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통장이 사라지던 날

베이비부머 필살기 (3) - 손끝의 숫자가 낯설어질 때

by 늘푸른 노병


통장이 없는데, 내 돈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마지막 종이통장

부산 대연동 우리은행과

서울 용산우체국에서 만든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행 문을 열면

특유의 종이 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쳤고,


창구 직원에게 신분증과 통장을 건네면,

잠시 후 찌르륵, 찌르륵 인자(印字) 소리를 내며

찍혀 나오던 종이통장을 손에 쥐던 그 든든함,

감촉이 아직도 또렷하다.


통장 속 빼곡한 날짜와 금액은

한 달 동안 흘린 땀방울의 흔적이며,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정직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 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제 종이통장은 발행하지 않습니다.

모바일 통장으로 변경해 드릴까요?”


순간 멍해졌다.

내 돈이 담긴 유일한 증거가

손에서 사라진다는 뜻처럼 들렸다.


숫자로만 존재하는 돈이라니...

손때 묻은 통장을 넘기며 잔액을 확인하던

그 소박한 기쁨이

이제는 화면 너머로 떠도는 느낌이었다.


처음 뱅킹 앱(App)을 마주했을 때의 낯섦은

앱을 설치하던 불편함과는 또 달랐다.


내 전 재산이 이 작은 기계 안에서 오간다니,

쉽게 믿기지 않았다.


인증서 복사,

여섯 자리 비밀번호 입력,

보안카드 숫자 네 개 맞추기….


한 번이라도 틀리면

비대면 인증’이라는 더 큰 절차가 앞을 막았다.


내 돈을 내가 찾겠다는데

기계는 거듭 내가 본인임을 증명하라고 한다.


은행 지점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디지털 뱅킹’과 ‘ATM’이라는

무미건조한 단어만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손에 잡히는 실물을 신뢰하는 세대다.

도장이 선명한 통장을 금고에 넣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안심을 구시대의 방식이라 말하며

보이지 않는 숫자를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종이통장이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일군 삶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통장의 무게가 스마트폰의 무게로 옮겨졌을 뿐,

그 안에 담긴 땀방울의 농도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씩

그 흐름에 익숙해지고 있다.


종이통장이 사라진 그날,

나는 단지 옛 방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를 믿는

새 시대의 문턱을 넘은 것이었다.


어렵고 낯설어도

이 또한 우리가 지나야 할 길이다.


잉크 냄새 짙은 통장은 그리워도,

화면 위를 꾹꾹 누르는

내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현역의 힘이 담겨 있다.




[이어지는 연재 안내]

베이비부머 필살기 (4) - QR코드 앞에서 멈춰 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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