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에 오르니, 서울이 아니라 세월이 보였다

더 늙기 전에 다시 걷고 싶은 우리 땅 (4) — 서울, 인왕산

by 늘푸른 노병


젊은 시절에는

먹고사는 일에 밀려,

서울을 향해 올라가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서울을 내려다
보는 나이가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이 있다.


빌딩 사이로 고개를 들면

불쑥 솟아 있는 바위 능선.

인왕산이다.


인왕산 정상, 해발 338m


강진의 숲이 부드러웠다면

이 산은 거칠다.


돌은 투박하고

길은 숨을 조금 요구한다.


그래서 좋다.


주말 아침,

등산화 끈을 묶으며 문득

생각했다.

왜, 굳이 이 바위를 오르려 하는가.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속에서

잠시 느리게 걷고 싶어서다.


젊을 때는 앞만 보고 달렸고

지금은 잠시 멈추는 법

배우고 있다.


멈춘다는 것이

포기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인왕산 초입의 성곽길은

서울의 시간을 품고 있다.


한성도성 순성길


조선의 돌과

근대의 상처와

오늘의 발자국이 한 줄로

이어진다.


바위를 짚고 오르다 보니

숨이 차오른다.


예전 같으면 속도를 냈을 텐데

이번에는 일부러 보폭을 줄였다.


천천히 오르면

도시가 보인다.


정상에 다다르자

광화문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한강이 흐른다.


발아래에는

조선 왕조의 등을 지키던 자리.

경복궁의 기와가

낮게 엎드려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산, 광화문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집터도 이 산 아래

서촌 어딘가에 있었다 한다.


또, 산 아래 서촌에는

시인 윤동주의 흔적도 남아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이 일대를

오르내렸던 그는 지금은 윤동주

문학관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던 청년.

그 또한 이 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높이 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인생도 그렇다.


중년은
더 높이 오르는 나이가 아니라,
어디까지 오를 것인지
정하는 나이다.


예전에는 정상만 보였다.

지금은 내려갈 길이 먼저 보인다.


능선에 서니 초봄의 기운도 있지만,

여전히 쌀쌀했고

도시는 분주해 보였다.


그러나 이 바람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인왕산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지만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높이다.


인왕산 정상 주말 등산객


중년은
더 많이 가지는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지 고르는 시간이다.


관계도, 욕심도, 말도.

거친 바위를 밟으며

나는 하나를 내려놓고

하나를 붙들기로 했다.


무엇을 멈출 것인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 질문을 들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도시로 다시 들어서니

신호등은 바쁘게 바뀌고

사람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내 걸음은

조금 느려졌다.


중년은
끝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고르는 시간이다.


그리고 산은

내가 다시 어디로 갈 것인지

조용히 묻는 자리였다.




[연재 안내]

더 늙기 전에 다시 걷고 싶은 우리 땅(5)

천년의 숨결, 안동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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