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지
*로 인용 각주를, °로 내용 각주를 표기하였습니다.
원래 오타쿠는 5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거라는 말이 있다.* 2016년 3월. 나는 내 인생을 망치게 된 영상을 하나 보게 된다. 별 건 아니다. 150505 더쇼 흥탄소년단 무대 영상 1분 27초~1분 29초다. 이 2초 때문에, 한 소녀는 당시 ‘핑크머리 걔’로 불리던 남성에게 한눈에 반해 인생을 바치기로 결정한다. 고작 초등학생 주제에 인생을 걸고 그랬다. 아마 초등학생이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처음 시작한 ‘덕질’은 새로운 세계였다. 나무위키를 몇 번씩 읽으며 최애의 생일, 고향, 혈액형, 포지션을 외웠고, 고척돔부터 잠실주경기장까지 규모를 키워가는 콘서트에 몇 번이고 따라갔다. 사진과 움짤을 갤러리 용량이 부족할 만큼 저장했고, 플레이리스트를 전부 방탄소년단의 곡들로 채웠으며, 당시 초등학생 용돈으로는 벅찬 가격이었던 4종짜리 앨범과 각종 굿즈들도 ‘오빠들’을 위해 전부 구매했다. 정말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덕질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덕질은 점점 스트레스로 바뀌어갔다. 타 팬덤과의 싸움, 성적을 위한 노동, 안티들의 선을 넘은 비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스트레스였던 것은 나의 아이돌의 논란이었다. 열애설? 팬 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성혐오 논란이었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에게 여성혐오 논란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널 가두는 유리천장따윈 부숴*’라는 가사가 대체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지. <호르몬 전쟁>은 왜 더 이상 콘서트에서 들을 수 없는 곡이 되어버린 건지. 왜 나의 아이돌이 브이앱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공부를 한다고 하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내 아이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까도 내가 까기 위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82년생 김지영』을 따라 읽었고, 트위터 사람들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페미니즘 입문 서적을 찾아 읽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페미니즘도 이제 케이팝만큼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고,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페미니스트와 팬이라는 정체성은 내 안에서 나란히 공존한다. 둘 사이 분명한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는 있지만, 이제 둘 중에 무엇이 더 나를 잘 설명하는지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많은 여성들이 유사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작했던 페미니즘이지만, 이제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는 내내 내 안의 두 자아가 충돌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키워 나갈 때마다, 케이팝 안에서 여성혐오가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케이팝을 계속 좋아한다는 것은, 케이팝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 팬에 대한 혐오적 관행부터 여성 아이돌에 대한 상품화까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이 나만의 고민이 아님을 알았을 때,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과연 케이팝과 페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이번 파트에선‘페미니스트 팬’으로서 케이팝에 대해 느낀 모순을 짚어보고, 그 안의 여성혐오적 실태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 본 글에서 작성하는 단락의 소제목은 케이팝 노래 가사 중 한 구절을 발췌해 인용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가사의 출처는 각주에 명시하였으며, 인용한 곡들을 모은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의 QR을 본문 상단에 첨부하였다.
* 블랙핑크(BLACKPINK), Kill This Love, 2019.
* 쑨디(2024), “원래 오타쿠는 5초도 안되는 찰나의 순간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거야”, 2024.11.04., 트윗.
* 방탄소년단(BTS), Not Today, 2017.
케이팝을 좋아하는 여성에게 흔히 ‘빠순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어린 여성들의 팬덤 문화를 비하적으로 칭하며 극성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언어였던 빠순이는, 이제 자신을 자조적으로 부르는 말이 되었다. 아직 그 단어에 담긴 부정적 어투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빠순이는 여성 팬 스스로에 의해 어느 정도 전유된 언어라 할 수 있다. 여성 팬덤은 빠순이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로이 확립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 문화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는 어떤 다른 공동체에서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인 경험이자 새로운 즐거움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여전히 빠순이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대우는 부정적이다. 케이팝 산업은 글로벌한 산업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 성장의 주역인 빠순이는 여전히 차별받는다. 그리고 빠순이가 당하는 차별에는 아이돌 팬으로서 겪는 차별만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겪는 차별이 겹쳐져 있다.
