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맨과 펭수에 열광하는 어른이 문화
연말이 다가오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합니다.
여러 모임과 행사에 참여할 생각에 들뜨기도 하면서 한 편으론 나이도 한 살 더 먹어야 하니 숙연해지기도 하죠.
한 번도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고서 나이를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른이 되기 전 막연하게만 상상했던 어른이란, 마치 어렸을 때 병아리에서 어느새 닭이 되듯 그렇게 한순간에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저마다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아주 조금씩 더 나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뿐. 아직도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린이와 어른 사이 어딘가 애매한 경계에 내가 있다는 느낌 정도를 가질 뿐입니다. 다만 앞서간 어른들의 발자취를 보며 우리는 가벼움보다는 무거움과 신중함을 어른의 미덕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제법 어른 흉내가 익숙해져 갈 때 즈음 현실에 움츠리면서 지내다 보니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판타지나 만화가 더 이상 예전처럼 환상적으로 재미있지 않았던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오히려 갑갑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도 극적인 출구를 만들어주는 막장 드라마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삶의 영역과 규범을 완전히 초월한 자연인의 삶에 동경을 느끼죠. 현실에 더 가깝거나, 혹은 완전하게 초월하거나. 나의 팍팍한 삶과 현실도 만약 '저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어른'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주는 갑갑함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세상이 변해갑니다. 몇 년 전 'YOLO'라는 키워드가 삶의 다양성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어서 '소확행', '워라밸', '취향 존중' 같은 문화코드는 더 이상 사회의 규범과 통념에 내 삶을 얽매이지 않고 분명한 선을 긋겠다는 '요즘 어른'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이런 요즘 어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영원히 철들기를 거부합니다. '어른이'라는 문화로 불리기도 하죠. 어른이들은 취업만큼이나 퇴사를 공부하고 성공에 대한 열망만큼 잘 노는 방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습니다. 옛날 어른 세대들이 어려운 현실을 부정하고 힘들어도 애써 딛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해 고군분투했다면, '어른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보다 해학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른이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생각과 시선은 최근 유튜브에서 주목받는 캐릭터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장성규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워크맨> 채널은 다양한 업종의 아르바이트생이 되어 직접 그 고충을 체험합니다. 사회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삶의 백그라운드 영역, 그 고된 현실에서 남몰래 삼켜야만 했던 고충과 무리한 요구에 장성규 아나운서는 '원래 이런 것이 맞냐?''라며 불합리하고 불편한 상황을 거침없고 통쾌하게 정면 반격합니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면 사장에게 개념 없다는 소리나 듣고 불편한 알바생으로 낙인 찍혔을 것이기에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해주는 솔직한 모습에 어른이들은 '현실판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요즘 '직통령'이라고 불리며 직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이언트 펭TV의 캐릭터 <펭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보면 귀엽지만 사백안을 가진 무언가 엉뚱한 펭귄 '펭수'는 마냥 착하기만 했던 기존 캐릭터와는 다릅니다. 펭수는 고성을 지르거나 흥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예의를 갖추지도 않습니다. 평소에는 마냥 귀엽지만 가끔씩 10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동년배'스러운 말투와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어른과 어린이 사이 어딘가에서 괴리를 안고 살아가는 어른이 세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른이들은 펭수의 입체적인 성격과 의외성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투영해보거나 깊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동안은 당연히 어른으로서 페르소나(만들어진 자아)와 에고(본래의 자아)를 철저하게 분리하면서 살아왔지만 어른으로 살아온 지난시간 내 안에 쌓인 나의 진짜 목소리와 열망을 펭수가 수면 위로 다시 끌어올려준 셈입니다. 어린이들이 애니메이션을 판타지로 여겼던 것처럼 '어른이'에게는 펭수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판타지인 것입니다.
사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른이 문화'코드에 웃고 즐거워한다고 해서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누구나 숨 막히는 현실을 초월하고 싶어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세상에 철들어 버렸지만 더 이상은 고매하게만 살지 않으려는 일종의 회귀본능인 것이죠. 그래서 적어도 내가 꼰대라고 부르던 옛날 어른이 아니라 조금은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진짜 어른' 같은 건 애초에 신기루처럼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평생을 지금처럼 '어른이'인 채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경험과 시행착오를 겹겹이 쌓아가면서 말이죠. 한 가지, '어른이'란 어른과 아이의 과도기적 표현이지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함에도 이미 '어른'이라는 사실입니다. 늘 덤벙대고 실수하고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어온 이유가 내가 아직 부족한 '어른이'이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지금의 이 과정과 시간은 '어른'이 되고 싶은 '어른이'가 더 훌륭하고 완전하게 성숙해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겠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은 오롯이 더 나은 어른이 되고자 최선을 다한 자신을 돌아보고 다독여주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나에게 깜짝 선물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니까요!
(아마도, 쿠팡맨이겠지만?)
이 콘텐츠는 한성자동차의 디지털 매거진 '위드한성'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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