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세상에서 느림의 가치

베이비부머 필살기 (19) - 속도에 밀려 잊힌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by 늘푸른 노병


세상은 빨라졌는데,
사람은 더 조급해졌다.


몇 번의 터치만으로 물건이 집 앞까지 배달되고, 눈 깜빡할 사이에 소식이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 속도에 발을 맞추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름 치열하게 인생 한구비 건너온 나는 안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정작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들은 모두 '느림'의 미학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밥을 안치고 김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정성껏 쓴 편지가 상대에게 닿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세대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었다.


밥이 익어가는 냄새 속에 가족의 사랑이 영글었고, 편지를 기다리는 설렘 속에 상대에 대한 깊은 사유(思惟)가 깃들었다.


효율이라는 칼날로 그 '기다림의 과정'을 싹둑 잘라내 버린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편리함이라는 이름의 메마른 결과물뿐이다.


빠른 세상은 우리에게 '성취'를 주었지만, 대신 '여운'을 앗아갔다.


풍경을 즐길 틈도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기차처럼, 우리는 결과에만 매몰되어 그 과정 속에 피어있던 수많은 의미들을 짓밟고 지나간다.


디지털이 주는 속도에 취해 앞만 보고 달리는 이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여유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보인다.


속도에 밀려 길가에 버려진 소중한 인연들, 무심코 지나친 계절의 변화, 그리고 내 영혼이 내뱉는 고요한 탄식을. 나는 이 빠른 세상 속에서 기꺼이 느린 삶을 택하겠다.


기계가 1초 만에 답을 내놓을 때, 나는 1분을 고민하며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


남들이 빛의 속도로 정보를 소비할 때, 나는 돋보기를 들고 문장 하나에 담긴 무게를 음미하겠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진실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데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자연의 섭리를 믿을 뿐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을 끝까지 움켜쥐는 것.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자세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가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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