2023년 7월, 하이브 보이그룹 ‘앤팀(&team)’의 팬싸인회 중 담당 스태프의 과한 신체검사가 논란이 되었다. 스태프는 팬이 전자기기를 몸에 숨겨 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 팬의 속옷 내부까지 검사하였고, 성추행 수준으로 신체 부위를 만지며 몸을 수색하였다. 여성 팬을 향한 신체검사는 남자아이돌(이하 남돌)이 직접 볼 수 있는 곳에서까지 이어졌다.* 절대 다수가 여성 팬으로 이루어진 그 공간에서, 여성 팬에 대한 존중은 전무했다. 실제로 신체검사를 당한 여성 팬은 “너무 수치스럽고 인권이 바닥이 된 기분이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후에야 형식적인 사과문을 게재하였다. 그 사과문의 내용도 ‘너네가 먼저 자꾸 숨겨서 들어왔잖아’라는 투였기에, 결국 빠순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에 불과했다. 슬프게도 이런 대우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콘서트에서의 대포 카메라 수색을 위한 과한 신체검사부터, 관객에 대한 존중을 전혀 보이지 않고 고함을 치는 스태프까지. 돌판의 ‘빠순이 대우’는 유구한 괴담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어린 여성 팬덤을 향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최근 트위터에서 ‘빠수니인권 안동아저씨가 챙겨줌*’이라는 트윗이 화제가 되었다. 올해 7월 폭염으로 무더운 날, 아이돌 행사 입장을 위해 팬들을 몇 시간씩 천막도 없는 길바닥에서 대기시키자, 5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스태프에게 화를 내는 영상이었다. 이때 스태프는 그를 폭력적으로 응대하거나 그의 말을 도중에 무시하지 않고, 남성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다. 이는 여성 팬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남성을 대하는 스태프의 대우가 평소 빠순이를 대하는 태도와 매우 달랐던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웠던 건 ‘스태프에게 화를 내는 장면’ 그 자체였다. 애초에 빠순이에겐 공연 스태프한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빠순이가 공연 스태프한테 화를 낼 수 없는 것엔 많은 이유가 있다. 스태프가 공연 입장과 관람에 불이익을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행사에서 괜히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 모든 일들이 원래 그렇게 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폭염과 폭우에도 천막 없는 장시간 대기, 본래의 의도를 벗어난 본인확인, 공연 스태프의 폭력적 대응과 조롱 등… 케이팝 업계가 아이돌을 인질로 쥐고 저지른 만행은 이제 자연스러운 관습이자 문화로 여겨진다. 팬덤 밖에서 보면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일들이, 지금 빠순이에겐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빠순이는 케이팝 업계에겐 언제나 그렇게 해도 되는 존재이다. 단지 그들이 대부분‘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이처럼 빠순이에 대한 차별 안에는 여성혐오가 있다. 케이팝이라는 산업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여성 팬의 비중이 늘어가는 모든 곳에, 여성혐오로부터 출발한 빠순이 차별이 존재한다. 매일 야구를 보는 여성들에게 ‘룰을 알고는 보냐’라는 말처럼, 밴드를 좋아하는 여성들에게 ‘얼굴만 보고 좋아하냐’라는 말처럼 말이다. 빠순이도 깊이 있게 사유할 수 있고, 하나의 문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여성 팬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현실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괴롭게 한다.
여성 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 신분증과의 얼굴 대조 같은 형식적 절차를 넘어, 출신 학교의 교가를 불러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본인확인을 해도, 빠순이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아이돌을 보기 위해 공연장에 간다. 그렇다고 해서 빠순이가 지금 케이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수많은 만행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빠순이 역시 이 악습이 바뀌어야 함을 알고 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이돌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이 사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아직 페미니스트 팬은 답을 내리지 못했다.
* NCT DREAM, CHILLER, 2025.
* 한겨레(2023), “여성팬 함부로 해도 된다는 ‘아이돌 왕국’의 폐습”, 2023.07.15.
* 한겨레(2023), 위의 글.
* 모몽이(2025), “빠수니인권 안동아저씨가 챙겨줌”, 2025.07.15., 트윗.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中
양귀자 작가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주인공 ‘강민주’의 서술 중 일부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이 글이 틀렸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남자”, 즉,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반대하는 남자는 이 지구상에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강민주를 비롯해 모든 남성들을 불신하는 일부 여성들에게 공감한다. 2030 남성의 94.5%가 페미니즘 지지에 거부감을 느끼는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전혀 다른 남자”일 확률이 희박한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절대 같이 살아갈 수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 그 2030 남성 안에는 분명 나의 남돌도 있다. 모든 2030 남성이 안티페미니스트라고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2030 남성 집단 내의 주류임엔 반박할 수 없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팬은 나의 남돌이 그 남성 집단의 ‘예외’이길 바라야 하지만, 내 아이돌이 주류 흐름으로부터 예외이길 바라야 하는 현실 자체가 페미니스트 팬으로서의 덕질을 괴롭힌다. 실제로 그의 정치색이나 가치관이 무엇인지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남돌 팬들은 흔히 ‘남성’과 ‘남돌’이 다른 성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남돌은 대개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팬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게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은 삼간다. 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남성 대다수가 안티페미니즘의 흐름을 따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기에 여성 팬은 남돌을 남성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자신이 남돌에게 들이는 돈과 애정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남돌은 남성과는 다른, 여성 팬이 마음껏 소비해도 괜찮은 존재로 만들어진다. 남돌의 행보가 단지 여성 팬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에 불과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여성 팬의 팬심과 덕질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많은 남돌은 여성을 겨냥한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지만, 언제든 ‘남성’으로 추락할 수 있는 위기를 가진다. 소통 앱 속의 글, 유튜브에 올린 커버 곡, 자주 듣는다고 밝힌 아티스트 등… 남돌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곳에서 여성혐오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여성 팬은 자신의 남돌이 ‘이런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매번 의식하며 걱정한다. 그리고 실제로 남돌의 여성혐오적 행태가 드러났을 때,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선 침묵하기도 한다. 아무리 여성 팬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미 한 배를 타버린 남돌을 쉽게 떠날 수 없는 마음은 여성 팬이 자신의 가치관과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침묵하지 않는 여성 팬 역시 마찬가지의 고민을 겪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돌의 여성혐오를 고발하고 나서도 고발의 대상을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더더욱 비난의 대상이 된다. 팬덤 내부에겐 ‘배신자’로, 팬덤 외부에겐 ‘여혐돌의 팬’으로 불리며, 양쪽으로부터 쏟아지는 공격을 견뎌야 한다. 그렇다고 그 남돌을 탈덕한다고 해서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남돌은 다를 것 같냐’, ‘남돌에게 배신당하고도 또 남돌을 믿냐’와 같이, 남돌을 좋아하지 않는 팬덤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계속된다. 좋아하는 남돌의 여성 혐오 논란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해도, 돌아오는 것은 여성 팬을 향한 조롱과 비난뿐이라면 여성 팬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모든 것은 남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이 ‘탈케’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굴레와도 같다.
