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솔지

by 석순

처음 여는 글을 맡기로 했을 때, 저에게 떠오르는 질문은 딱 하나였습니다.


내 삶에 페미니즘이 있어서 좋았던, 다행이었던, 고마웠던 때가 있나요?


저는 이 질문을 올해 6월, 동아리에서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던 날 처음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어떤 답을 말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신 그날 세미나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 그 질문을 곱씹다가 지하철에서 펑펑 울었던 것만 기억납니다. ‘앞으로의 삶에서 페미니즘이 있기에 좋았던 순간들이 더 많기를 바란다’던 말을 떠올리다가, 에어팟을 낀 옆자리 분이 돌아볼 정도로 울었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저는 처음으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게만 느껴지던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남들이 웃고 넘기는 농담에 웃지 못할 때. 나의 페미니즘이 결국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만 같을 때. 내가 옳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마치 내가 틀린 것처럼 느껴지는 사회를 살아갈 때. 조금 부끄럽지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저의 삶에도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좋았던, 다행이었던, 고마웠던 순간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나의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수 있었고, 누군가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며,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미움받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고, 아직도 두려운 저에게 페미니즘은 ‘용기’가 되어주었습니다.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지금의 저는 끝까지 걸어가기엔 아직 너무 약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걸어가는 것에 도전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믿을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을 구석은 매번 달라졌습니다.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앞서 투쟁해왔던 사람들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우연히 만난 책 한 구절이기도 했습니다. 후회하고 두려울 때는 매번 이 길을 혼자 걸어온 것만 같았지만, 결국 돌아보면 저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무서워하면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곁에 손을 내밀어주고 잡아주던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이 없었다면 나아갈 용기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석순 65집도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의 백래시를 고민하는 사람.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영화와 케이팝 산업에서의 여성혐오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여성 의제와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석순은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는 동지로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을 잡아줄 사람을 기다리는 걸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든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싶어 글을 쓰는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페미니즘이 있어서 좋았던, 다행이었던, 고마웠던 때가 있나요?

아직 없다면 꼭 그 순간을 마주하는 때가 찾아오길 바라고,

만약 있다면 앞으로의 삶에서 그런 순간들이 더욱 많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많은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는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함께 손을 잡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여성주의 교지 석순입니다.



° 안미옥 작가의 시집 『온』 중 <생일 편지>라는 시에서 인용하였다(안미옥(1992), 『온』, 파주: 창비,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