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
*로 인용 각주를, °로 내용 각주를 표기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모여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일종의 전통이다. 다 같이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아주 까다로운 기준으로 영화를 고른다. 장르는 딱히 상관없고, 너무 슬픈 이야기만 아니면 된다. 주로 보는 것은 일본, 미국, 영국의 매체지만 국가는 상관없다. 대신 한 번에 꽂혀야 한다! 그런데 가끔 보다 보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서도– 엄마아빠와 같이 보기엔 영 민망한 장면들도 나온다. 예를 들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딜도 장면처럼…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유롭고 직설적인 성적 표현에 부럽기도 하다. 섹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관여하고, 주도하는 여성들은 우리나라 매체에서는 특히 찾아보기 힘들어 그렇다. 그렇지만 진짜 이걸로 괜찮은 걸까. 매체 속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처음 이야기가 쓰일 때, 촬영될 때, 그리고 대중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세 번 정도 재해석된다. 그 과정에서 과연 여성의 ‘주체성’이 온전히 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곧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진다. ‘에로’ 영화와 포르노그래피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여성의 벗은 몸과 섹스를 영상으로 담는다. 지금까지 많은 문제점은 남성의 ‘꼴림’에만 중점을 두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일 뿐이고, 여성이 만족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페미니즘 영화 이론가인 로리 멀비는 영화 매체에 인간의 ‘관음증’적인 욕망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멀비는 관객이 스크린 속 유사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스크린 속 대상을 에로틱한 대상으로 이용한다고 설명한다. 즉, 남성이 ‘시선의 주체’가 되고 여성이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고정된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영화가 나오는 것이 태생적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여성은 항상 피해자가 되므로 포르노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는 위험하다. 이 논의 속에서 여성은 주체성을 박탈당한다.* 희생자로 한정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긍정되기 어렵다. 오히려 ‘드러내면 위험한 것’이 되어 자기 통제와 조심스러움이 장려되고, 성적 쾌락을 즐기길 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쾌락과 연계지어 즐길 자유가 있다. ‘야한’ 매체를 소비하는 여성들은 늘 존재한다. 여성의 욕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또다시 여성을 억압하는 규제가 된다.
정리하자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주체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인 구조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포르노그래피와 영화, 영상물이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 섹스를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지, 영화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남성적 시선’이 어떻게 여성들을 착취하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보다 여성 감독, 작가, 제작진이 늘어나면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했으나, 반복되는 영화계 사건들을 보면 50년 동안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아직까지 구조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 쇼히니 초두리(2012), 『페미니즘 영화이론』, 노지승(역), 서울: 앨피, 68.
* 주유신(2017), 『시네페미니즘』, 부산: 호밀밭, 469.
* 주유신(2017), 위의 책, 469.
구조를 바꾸는 첫걸음은 지금 우리를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앞에서 내가 ‘부럽다’라고 표현한 할리우드는 2022년 기준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익의 46.3%를 차지할 만큼 큰 시장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도 성 착취는 존재했다. 다큐멘터리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배우와 제작진들이 직접 이를 폭로한다. 클로이 모레츠는 16살 무렵 자신의 트레일러에 갔더니 브래지어와 함께 ‘치킨커틀릿’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치킨커틀릿은 브래지어 안에 넣는 패드를 말한다. 제작사 측에서 클로이에게 브래지어 안에 이를 착용할 것을 지시했다. 오디션에 참여한 16살 아이를 보며 ‘가슴 뽕을 넣어야 할 것 같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실제로 요구한 것이다. 같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나탈리 포트만은 영화 <레옹>을 찍으며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 그는 다큐멘터리에서 “세상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내 몸을 더 중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상상해 보라.”라고 말하며 어릴 때부터 객체가 된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영화를 만들 때는 작가, 감독, 제작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한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는 영화에 개입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각조각 잘린 채 대상화된다. 연출상 필요하지 않은데도 카메라가 갑자기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에 집중하는 식이다. 클로이 모레츠가 증언했듯 할리우드는 어린 여성들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전세계 영화 시장에서 절반씩이나 차지하는 이 거대한 산업이 이렇게 굴러가면, 다른 나라의 영화 시장도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보는 여자아이들이 객체화 된 여성의 모습을 학습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여성의 ‘가치’가 아름다움, 성적인 매력, 타자로서의 여성으로 고정되며, 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곧 ‘자연적’인 여성의 특징이라고 믿게 된다. 그렇게 내재화된 시선은 자신의 몸 또한 그 환상에 끼워맞춰야 할 것처럼 느끼게 한다.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몸을 그대로 수용하는 대신, 고쳐야 할 점을 찾으며 자기 자신의 몸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성이 객체화되는 장면에서 배우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아직도, 여배우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강압적으로 촬영하는 노출 장면들이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불량공주 모모코> 등의 감독인 나카시마 테츠야는 <갈증>(2014) 촬영 시, 여배우에게 사전 고지를 하지 않고 강간 장면을 찍을 것을 강요했다. 피해자는 미투운동이 대중화된 2022년이 되어서야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 한국 영화계 거장이라는 김기덕 감독°은 촬영 중 베드신을 거부한 여배우의 뺨을 때리고, 폭언을 했다.* 최근 드라마인 <원경>에서는 배우가 노출 수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역 배우의 나체와 배우의 얼굴을 CG로 합성하여 베드신을 연출했다. 실제 범죄에 악용되고 있는 딥페이크와 흡사한 방식이었다. 여성의 몸은 그 당사자와 제대로 된 합의나 이야기도 없이 먼저 ‘작품’을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그러나 ‘작품’이 배우에 대한 폭력성으로 얼룩진다면, 그건 더 이상 작품이 아닌 ‘범죄’다.