이제 여성 팬은 스스로 ‘현타’를 맞는 것을 넘어, 일종의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 ‘남돌을 좋아하는 것이 모든 남성의 여성혐오를 눈감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여성혐오를 방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질문은 남돌 팬인 스스로를 위축시키며, 자신이 지닌 팬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든다. ‘남돌을 좋아하는 나를 정말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남돌을 좋아하는 많은 여성 팬에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으로 남아있다.
* 태민(TAEMIN), 이데아(IDEA:理想), 2020.
* 양귀자(1992),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파주: 살림, 46.
* 경향신문(2022), ““페미니즘 지지에 동의한다”는 2030 남성비율, 단 5.5%”, 2022.07.06.
여자아이돌(이하 여돌)을 좋아하는 팬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난 몇 년간 끝나지 않는 논쟁의 대상인 여돌의 ‘주체적 섹시’는 물론, 여돌의 성적 대상화°와 성 상품화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여돌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여돌을 주축으로 벌어지는 케이팝 산업의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이어지는 글에선 여돌과 여성 팬,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케이팝 안에서 어떻게 얽혀 있는지 하나씩 짚어가며, 여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 안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돌은 일종의 성녀이다. 대중이 요구하는 시선에 맞추어진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인 여돌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고정관념을 답습함과 동시에 재생산한다. 여돌은 마른 체형을 유지하면서도 남들이 보기 ‘불편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카메라에 잡히는 모든 순간마다 표정을 관리해야 하며, 자신이 대중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무해한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딸기를 양손으로 잡고 먹는 것조차 ‘논란’이 되는 여돌의 세계에선 어떠한 흠결도 용납되지 않는다. 외모, 실력, 인성, 발언, 태도… 모든 측면에서 여돌은 ‘규범’에 맞는 여성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여돌은 성녀의 자리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그 규범을 내면화한다.
한편, 여돌은 일종의 창녀이기도 하다. 위문공연부터 워터밤까지, 여돌은 남성의 쾌락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여돌은 신체가 과하게 부각되는 옷을 입는 것은 물론, 남성 청자를 노골적으로 저격하는 섹스어필이 들어간 노래나 뮤직비디오를 발매한다. 그리고 그들의 신체는 조각조각 확대되어 직캠으로 돌아다니며, 이 과정에서 여돌은 마음껏 대상화해도 되는 존재로 치부된다. 대중적 성공을 거둔 여돌부터, 그렇지 않은 여돌까지 예외는 없다. 여돌은 이런 산업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수행한다.
이처럼 여돌은 성녀와 창녀라는 이중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스스로를 대상의 자리에 올려둔다. 그리고 이는 남돌은 겪지 않는 여돌만의 문제이다. 남돌 역시 분명 ‘아이돌’로서 상품화되며 주체성을 빼앗기고 있지만, 여돌에게 가해지는 대상화에 비해 그 정도가 덜하다. 여전히 여돌은 남돌에 비해 더 쉽게, 더 가혹한 대상화의 잣대에 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여돌은 남돌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심각한 대상화의 문제를 겪는 것일까? 그 이유는 현재의 케이팝 구조를 지배하는 ‘남성적 시선(male gaze)’에 있다.
남성적 시선이란 여성 인물이 단순히 이성애자 남성의 즐거움을 위한 대상으로만 치부되고 묘사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는 처음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단면적 성적 대상화를 문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언어이지만, 나아가 모든 대중 매체 속 여성이 이성애자 남성의 즐거움에 일방적으로 맞추어져 있음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남성적 시선이 작용하는 산업의 범주에서 케이팝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남성적 시선 아래 여돌은 자신이 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거나 추구하는 주체여서는 안 되며, 이성애자 남성 팬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이상적인 ‘소녀’를 재현해야 한다. 즉, 여돌은 순수한 처녀성을 가진 수동적이고 무해한 존재로서 성적 대상화되지만, 이것이 자신의 자의로 선택한 것이라는 주체성까지 갖추도록 요구받는 것이다.*
소녀들은… (중략)… 젠더와 나이의 구조적 위계에는 무지하지만 문화시장에서는 자신의 육체를 상품화하고 이용하는 경제적 주체로서 자신의 ‘선택’과 시장의 동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즉 이미지를 착취당하지만 피해자여서는 안 되는 분열을 겪는다.* – 김은하 외 9인, 『소녀들』 中
현재 여돌의 많은 부분은 남성적 시선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앞서 성녀로서의 여돌이 내면화한다고 이야기했던 ‘규범’은, 사실 남성적 시선이 요구하는 무해함과 순수함이라는 족쇄에 불과하다. 또한 창녀로서의 여돌이 성적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추구하는 ‘주체성’ 역시, 남성적 시선에 의해 수동적으로 요구된 것이라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처럼 성녀와 창녀라는 틀은 여돌이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역할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사실 그 본질은 남성적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그리고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구조는 그 허상을 정당화한다. 현재 여돌의 과도한 대상화라는 현상 이면엔, 남성적 시선으로 드러나는 구조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조적 원인이 있다고 해서, 여돌이 케이팝 산업의 무결한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다. 여돌은 남성적 시선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남성적 시선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의 수많은 여성은 미디어를 통해 비추어지는 여돌을 모방한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스스로를 억압적인 규범에 맞추고, 자신의 신체를 대상화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것이 단지 남성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임에도 말이다. 이처럼 여돌은 여성의 우상(idol)이자 모방의 대상으로 자리 잡으며,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 많은 여성이 남성적 시선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있다. 여돌이 이 권력 구조를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마찬가지이다. 여돌은 현재 구조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구조가 만들어낸 ‘상징’으로서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에 기여한다.
