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넘치는데 추억은 남지 않는다

베이비부머 필살기 (15) - 디지털 앨범 속에 갇힌 기억들

by 늘푸른 노병


내 어린 시절 사진은 서너 장이 전부다.


빛바랜 돌사진 한 장, 세발자전거를 사주셨던 날 찍은 사진 한 장.


그마저도 부모님이 추억이라 생각하셨는지 고맙게도 몇 장 남겨주셨다.


그리고 국민학교 졸업사진. 그것이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거의 전부다.


세발자전거 사준날 기념사진


어쩌다 그 사진들을 다시 보게 되면 아련한 기억들이 따라온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리기도 한다.


귀한 사진들은 내가 정신없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이 모두 챙겨 두었다.


그래서 정작 나는 한 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가끔 남매 톡방에 그 사진들이 한 장씩 올라온다.


그러면 웃음꽃이 먼저 피어난다. 누렇게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우리 남매들의 마음을 다시 묶어주고

한 바탕 웃음짖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사진 한 장 찍는 것이 큰일이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카메라를 꺼내고, 필름 한 통을 사서 정성스레 끼웠다.


현상소에서 사진을 찾아오기까지 며칠을 꼬박 설레며 기다렸고, 인화된 사진을 앨범에 끼워 넣으며 그날의 웃음소리를 다시금 되새겼다.


우리에게 사진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였고, 닳지 않는 추억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 안의 기계 속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넘쳐난다. 손가락만 갖다 대면 수십 장이 순식간에 찍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지워진다.


밥상 위의 음식부터 지나가는 풍경까지 닥치는 대로 찍어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다.


사진은 넘쳐나는데, 그 속에 머물러야 할 추억은 갈 곳을 잃고 디지털 앨범 속에 갇혀버렸다.


가장 서글픈 것은 사진을 찍느라 정작 그 순간을 눈에 담지 못한다는 점이다.


눈앞의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하기보다 화면 속 사각형 틀 안에 맞추느라 급급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기보다 렌즈 너머의 모습을 기록하는 데 열중한다. 기록은 정교해졌으나 기억은 얕아졌다.


나중에 보겠다고 저장해 둔 수만 개의 데이터는 결국 휴대전화의 용량만 차지할 뿐, 내 가슴속 깊은 곳까지 닿지 못한다.


우리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숨을 참았던 세대다. 셔터를 누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온 마음을 담았다.


인화지 위로 서서히 떠오르던 그 흐릿한 형체들처럼, 추억이란 모름지기 기다림과 정성이 섞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다.


지금의 디지털 사진들은 너무나 빠르고 선명해서, 오히려 그 속에 담긴 감정의 무늬들을 지워버리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켠다. 다만 이제는 무분별하게 셔터를 누르지 않으려 한다.


한 장을 찍더라도 그 순간의 바람 소리와 냄새를 함께 기억하려 애쓴다.


디지털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빌리되, 내 마음만큼은 예전의 필름 카메라처럼 신중하고 싶다.


화면 속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보다, 내 머릿속 앨범에 선명한 그림 하나를 더 남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 뿐이다.


세상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추억이 익어가는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넘쳐나는 디지털 파편들 사이에서,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단단한 기억 한 조각을 건져 올린다.




[이어지는 연재 안내]

베이비부머 필살기(16)

- 대면이 사라질 때 인간도 사라진다.




#디지털세상 #베이비부머 필살기 #추억의 사진

이전 14화전화가 아닌 메시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