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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하리 Oct 23. 2022

1. 가슴을 쥐어 잡았던 3번의 경험

40대 후반, 나를 돌아보고 진짜 나를 찾는 마지막 기회

하루에도 수십 번 울었다, 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람을 죽였다, 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죽고 싶었다, 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다, 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숨이 막혔다, 이건 진짜.


나뿐만 아니라 회사를 다니고 있는 모든 샐러리맨들이 한 번쯤은 느껴봤을 경험이다.

나는 이런 기분을 회사 생활 23년 동안 딱 3번 심하게 느껴 보았다.




#에피소드 1

30대 후반 입사 12년 차, 노동조합 비전임 간부를 하다 사측에 잘못 보여 업무에서 배제, 믿었던 상사의 묵묵부답, 친했던 동료의 무시를 느꼈을 때다. (그 당시 나와 가장 친했던) 우리 부장님은 나에게 2개월 동안 업무를 주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하던 업무도 내가 참여한 부서 회의 시간에 각자 내 업무를 분담했다. 어이가 없어서 "저는 뭘 할까요?" 물어봐도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해줬다.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내 업무를 나눠 가졌다.

그때 처음 느꼈다, 일이 없어도 이렇게 힘들 수 있구나.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만 있었다. 말을 붙여주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입사 10년 만에 처음 땡순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2개월 후 지방 발령을 받았다. 발령 30분 전에 지방 발령을 알았다, 그것도 비공식 루트로.


금요일 저녁 발령을 받고 월요일 새벽 전남 어느 도시에 9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다행히 지역본부장님께서 나의 딱한(?) 사정을 보살피셔서 전북 소도시(지방본부의 00 사무소)에 발령을 받아 출퇴근을 했다. 아직도 그때 출퇴근 시간의 공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무섭고, 외로운 그 추위가 가끔씩 꿈에도 나온다. 초2, 초1 아이 둘을 대전에 두고 1년 조금 넘게 출퇴근을 했다.

그 이후 나는 업무가 없으면 불안하고 우울한 이상한 강박 증상을 겪고 있다.




#에피소드 2

저 지역본부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본사로 출근하는 16년 차 어느 날. 문득 회사에서 복지 차원에서 제공하는 - 제공하면서도 엄청나게 생색내고 그 복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선망하게끔 만드는 그 복지 - 통근버스를 타고 다 같이 출입문을 통과하고 목에, 휴대폰 케이스에 있는 출입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드디어 인사하는 그 컨베이어 벨트 같은 일상에 적응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침 출근길 셔틀버스에서 내리는데 그 장면이 그냥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눈앞에 움직이는 동료들이 하나의 부품 같아 보였다. 딱,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2배속으로 보는 듯한 그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걸 느낀 순간 너무 그 자리에 있기가 싫어서, 이 컨베이어 벨트 속 하나의 부품이 되기 싫어 그 줄에서 잠시 벗어 나 보았다, 커피를 산다는 핑계로.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되도록 통근버스를 타지 않았다.




#에피소드 3

해외사업을 시작하고 3년 만에 사업 수주를 하고 그 공으로 해외에 파견 중이었던 21년 차는 '인간관계'로 너무나 힘든 시기였다. 그 문제로 무기력증에 빠졌으며,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왔다. 약을 안 먹으면 술을 마시고 그렇게 버티다 책을 읽고, 유튜브 강의를 듣고, 어설픈 글로 표현하며 조금씩 극복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당사자'의 카톡, 아니 이름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숨이 막히고, 손이 떨린다.


해외사업이란 업무가 처음이었던 나는 이 일이 너무너무 재밌었다. 만 3년을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고 해외출장도 수십 번을 다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인도네시아 한 나라만 팠다.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인맥이 넓어지고, 정보가 많아지고 ‘인도네시아 통’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걸 활용해서 드디어 3년 만에 큰 사업은 아니지만 수주를 했다.

나를 이렇게 키워준 분이 지금 이 글의 당사자이다. 나는 그분께 정말 많은 지식과 업무를 배웠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나의 의견도 정말 진심으로 들어주셨으며, 항상 칭찬하시며 나의 성과에 비해 과분한 격려를 해 주셨다. 이런 상사는 나도 거의 처음이어서 이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주말에도, 새벽에도 저녁 늦게 일을 해도 너무 행복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나를 인정해 주는 게 고팠던 아줌마였다. 가끔씩 심장이 쪼그라드는 경험도 했었고, 음주접대와 스트레스로 10킬로가 쪘어도 너무 행복했다. 이런 분이 2019년 퇴직 기한이 되셔서 처장직을 놓으시고 다음 해에 전문직이 되셨다. 그리고 같이 진짜 큰 사업을 하나 만들자고 나와 함께 이 나라로 파견을 오셨다. 좋은 관계는 거기서 끝나야 했었다.

이분은 아직 본인이 전문직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하셨고, 나는 지사장이라는 직책으로 이 분을 관리해야 했다. 본인의 ‘가오’가 가장 중요한 분인걸 알기에 인니에 계신 한국 기업들을 상대하는 곳에는 내가 가지 않았고, 나는 지사 내부 업무 위주로 관리비 정산부터 사업개발까지 혼자 했다. 그래도 그게 성에 차지 않으셨다보다. 예전처럼 하나하나 본인에게 보고를 하지 않으니 “계속 왜 혼자 결정하느냐”, 본사에서 연락이 와서 말을 전달해 드리면 “이런 건 왜 내게 알려주지 않느냐”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셨다.

이런 일로 저녁이 되면 술 한잔 하시고 내게 카톡 테러를 하시고, 나는 다음날 아침 계속 화해를 시도하고... 말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뭔지 심각하게 겪었다.

지금은 퇴직을 하시고 나와는 접점이 끊겼지만 가끔씩 연락이 온다. 미안하다는 말씀을 계속하시며 화해를 시도하시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이렇게 회사를 다니며 가슴을 쥐어 잡는 에피소드를 더 이상 만들기 싫어 이렇게 글을 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어땠는지 차분히 적으며 슬펐던 날은 잊어버리고, 기특했던 나는 기억하며 미래의 나를 준비하고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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