그렇기에 여돌과 페미니스트는 충돌한다. 페미니스트는 남성적 시선과, 현재 케이팝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 권력 자체에 전면적으로 저항한다. 그리고 그 저항의 과정에서, 남성적 시선을 재생산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여돌을 공격하게 된다. 물론 페미니스트는 케이팝 산업 내에서 여성혐오가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분명 남성 권력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며, 정당화하는 주체 역시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선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돌이 아무리 ‘걸 파워(girl power)’를 외치더라도, 여성을 위한 만트라(mantra)를 퍼뜨려도, 여전히 여돌과 페미니스트는 다른 길을 걷는다.
페미니스트 팬은 이 충돌의 양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돌이 여성혐오에 기반한 산업 안에 있으며, 그 여성혐오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팬덤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서서, ‘대상’으로서의 여돌을 사랑하는 팬의 자아와 이를 해체하려는 페미니스트의 자아 간의 충돌과 모순 속에서 갈등한다. 자신 역시 그들의 대상화된 모습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 괴리를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 괴리로부터 여성 팬은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나와 내 여돌을 위한 페미니즘이 어쩌면 둘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성 팬 안에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 팬은 여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여돌의 모든 모습을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페미니스트 팬의 모순은 현재진행형이다.
* 아이들(I-DLE), Nxde, 2022.
° 성적 대상화(sexual objectification)는 타인을 ‘비인간화/사물화’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적극적으로 해주어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본 내용을 설명하는 적확한 용어는 유도체화(derivatization)이나, 이 글은 상대적으로 여러 차례 논의가 진행되었던 성적 대상화라는 용어로 그 맥락을 포괄했음을 밝힌다.
* Liz Jonas(2021), “Crafted for the Male Gaze: Gender Discrimination in the K-Pop Industry”, Journal of International Women’s Studies(JIWS), vol.23, issue 1, 234-235.
* 김은하 외(2017), 『소녀들』, 서울: 도서출판여이연, 9.
* 김은하 외(2017), 위의 책, 9-10.
여성에 대한 대우가 문제적인 것과는 별개로, 사실 케이팝은 누구보다도 ‘여자 눈치’를 많이 보는 산업이다. 여성 팬들의 취향에 맞추어 굿즈를 팔고, 여성 팬들이 주로 사용하는 밈을 이용해 앨범과 신곡을 홍보하며, 대개 여성 팬들이 향유하는 알페스(RPS) 문화를 의식적으로 겨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케이팝 산업의 소비자 대다수가 여성이니, 수요와 공급이라는 두 차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하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 우리는 이전 파트에서 설명한 모순이 해결된다면, 마음 놓고 대우받으며 케이팝할 수 있는 것일까? 기획사와 스태프의 빠순이 대우가 개선된다면, 페미니스트가 남돌을 사랑하는 감정이 팬덤 내외부에서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여돌을 대상화하는 남성적 시선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페미니즘을 몰랐던 때처럼 마음 편하게 케이팝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케이팝과 페미니즘이 잡음 없이 동행할 수는 없다. 케이팝과 페미니즘은 근본적인 구조 자체에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모순의 핵심이다. 이번 파트에선 신자유주의가 케이팝 산업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왜 필연적으로 페미니즘과 충돌하는지를 밝히려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현행의 케이팝 산업이 페미니즘과 동행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 레드벨벳(Red Velvet), Psycho, 2019.
‘팬 인증’ 받습니다. 그리고 그 팬 인증은 앨범 구매, 스밍 인증, 버블 인증으로만 가능합니다.
아이돌을 몇 년을 좋아하더라도 자신의 팬심을 증명하는 것은 돈이다. 돈을 쓰지 않는다면 나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케이팝 산업은 반드시 구매 및 소비와 연결되어 있다. 언제부터 팬의 사랑은 구매로 이어지게 된 것일까? 왜 우리는 사랑을 돈으로 바꾸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 기저에는 신자유주의가 놓여있다.
먼저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조정적 개입에 반대하고, 자유경쟁에 기반한 시장 질서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 체제이다.* 현대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유사한 의미로 혼용되곤 하지만, 그 근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기존 고전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국가는 경제적 시장의 역할과 정치적 공론장의 역할이 결합한 ‘국민 국가’로서 기능하였으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사실상 시장이 지배하는 것이 전부인 ‘시장 국가’로 변모하였다. 경제적 합리성이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가치로 들어서면서, 국가가 기존 수행하던 정치적 장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힘을 잃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 국가에서의 국민은 더 이상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가 아닌, 경제적 행위자이자 돈으로 환원되는 존재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국가의 기조와 체제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 전반을 장악하였다.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가치가 한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규정짓는 내면의 질서로서 작용하도록 하며,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을 개인의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두도록 하는 신자유주의는 자연스럽게 능력주의, 무한경쟁주의, 그리고 고도의 소비주의°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동반하였다.
케이팝 역시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깊게 묻어있는 산업이다. 아이돌의 능력만이 곧 아이돌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처럼 덮어두는 능력주의, 다른 아이돌은 모두 밟고 올라가야 할 ‘경쟁자’이자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무한경쟁주의 모두 케이팝의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케이팝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소비를 촉발하고 촉진하는 소비주의이다.
