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리온 사업단 창설 멤버 증언 ①
오늘부터 ‘수리온 헬기’
국산화 개발 현장 이야기를
3부작으로 연재합니다.
(12월 10, 12, 15일)
6년의 대장정 동안, 저는 두 차례.
'개발사업단'에 합류해 그 현장에서
마주한 도전과 성취의 순간들을
조용히 풀어보려 합니다.
정년 후에는 수리 부속을 납품하는
무역회사에서 '수리온'을 다시 만나,
함께 늙어가는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교는 인사 제도상 대개
주특기와 부특기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나는 조종사이면서 군수
특기를 부여받았고, 무기 획득
업무까지 경험하는 이례적인 이력을
쌓았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
국산 헬기 개발이라는 과업에 현역
장교로서 참여하게 될 준비 과정
이었던 것 같다.
2003년 6월, 국방부 연구개발관실
소속으로 ‘한국형 헬기 개발 국책
사업단’이 창단되었다. 나는 30여
명의 창단 멤버 중 한 명으로 합류했다.
1조 3,000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이 대장정은 우리 안보의 ‘자주국방’
열망이 응축된 결과였다.
국방부, 산업부, 국방과학연구소
(ADD), 항공우주연구원(KARI),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온
전문가, 연구원들로 한 팀이 되었다.
당시 국방부 청사 정면에 걸려 있던
낡은 ‘자주국방’ 슬로건이, 오늘날
K-방산의 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카트리지(Cartridge)의 비애와 국산화의 절규
남북이 극한 대치를 이어가던
1980~90년대, 우리 군은 미군원
장비로 전력을 채웠다.
헬기 분야, 역시 UH-1H나 500MD
같은 기종들이 주력 전력이었지만,
반세기가 흐르며 기령(機齡)이 많아
노후화는 심해졌다.
특히 부품 단종, 안전사고 우려,
야간 및 악천후 임무 제한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국방 정책
입안자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구매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 자립을
이룰 것인가?” 장고 끝에 내려진
결정은 헬기 국산화였다.
그 결정의 배경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군수사령부에서 헬기
창정비 관리와 수리부속 조달, 재고
통제를 6년이나 담당했던 경험
때문이다.
쉽게 비유하면 이렇다.
프린터를 사면, 이후부터는 비싼 잉크
(카트리지)를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사야 한다. 항공기 수리 부속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고가일 뿐만 아니라
공급국 사정에 따라 구매 자체가
제한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수리 부속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을(乙)의 입장에서 돈을 들고
사정해야 했다.
해외 의존도가 이렇게 높은
구조로는 제대로 운용을 수행할 수
없었다. 돈이 있어도 못 사고,
사려면 사정해야 하고,
급할수록 더 비싸지는 구조…
당시 기술력과 인프라는 미비했지만
국산화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구히 종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니스(Nice) 상공, 2시간의 긴장
국책사업단이 구성되고 나는 인사
업무를 맡았다. 30여 명이 하나의
팀으로 작동하도록 조직을 조율하는
역할이었다.
기술 개발만큼이나 어려운 이질적인
조직 문화의 융합 과정이었다.
개발 헬기 모델 선정 과정에는
미국 벨(Bell), 시코르스키(Sikorsky),
다국적기업(NHI), 프랑스의 유로콥터
(현, 에어버스 헬리콥터) 등 세계
유수의 제작사들이 참여했다.
결국 국가의 장래를 고려한 결정으로
기술 도입, 공동 개발 방식이 가능했던
프랑스의 쿠거헬기(AS-532,
Cougar)가 선택되었다.
조종사이자 시험비행조종사 자격을
갖춘 터라 나는 선진 기술을 직접 확인
하고자 프랑스 현지로 1주일간 출장을
떠났다.
프랑스 남부 니스 상공.
프랑스 조종사와 기술사를 동승.
2시간 동안 비행하며 최고 속도,
최대 상승률, 선회율-반경, 급상승
하강 성능 등을 점검했다.
나는 헬기의 한계를 시험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의도적으로 조종을 조금
거칠게 했다. 점검할 것이 많아서
였다.
프랑스 조종사가 물었다.
“원래 조종을 이렇게 거칠게 하나요?”
그 말투에는 당혹감과 함께
약간의 불쾌함도 섞여 있었다.
잠깐 순간의 어색함이 어렴풋하다.
화장실까지 따라다닌 그림자
1주일간의 프랑스 출장 동안
우리는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혹여나 기술을 빼갈까 우려했는지,
유로콥터 보안 담당자들은
우리의 모든 동선을 감시했다.
식당에서는 옆 테이블에 앉았고,
복도를 걸을 때도 몇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심지어 화장실에 들어갈
때조차 문 밖에서 기다렸다.
‘스토킹(stalking)’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기술 자료가
담긴 서류가방은 한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회의실을 잠깐 비울 때도
누군가는 반드시 남아 있어야 했다.
혹시라도 카메라나 노트를 꺼내면
즉각 제지당했다.
기술력이 없으면 어디를 가든
천대받는다. 그 사실을 1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내내 온몸으로 느꼈다.
자주국방의 열망에 불을 지피는,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그리고 복귀
사업단은 정부로부터 예산 확보와
각각의 이질적인 조직 문화 통합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려웠던 상황임에도 초대 단장
이셨던 Y장군님께서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어느 날 단장님도 막중한 책임감에
막막하셨는지. 전체를 불러 모아
각자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첫 눈길 같은 길이니, 우리가 가면서
길을 내면 됩니다.”라고...
돌이켜보니 참 일리 있는 말 같다.
사업단의 기틀을 다지고 나서
나는 현재 운용 중인 헬기 수리 부속
해외 구매·공급이라는 본연의 군수
업무를 맡기 위해 군수사령부로
떠났다.
창설 멤버로서의 짧은 동행이었지만,
분명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다시 사업단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는 본격적인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약 700여 명의 연구원들이
각자의 소속 기관과 연구소에서 기술
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자리에서
목격한 것들은….
(수리온 사업단 창설 멤버의 증언 ②는 12월 12일(금)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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