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늙기 전에 다시 걷고 싶은 우리 땅 (3) - 수원 화성과 융·건릉
강진에서 다산(茶山) 정약용을
떠올린 뒤, 그의 실사구시(實事
求是) 정신이 실제 공간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 사유(思惟)가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수원 화성
(華城)이다.
수원 화성은 230년 전의 상황
으로는 큰 공사였지만, 새로운
축성공법을 적용하여 2년 8개월
만에 놀라울 만큼 빠른 완공을
이뤄냈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는 다산의 손끝
에서 시작된 과학이, 국가의 기록
으로 완성된 기록서.
여기에는 공사에 투입된 인원과
자재, 비용, 축성 공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산은 거중기(擧重機)와 녹로
(轆轤) 등 도르래 원리를 응용한
장치의 설계와 활용에 관여했다.
무거운 성돌을 보다 효율적으로
들어 올리기 위한 고안이었다.
기술은 노동을 대체하기보다,
노동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쓰였다. 그것이 다산의 실사
구시의 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곽 둘레는 약 4.8킬로미터.
장안문에서 팔달문을 지나
서장대에 오르기까지, 돌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보존 상태도
양호했다.
성벽을 따라 걷는 시민들의
표정은 가벼웠지만, 이 돌을
처음 쌓던 이들의 손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예비역인 나에게 화성(華城)은
또 다른 의미로 읽혔다.
성곽의 굴곡, 포루와 각루의
배치, 능선을 활용한 방어선은
단순한 미관이 아니라 전략
(戰略)의 결과였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한 시대가 선택한
군사적 판단의 집합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華城)은 군사
시설에 머물지 않는다. 정조에게
이곳은 새로운 정치를 실험하려는
공간이었다.
수도 한양을 떠나 수원에
신도시를 구상했던 그의 의지가
성곽 곳곳에 배어 있다.
돌은 방어를 위해 쌓였지만,
그 배경에는 개혁의 구상이
있었다.
성곽을 내려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융·건릉(隆·健陵)이다.
융릉·건릉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 효의왕후의 건릉이
나란히 자리한다.
뒤주에서 생을 마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던 정조의
뜻은 이곳에서 비로소 형태를
갖추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정자각 앞에 서니, 화성에서
느꼈던 역동성과는 다른 고요가
흐른다.
정치적 논쟁과 권세는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단정한 석물과
능선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군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화성의 성곽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돌의 무게를 발로
느꼈다.
누군가는 설계했고, 누군가는
다듬었고, 누군가는 묵묵히
쌓았다.
결국 남는 것은 말이 아니라
구조물이고, 의지가 아니라
기록이다.
내 삶 역시 언젠가 하나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화성(華城)의 돌처럼 단단한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돌은 침묵하지만, 그 무게를
견뎌낸 기록은 세월을 이긴다.
성곽을 내려오며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연재 안내]
더 늙기 전에 다시 걷고 싶은 우리 땅(4)
- 서울, 인왕산
# 화성(수원성) # 정조 # 융·건릉 # 다산 축성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