아이돌의 세계는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는 수치화의 세계다. 앨범 판매량, 음원 스트리밍 횟수, 콘서트 좌석 규모, 뮤직비디오 조회수… 그 모든 수치는 곧 아이돌의 ‘성적’이 되며, 그 성적만이 아이돌의 성공을 증명해 줄 수 있다. 인기나 대중성 등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들 역시 성적이라는 객관적 지표를 통해 인정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이때 모든 객관적 지표는 팬덤의 ‘경제적 구매력’과 연결되어 있다. 팬덤과 기획사를 비롯한 케이팝 산업 내의 모두가 성적이 높을수록, 즉 ‘소비자가 많이 사줄수록’ 더욱 우수한 그룹이라는 소비주의적이고 경쟁주의적인 인식을 암암리에 공유한다. 그렇기에 팬은 아이돌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 소비자를 자처하게 되고, 소비자라는 지위를 거부하는 팬은 아이돌의 ‘진짜 팬’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연결된 아이돌과 팬을, 소비라는 행위로 연결된 상품과 소비자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그 지위의 일치만이 팬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방법인 현실은 분명 기괴하다. 한 사람의 진심을 단순히 돈으로 바라보고 이용하려고 하는 구조 속에서, 팬은 계속해서 소비라는 행위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팬은 아이돌에게 수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CD 한 번 듣지도 않을 앨범을 몇백 장씩 구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뮤비 조회수와 음원차트 순위 상승을 위해 같은 노래를 무한히 반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마치 ‘순수한’ 사랑의 징표처럼 보여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팬의 순수한 사랑 이면에는 몇백 몇천만 장의 앨범으로 만들어진 쓰레기 산이 있고, 스트리밍으로 인해 배출된 엄청난 양의 탄소가 있다. 케이팝 업계는 이러한 이면을 교묘히 감추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터전을 망치는 방식으로 아이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무한한 소비를 종용하는 이데올로기가 집어삼킨 팬심은 지속 불가능한 사랑이다.
기획사를 비롯한 업계는 앨범, 굿즈 등에 대한 구매를 부추기는 것을 넘어,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이돌 그 자체를 판매하기도 한다. 일상과 소통을 비롯한 아이돌의 사적 공간부터, 팬들과의 만남이나 가벼운 스킨십까지, 아이돌의 모든 것은 상품으로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지금 상품화되고 있는 존재가 한 명의 존엄한 인간이라는 인식은 뒷전으로 밀린다. 이 산업에서 이익을 보는 관계자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한다. 아이돌이 동의했기에 그들의 모든 것이 상품으로 팔려도 된다고 믿는 것은, 소비주의의 폭주를 방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팬 역시 점차 이 구조에 동조하게 된다. 소비주의에 익숙해진 팬은 아이돌이라는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아이돌에게 자신의 요구에 맞출 것을 강요한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아이돌을 응원하고 좋아하던 마음이, 아이돌을 인간이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여기고 평가하는 마음으로 변질된 것이다. 버블(Bubble)과 같은 프라이빗 소통 앱은, 팬의 마음이 변질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월평균 4,500원으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소통 앱은 분명 아이돌과 팬이 소통하기 위한 창구로서 만들어졌지만, 이젠 아이돌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심판대가 되었다. 팬은 각각의 아이돌마다 일주일에 몇 회 소통 앱에 접속하는지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며, 아이돌이 자신이 기대한 만큼 소통 앱을 찾지 않는 경우 ‘돈값 하지 못한다’, ‘아이돌로서의 진정성이 없다’며 비하한다.
아이돌은 한 명의 인간이며 자아가 있는 주체이다. 팬이 돈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단편적으로 평가하고 비하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이돌이 자신의 일상을 비롯한 모든 모습을 ‘유료 프리미엄 상품’으로 바꾸어 놓으면서부터, 팬이 아이돌에게 소유하고 있는 소비자 권리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혼동이 생기고 있다. 팬은 아이돌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어야 할까. 애초에 아이돌이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자아 없음’이 하나의 셀링 포인트인 아이돌 산업에서, 아이돌은 나날이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아이돌이라는 한 인간 자체를 돈으로 바꾸어 팔고 있는 기획사가 문제일까. 그것에 동의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아이돌이 문제일까. 아니면 그것을 구매하며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하는 팬이 문제일까.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더 많은 수익이 더 좋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의 일종이 될 수 있다며 시장의 만행을 방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있다. 그리고 케이팝은 신자유주의의 경계와 사회가 용인하는 도덕성의 경계 사이를 아슬히 넘나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케이팝과 신자유주의를 분리할 수 없다. 그 결합은 너무도 끈끈하게 엮여 있다.
* 에스파(aespa), Black Mamba, 2020.
* “신자유주의”, 《위키피디아》.
* 박혜영(2018), <신자유주의 시대의 젠더구성과 남성성의 변화 — 생태적 대안에 대한 모색>, 《인문논총》, 75(1), 583-584.
* 사야크 발렌시아(2021), 『고어 자본주의』, 최이슬기(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75.
° 소비주의(consumerism)는 대량의 재화와 용역의 구입을 부추기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통칭한다.
