티안 FC는 해외 투어 형식을 빌어 밖으로 겉돌아야 했다. 하지만 코린티안 FC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신념을 지켰다는 자부심은 물론, 본래 종교 색채를 가진 팀이라 해외 투어를 통해 선교 활동까지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註: 코린티안 FC의 코린티안은 성경의 고린도전서를 뜻한다). 


코린티안 FC가 브라질에 도착한 건 1910년의 일이라 한다. 무려 6주간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에 입성했는데, 그때 남긴 경기 기록이 어마무시하다. 1910년 8월 24일 플루미넨세전을 시작으로 이틀 간격으로 총 여섯 경기를 치렀는데, 그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플루미넨세 1-10 코린티안 FC

리우 데 자네이루주 선발팀 1-8 코린티안 FC

더 브라질리언스 2-5 코린티안 FC

파우메이라스 0-2 코린티안 FC

상파울루 FC 2-8 코린티안 FC

브라질 클럽 코린치앙스의 창립 발기 당시 모임 모습 @풋볼 보헤미안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뭉쳐 만든 클럽 파우메이라스가 그나마 버텼지 나머지 팀들은 현격한 차이로 무너진 것이다. 이런 압도적 경기력에 경도된 이들이 바로 코린치앙스를 만든 창립자들이었다. 코린치앙스의 창립 발기인 다섯 명은 파우메이라스와 코린티안의 맞대결을 지켜본 후 축구 클럽 창단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고, 지금은 브라질 내 최대 한인타운으로 꼽히는 상파울루 봉헤치로에서 창단을 결의했다. 


이때 코린티안 FC에 대한 존경을 담아 만든 팀명이 바로 코린치앙스다. 그리고 코린티안 FC의 경기를 본 지 단 열흘 만에 지역 내 아마추어 클럽과 친선전을 치르며 역사적인 출범을 알렸다. 코린티안 FC 처지에서는 그저 해외 투어 중 치른 한 경기였겠지만, 남미 클럽 축구사를 이끄는 리딩 클럽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된 것이다.


비단 코린치앙스의 탄생에만 영향을 준 건 아닐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통적인 흰색 유니폼 색상 역시 당시 코린티안 FC 선수들이 착용했던 유니폼에서 유래했다는 걸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레알 마드리드 역시 코린치앙스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최강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는 걸 떠올리면, 지금은 사라졌다 쳐도 코린티안 FC가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코린티안 FC가 전 세계를 떠돌며 보인 환상적인 축구 실력 덕에 축구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는 점도 제쳐둘 수 없는 역사적 의미라 할 수 있다.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코린티안 FC의 해외 투어 기념 사진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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