* 한국저작권위원회 심의산업통계팀(2024), “주요국의 자국 영화 점유율 현황”, 2024.07.24., 한국저작권위원회 보고서.
* 톱스타뉴스(2022), “'갈증' 日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미투 폭로…피해자 "성폭력의 비참함"”, 2022.05.22.
° 세계 3대 영화제 본상을 모두 수상한 국내 유일한 감독이다.
* 경향신문(2017), “‘배우 뺨 때리고 폭언·베드신 강요’ 혐의 김기덕 감독 검찰 조사”, 2017.11.30.
‘메일 게이즈male gaze’, 혹은 ‘남성적 시선’은 로라 멀비가 영화에 내재된 가부장적 무의식을 꼬집으며 도입한 개념이다. 멀비에 따르면, 남성 관객은 관음증적 욕망으로 스크린 속 여성을 ‘응시하는 것’을 넘어 스크린 속 남성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시선의 주체이자 영화 속 ‘주체’가 된다. 동시에, 정신분석학적으로 남성은 페니스가 없는 여성에게 거세 공포를 느낀다. 따라서 여성의 몸에 극단적인 미적 완벽함을 부여하여 안심해도 되는 존재로 만든다.* 여성의 몸에 페티시를 부여함으로써 여성에게서 느끼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때 영화는 이러한 시선으로 촬영한 영상을 이어 붙이면서 남성 관객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이 ‘남성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후 여성 관객이 항상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향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수용자들에 의해 각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견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메일 게이즈는 여성을 페티시화하고, 객체화한다는 의미로서 현재까지 영화 분석의 틀로 활용되고 있다. 아직 카메라를 잡는 사람 많은 수가 남성인 상황에서, 그리고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메일 게이즈의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긴 어렵다.
202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고, 202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5관왕을 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화가 있다.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이다. 성노동자인 ‘아노라’의 꿈과 현실과 고단함을 잘 담아낸 영화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감독의 메일 게이즈에 대한 비판도 함께 존재했다. 아노라는 성노동자다. 따라서 섹스 장면이 자주 나올 수밖에 없다. <아노라>는 총 2시간 19분의 상영시간 중 초반 40여 분을 대부분 섹스 장면에 할애한다. 여기서 ‘…이렇게까지?’라는 의문점이 든다. 감독 션 베이커는 “성노동자의 노동이 잘못된 것처럼 그 노동의 과정을 지우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동시에 “내가 만드는 모든 영화에서 내가 잘못된 방식으로 주제를 다룰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며 표현이 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며 비판에 수용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좋다. 좋은데, 알면 고치라는 말을 참을 수가 없다. 이미 충분히 남성적 시각에서 소비되고 있는 성노동자의 삶을 그렇게 비추는 것이 필수적이었는지 되묻고 싶다. 영화 속에서 성노동자가 일하는 모습, 아노라의 모든 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성노동자를 다룰 때 자극적인 섹스 장면을 반복적으로, 그것도 배우의 신체 부위가 강조되는 연출과 구도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인가? 또다시 여성의 몸이 객체화되는 영상물을 재생산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노라>의 문제는 사실 따로 있다. 감독과 주연인 마이키 매디슨은 촬영 현장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를 거부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베드신이나 수위 높은 노출이 있는 장면에 개입하여 혹시 모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는 촬영 장면의 규모를 최대한 소규모로, 친밀하게 유지해야 진정성이 도드라질 것 같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역할은 주연 배우만 살피는 것이 아닌, 그 장면 촬영에 연루된 엑스트라와 제작진들도 살피는 것이다. 주연 배우가 실제로 괜찮았더라도, 감독이 괜찮다고 판단했더라도, 그 자리에서 불편했던 사람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이것이 메일 게이즈의 한계다. 남성 감독이 이에 대해 자각하고, 굳이 숨기지 않음으로써 메일 게이즈를 폭로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아노라>는 그런 영화다. 그렇지만 감독이 자신이 연출하는 모든 장면의 남성적 시각을 일일이 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여성 감독마저도 내재화된 메일 게이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미 관습이 된 촬영장의 ‘룰’을 깨트리기도 어렵고, 남성적 시각을 숨 쉬듯 접해왔기 때문에 익숙함에 이를 놓치기도 쉽다. 메일 게이즈의 흔적은 그대로 영화에 남고,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에도 여성은 묘한 불편함을 안은 채 영화를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내재하고 있는 불평등을 짚어낸다.