그렇다면 왜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야 할까? 왜 둘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사랑을 돈으로 바꾸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성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과 엮여 있다는 말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둘을 다른 층위로 보며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이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핵심적 속성을 들여다보면 신자유주의와 분명히 모순을 갖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글은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초기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등장한 경제적 주체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전 시대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가 남성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젠더 중립적인 주체로서 등장하였다.*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며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다면, 젠더와 관련 없이 누구든 신자유주의하에서 자유롭게 노동하고 경쟁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성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처음으로 ‘주체’로서의 지위를 남성과 동등히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 고전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가부장제(patriarchy)’는 여성 노동자가 자본가
의 관점에서 덜 생산적이며 덜 효율적인 이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였고, 이는 이윤 확대와 비용 축소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서도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여성관에서 여성은 ①재생산을 하거나, 해야 하는 존재 ②남성에 비해 생산 능력이 부족한 존재 ③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라고 여겨졌으며, 이러한 낙인은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은 고전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겪어야 했던 노동의 성차별적 분업과 가부장제로부터 발생하는 임금차별° 등에서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의 시장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고전적 자본주의에서의 여성은 ‘가정주부’의 역할로 한정되는 문제를 겪었지만, 신자유주의하의 여성은 그것에 더불어 시장 내의 경쟁까지 추가적으로 감당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국가를 비롯한 기존의 권력층은 여성에게 그 두 가지 역할을 균형 있게 수행하길 요구하였으며,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가중적 부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일-가정 양립’을 지키는 여성이 ‘좋은 여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확산하였다.*
2025년 한국 사회에서 역시, 가부장제와 결합한 신자유주의는 여성혐오 이데올로기를 추동하고 있다. 현대의 많은 여성들은 재생산과 가사노동의 수행을 거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다. 현대 사회의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와 유사 수준의 노동을 제공하지만, 기업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을 더 ‘열등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이때 국가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차별적 대우를 ‘자유방임’이라는 이름하에 방관하는 것은 물론,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 등을 도입하며 이를 되레 장려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기업과 국가의 만행으로 인해‘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에 비해 2차 노동시장°에 종사할 확률이 높으며, 여성 노동자의 근로 요건은 상대적으로 더욱 열악하다.*
이처럼 사회 내 분명한 성차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공정성’을 강조하며 개인의 실패는 오직 개인의 탓임을 역설하는 신자유주의는 틀렸다. 따라서 이 구조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여성 개인의 사회적 성취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사회 내 모든 여성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는 결국 신자유주의적 기준에 여성을 맞추고,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문제는 침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상상하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는 무엇일까? 그곳은 나의 실패가 나라는 개인의 탓만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 너머에 있다. 서로의 차이가 경쟁의 이유가 아닌, 공존의 이유가 되는 곳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나의 성별, 나이, 장애, 성적 지향, 종교… 그 외의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사회 속 실패의 요인이 되지 않는 세계를 꿈꾸며,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한다.
* 아이들(I-DLE), LION, 2019.
* 박혜영(2018), 앞의 글, 583-584.
* 이숙진(2002), <여성, 그 빈곤과 차별의 격화>, 《시민과세계》, 2, 322.
° 가부장제에선 남성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으로 상정되어, 남성에게만 가장으로서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필요한 ‘가족임금’을 차별적으로 지급하였다.
* 명숙(2012),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우파 바람에 맞서다. : 가부장제와 자본제의 위계질서를 넘으려는 기획, 사회주의 페미니즘>, 《뉴 래디컬 리뷰》, 52, 295.
° 학자 피어스(D. Pearce)가 제시한 개념으로, 여성의 빈곤 문제는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사회 보장 체계에서의 불평등한 지위,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 등 다양한 여성 차별적인 사회구조들과 연동되어 있음을 쟁점화하였다(“빈곤의 여성화”, 《위키피디아》).
* 이숙진(2002), 위의 글, 321.
° 2차 노동시장(secondary labor market)은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직업들이 저임금, 단기적 고용관계, 열악한 근로조건 등으로 특정 지어지는 추상적 노동시장을 의미한다.
* 이태, 안준홍(2023), <한국의 분절된 노동시장과 노동이동 분석>, 《노동경제논집》, 46(4), 46.
* 엄혜진(2025),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분열적 결속: 페미니즘의 신자유주의 비판 쟁점들과 함의>, 《한국여성학》, 41(1), 44.
케이팝에서의 나의 ‘사랑’이 신자유주의를 키우는 자양분이 되고, 그것이 내가 반대하는 여성혐오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어렵다.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케이팝과 페미니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 팬은 그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혹은 그 사실이 틀렸다며, 케이팝과 페미니즘이 공존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밖에서 아이돌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내어, 자신의 사랑을 지속가능한 사랑으로 만들고자 하는 페미니스트 팬 역시 여럿 존재한다.
그러나 케이팝 아이돌을 사랑하는 것 자체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우리가 아이돌을 소비하는 모든 행위는 거대 자본에게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할 근거를 제공한다. 랜덤 포토카드가 들어간 앨범, 버블을 비롯한 소통 앱, 아이돌의 24시간을 보여주는 자체 콘텐츠 등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만들어 낸 상품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돌과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구매하도록 촉진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라는 케이팝 신화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현재의 구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 모두가 화면으로 직접 접하고 체감할 수 있는 케이팝의 성공 신화는, 다른 어떤 산업들보다도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강력히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케이팝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키워나간다.
이때 극단화된 구조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곳부터 갉아먹는다. 구조 속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우리의 소비가 만들어내는 구조의 피해자는 가려져 있다. 가부장제와 결합해 작용하는 신자유주의의 피해는 화면 속 화려한 아이돌에게 즉각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시민에게 먼저 향한다. 더 열심히 개인의 능력을 길러야 하고, 더 치열히 경쟁해야 하며, 더 많은 부분을 돈이 되는 상품으로 바꿔야 하는 부담은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그리고 남성보다 더 힘들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며, 더 많은 부분을 평가절하당하는 여성에게 그 부담은 더욱 무겁다.
따라서 케이팝이 여자 눈치를 보는 산업이어도, 수많은 여돌이 여성들의 주체성을 강조해도, 케이팝과 페미니즘은 같이 갈 수 없다. 케이팝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분리되거나,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하의 불평등에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상 그럴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에, 케이팝과 페미니즘은 영원히 불협화음을 내며 살아가야 한다. 결국 케이팝과 페미니즘의 공존은 페미니스트 팬의 바람일 뿐,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그 관계는 끝없이 긴장과 충돌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 팬은 나와 나의 사랑이 단순히 돈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나의 사랑이 또 다른 고통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세계를 꿈꾼다. 그저 나와 우리 모두의 사랑이 오롯이 그 자체로 충분한 세계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돌 역시 내가 바라는 세계에서 그 자체로 충분하길 바란다. 우리 모두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 아이유(IU), 돌림노래 (Feat. DEAN), 2021.
케이팝을 좋아하는 일은 곧 내 안의 모순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임을, 때론 나의 가치관을 스스로 배반해야 하는 일임을, 그럼에도 이런 분투를 넘어서게 하는 응원과 사랑의 마음이 존재하고 이것들이 삶의 어떤 동력이 되기도 하는 일임을 깨달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 한겨레 기사 中
나는 어쩌면 남들이 말하는 가짜 페미니스트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나는 케이팝의 모순을 직시하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남돌의 팬이며, 케이팝과 페미니즘이 모순을 빚어낼 수밖에 없다고 쓰는 내내 케이팝 아이돌의 노래와 함께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보고, 내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지적한다면… 억울하긴 하겠지만 반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페미니스트’와 ‘팬’이라는 두 정체성의 충돌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케이팝을 좋아해 왔고, 여전히 케이팝을 좋아하며, 아마 앞으로도 케이팝의 팬일 것 같다. 지금처럼 열렬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미 케이팝이 얼마나 유해한 산업인지 충분히 안다.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상품화에 동조하고 있음을, 여성의 대상화를 이끌어냄을, 나의 터전을 내 손으로 망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유해함을 묵과할 수 없다는 점이 나의 모순을 촉발한다. 이미 그 모순에 대해 몇 쪽이나 할애했으니, 케이팝을 좋아해 본 적 없는 독자이더라도 나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팬들이 얼마나 고민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내가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것을 보고, ‘그냥 케이팝을 그만 좋아하면 안 되나요?’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케이팝을 그만 좋아하고 싶다. ‘탈케하고 싶다’는 말은 이제 나의 말버릇 수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케이팝의 문제점에 대해 적어 내릴 때마다 내가 케이팝과 아이돌로 인해 하루를 버텼던 날들이, 내일이 오는 게 조금은 덜 두려웠던 새벽이, 앞으로 더 잘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여전히 나를 이루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내 삶에서 케이팝을 도려낸다고 해서 내가 살아갈 수 없는 건 아니겠지만, 분명한 건 내 삶이 지금만큼 재미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 팬으로서 고통스럽게 덕질을 이어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케이팝은 나의 동력이며, 힘이고, 배터리다. 아마 나와 비슷한 많은 여성들에게도, ‘나에게 케이팝이란 __이다’라는 문장에 넣을 만한 단어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없으면 아쉬운 밑반찬 정도이고, 누군가에겐 없으면 안 되는 삶이자 생명수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활력, 화합, 도파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까지…° 각자의 삶에서 케이팝은 이미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무엇이 쉽게 대체할 수 없도록 말이다.
이 산업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혐오와 차별을 안고 가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케이팝은 분명 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해야 할까?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는 이미 그 대안과, 대안을 이끌어낼 동력이 케이팝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번 파트에선 나의 사랑을 지속 가능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힘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랑이 지배하는 케이팝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나누어보고자 한다.
* 방탄소년단(BTS), Pied Piper, 2018.
* 한겨레(2025), “돈 주고 살게요…최애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2025.04.28.
° 솔직한 응답을 나눠준 친구들아 고마워!
내일을 살게 해주고 싶은 가수들 고마워 평생 노래해줘.°
너무도 괴로운 오늘로부터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란 건 무엇일까. 더욱 놀라운 건, 이 곡을 듣고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이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로 묶어 부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노래에 감동과 위로를 느낀다. 각자의 삶 속에 쌓인 각기 다른 고충을 함께 쏟아내며 하나의 감정을 공유한다. 그렇게 이어져 있음을 느끼며 서로 다른 우리가 공명한다. 이것이 아마 ‘음악’의 힘일 것이다.