* 쇼히니 초두리(2012), 앞의 책, 71.
° 물론, 지금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른 해석이다. 이에 따라 로라 멀비의 ‘메일 게이즈’는 주체성을 지닌 남성과 대상화되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임수연(2024), “숀 베이커식의 정치성, 숀 베이커 감독론- 그가 차별화되는 첨예한 계급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 2024.11.07., 씨네21, 1480호, 칼럼.
* Variety(2024), “Mikey Madison Declined an Intimacy Coordinator on ‘Anora,’ but Professionals Say There Should Always Be One: Actors and Directors ‘Can’t Speak for How Every Extra Felt’”, 2024.12.19.
° 여성 감독인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 또한 메일 게이즈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 공개된 드라마 <애마>는 80년대 에로 영화인 <애마부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상하여 다시 썼다. 실제 <애마부인>은 착취의 현장이었다. 애마부인 역이었던 안소영 배우는 ‘시나리오상에는 없었는데, 막상 촬영장을 가면 벗으라 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애마부인>은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또한, 80년대 에로 영화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우후죽순 여성의 노출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애마>는 이를 다시 생각해 보자며 ‘애마’를 맡은 주애와, ‘에리카’를 맡은 희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계속해서 여배우를 벗기려는 제작자, 그리고 노출 및 성관계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검열하려는 국가의 이중적인 억압 속에서, 두 배우는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희란이 메일 게이즈 범벅이던 시나리오를 감독과 함께 갈아엎는 장면이었다. 이미 베테랑 배우였던 희란은 직접 여성의 욕망에 대해 말하며 여성 착취의 영상물을 여성 연대의 영화로 탈바꿈한다. 비록 이 버전의 영화는 제작자의 방해로 막히지만, 여성 배우의 개입으로 작중 감독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여성의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주체성, 특히 성적 주체성을 온전히 표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애마>에서도 드러났듯이, 여성의 목소리가 없다면 메일 게이즈를 탈피하기 어렵다.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는 여성 제작자와 감독의 절대적 숫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문제의 원인으로 꼬집는다. 2023년 공개된 미국감독조합(Directors Guild of America, DGA)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여성 감독은 장편 영화를 연출한 DGA 감독 중 16%에 불과했다.* 그나마 더 최근에 보고된 2024년 텔레비전 에피소드 감독 자료를 보면, 2023-2024년 동안 제작된 1,430개의 텔레비전 에피소드에서, 여성이 감독한 비율은 37%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아직 턱없이 적다. 대부분이 남성인 산업에서 여성이 그 틀을 깨기란 쉽지 않다. 더 적극적으로 여성을 고용해야만 한다. 미국의 제작사 중 하나인 FX는 남성 감독이 89%를 차지한다는 보고를 받고, 공격적으로 여성과 다양한 배경을 지닌 감독들을 고용했다. 5년 뒤인 2020년에는 이 제작사의 작품 중 63%를 여성 감독이 연출하게 되었다.* ‘아메리카 호러 스토리’, ‘더 베어’ 등 유명한 드라마 시리즈를 내놓으며 이러한 다양성이 실제로 좋은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이 제대로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 도전할 양분을 만들려면, 그만큼 충분한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상 속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 이미 여성 감독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핫 걸 원티드: 턴 온>에서는 여성들의 페티시를 제보 받아 포르노 영화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감독이 소개됐다. 에리카 러스트는 여성을 위한 포르노그래피를 찍는다. 미학에 집중한, 또 배우들의 편안함에 집중한 영상은 착취적이지 않으면서도 섹슈얼리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에리카는 성적 판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가 그런 장면을 촬영한다면 여성들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며 원할 때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어요.”* 그는 ‘지배’당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이 안전한 상황에서 충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쾌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여성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섹스가 ‘더러운 것’, 혹은 ‘죄’가 아님을 보여주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고 있다. 섹스 자체에 내재하는 가부장적 위계를 뒤집고, 여성의 성적 쾌락을 존중하는 것. 이러한 시도로부터 다른 대안적 포르노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상이 찍힐 당시의 상황 또한 중요하다. 그 누구도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지 않은 채 섹스장면을 찍는 것은 아주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에리카 러스트의 현장 대부분의 제작진은 여성이다. 감독은 배우가 불편해하는 것 같으면 바로 촬영을 멈추고, 계속해서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역할을 할 사람을 고용한다. 앞에서도 소개되었던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이다.