케이팝에는 이처럼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실천적인 힘이 있다. 그리고 그건 앞서 말한 감동과 위로 같은 종류가 아닐 때도 많다. 누군가를 길바닥에 앉아서 몇 시간씩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힘.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나 쪄 죽을 것 같은 더위를 견디게 하는 힘. 티켓팅에 실패해도 주저앉지 않고 양도 표를 찾아볼 수 있는 힘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이런 힘은 앞서 말한 사람을 살게 하는 감정들과는 거리가 멀고, 분노와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더 가까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 감정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강한 사랑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 사랑이 보통 사랑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물론 이 힘은 앞서 이야기했듯, 여성 팬이 빠순이에 대한 여성혐오적 관행과 차별적 인식을 온몸으로 견뎠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 팬이 이러한 힘을 갖게 된 것이 과연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우리는 그 힘으로 불의에 저항할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겨울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나가던 여성 팬들이, 자신의 아이돌을 향해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고 말하던 때를 기억한다. 아무리 춥고 지쳐도 여성 팬은 계속해서 집회의 자리를 지켰다. ‘공방 대기보단 덜 힘드네’와 같은 자조적인 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투쟁했다. 끈질긴 사랑의 마음으로 얻어낸 힘과 함께.
이쯤 되니 여성 팬의 사랑을 마치 마법처럼 표현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든다. 모든 혐오와 불의에 저항할 수 있고, 어떠한 일에도 꺾이지 않는 순수하고 고귀한 마법 말이다. 여성 팬은 어떤 마법의 힘으로 집회에 나갔던 것이 아니다. 혹은 어떤 마법에 걸려서 그런 것도 아니다. 여성 팬의 사랑은 지저분하고 흙 묻은 상처투성이에 가깝다. 때때로 쉽게 변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아주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순애’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사랑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작은 것처럼 보이던 응원봉 불빛이 광장을 뒤덮고, 결국 세상을 뒤엎었던 것처럼 말이다. 케이팝은 주저앉아 있기보단 일어서기를, 멈춰있기보단 한 발 나아가기를 알려준 세계다. ‘더 높이 가줄게*’라던 가사처럼, 우리는 케이팝을 통해 우리가 바라던 세계로 향할 힘을 얻고, 그 세계를 향해 걸어 나간다. 빠르진 않더라도, 지치지 않는 끈질김으로 한 걸음씩.
* 르세라핌(LE SSERAFIM), ANTIFRAGILE, 2022.
° 데이식스(DAY6)의 <Maybe Tomorrow> 뮤직비디오의 댓글 중 하나를 인용하였다.
* 농촌여성신문(2025), “문화정치 상징된 2030 여성들의 ‘응원봉’”, 2025.01.23.
* 르세라핌(LE SSERAFIM), 위의 곡, 2022.
어디서부터 케이팝을 뜯어고쳐야 하는지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너무 많은 부분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케이팝 산업의 아주 많은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케이팝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며 소비되는 모든 과정을 고쳐야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 신자유주의적 뿌리가 깊게 박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케이팝에 대한 대안이 이미 이 안에 존재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대안은 분명 이 안에 있다. 내가 믿는 것은 거대 자본을 가진 기획사도, 시장을 지배하는 국가도 아니다.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괴물 같은 케이팝 속, 한 명 한 명의 사람을 믿는다. 이 안에는 분명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조에 저항하는 사람들, 자신의 정체성을 괴롭히는 모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 서로를 분열시키는 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다. 케이팝은 그 모든 사람들의 교집합으로서, 서로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응원해 주고, 나이도 사는 곳도 국적도 다른 수만 명이 하나 되어 한목소리로 응원법을 외쳤던 경험들을 한 겹 한 겹 쌓아 만든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다. 같은 대상을 행복의 원인으로 보고 그것에 몰두함으로써 타인과 하나가 되는 정동(affect) 공동체로서의 팬덤은, 각기 분리되어 있던 개인을 하나의 공동체로 뭉치게 만들어 준다.[42] 이처럼 평생 마주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과 살 붙이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케이팝은, 우리의 지독히 사적인 사랑이 어떻게 거대한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쌓아 올린 그 연대의 감각은 거대한 산업과 소비 논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존중하며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케이팝의 모순을 직시하면서도, 그 모순을 넘어설 힘을 품을 수 있다. 경쟁이 아닌 연대일 때, 혼자가 아닌 함께일 때, ‘내’가 아닌 ‘우리’일 때, 페미니스트 팬이 꿈꾸는 “다시 만난 세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케이팝을 둘러싼 구조를 온전히 바꿔낼 수 있을지, 그 이후의 세계가 과연 우리가 바라는 세계의 모습과 같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응원과 연대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고립과 경쟁을 뚫을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사실만을 확신하며 나아간다. 나는 당신도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믿어주길, 흙 묻은 상처투성이 같은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케이팝 속에서 느꼈던 고통과 고뇌가 당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다. 지금 이곳에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그리고 그 고민들이 모여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알려주고자 이 글을 썼다. 케이팝을 ‘떠날 수 없는 것’도 맞지만, 케이팝을 떠나는 것으로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건 반쪽짜리 해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러니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곳을 바꾸어 낼 것이다. 앞으로도 이 케이팝 산업을 바꾸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할 많은 페미니스트 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인용하며 마친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고, 악의가 가득한 추악한 세상에서, 찬란한 사람들에게 매혹된 이들의 망설임에 깃든 찬란함을 보고 싶었다. 그 찬란함을 지우지 않는 일, 그것을 어떻게든 함께 끌어안고 논쟁을 이어 나가는 일이 산업의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 안희제, 『망설이는 사랑』 中
* 소녀시대(Girl’s Generation),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2007.
* 안희제(2023), 『망설이는 사랑』, 파주: 오월의봄, 43.
°『계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통권 122호』 중 이희주 작가의 <12월 3일 이후 퐁퐁짱이 겪은 이상한 사건의 전말> 속 문장을 인용했다(문학동네편집부(2025), 『계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통권 122호』, 파주: 문학동네, 83).
* 안희제(2023), 위의 책,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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