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양성하면서,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도 배포한다.* 가이드라인에서는 수위 높은 노출이나 섹스 장면이 있는 영화는 제작 전 단계부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고용해서 배우·연출자·제작자 간 사전 협의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이 협의를 통해 배우가 어느 정도 노출할지, 카메라가 어떻게, 어느 방향에서 배우의 신체를 찍을지 계약서에 명시해야 한다. 또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촬영 현장에서도 배우가 제대로 보호 의상을 착용했는지, 협의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혹시 다른 스태프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더불어 관객들이 이 장면을 어떻게 느낄지도 고려하며, 이 모든 과정에서 코디네이터가 개인적인 편견과 의견을 표출하면 안 된다는 방침도 있다. 정말 당연한 과정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산업 환경을 보면 잘 이루어지기 힘든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계는 그동안 꾸준히 바뀌었다. 그 과정에는 계속해서 영화의 구조와 산업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그 안에 내재한 폭력성을 폭로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다양한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고,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을 해석하면서도 여성을 영상에 담고 재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왔다. 여성 감독이 상을 받고, 여성 배우의 연기가 주목받고,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더 안전한 공간에서 촬영하고, 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 남성적 시선에 갇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남성이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던 여성들이 이제 자신을 돌아본다.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기본적인 틀이 잡혀가는 느낌이 든다. 현장에서, 제작 과정에서, 그리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주체적으로 남을 수 있는 틀. 아직 전체적인 구조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할지 몰라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남성의 눈을 한 카메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남성이 잡은 카메라를 빼앗기 위해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뉴스1(2025), “안소영 "'애마부인' 감독, 시도 때도 없이 벗으라고…촬영장서 막 싸웠다"”, 2025.09.15.
* Directors Guild of America(2023), “DGA Publishes Feature Film Inclusion Report: 2018–2022 Analysis Reveals Little Change in Employer Hiring Across Feature Film Landscape”, 2023.12.21., DGA 보도자료.
* Directors Guild of America(2024), “DGA Publishes Inclusion Hiring Data in Episodic Television Over the 2023-2024 Season”, 2024.10.25., DGA 보도자료.
* Deadline(2020), “FX To Have A Majority Of Diverse & Female Directors In 2021 As John Landgraf Lays Out Latest Diversity Data”, 2020.08.27.
* ELLE(2018), “포르노 프리덤”, 2018.03.08.
* 씨네21(2025), “배우부터 스태프, 관객 모두에게 필요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2025.05.29.
참고문헌
<단행본>
쇼히니 초두리(2012). 『페미니즘 영화이론』. 노지승(역). 서울: 앨피.
주유신(2017). 『시네페미니즘』. 부산: 호밀밭.
<기사>
경향신문(2017). “‘배우 뺨 때리고 폭언·베드신 강요’ 혐의 김기덕 감독 검찰 조사”. 2017.11.30.
뉴스1(2025). “안소영 "'애마부인' 감독, 시도 때도 없이 벗으라고…촬영장서 막 싸웠다"”. 2025.09.15.
씨네21(2025). “배우부터 스태프, 관객 모두에게 필요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2025.05.29.
톱스타뉴스(2022). “'갈증' 日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미투 폭로…피해자 "성폭력의 비참함"”. 2022.05.22.
ELLE(2018). “포르노 프리덤”. 2018.03.08.
Deadline(2020). “FX To Have A Majority Of Diverse & Female Directors In 2021 As John Landgraf Lays Out Latest Diversity Data”. 2020.08.27.
Variety(2024). “Mikey Madison Declined an Intimacy Coordinator on ‘Anora,’ but Professionals Say There Should Always Be One: Actors and Directors ‘Can’t Speak for How Every Extra Felt’”. 2024.12.19.
<기타>
임수연(2024). “숀 베이커식의 정치성, 숀 베이커 감독론- 그가 차별화되는 첨예한 계급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 2024.11.07. 씨네21, 1480호. 칼럼.
한국저작권위원회 심의산업통계팀(2024). “주요국의 자국 영화 점유율 현황”. 2024.07.24. 한국저작권위원회 보고서.
Directors Guild of America(2023). “DGA Publishes Feature Film Inclusion Report: 2018–2022 Analysis Reveals Little Change in Employer Hiring Across Feature Film Landscape”. 2023.12.21. DGA 보도자료.
Directors Guild of America(2024). “DGA Publishes Inclusion Hiring Data in Episodic Television Over the 2023-2024 Season”. 2024.10.25. DGA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