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을 걷다, 이름 없이 남은 선택을 만나다

- 왕을 살리고 스스로를 내놓은 이름들(8)

by 늘푸른 노병


이 글은 3월 28일에 처음 게시된 원고입니다. '브런치북' 구성에 맞춰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다시 발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결과를 기억한다. 그러나 역사는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초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뜻한 주말 날씨. 차 안 대시보드가 가리키는 낮 기온은 22도다.


군위삼국유사 IC를 빠져 동화사(桐華寺)로 향하는 길, 벚꽃은 막 피기 직전이었고 단풍나무 끝에는 연초록이 번지고 있었다.


산은 아직 봄의 입구에 서 있었지만, 공기는 이미 계절 하나를 앞서가고 있는 듯.


수령 깊은 단풍 가로수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가을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남는다. 붉게 물든 팔공산(八公山)은 또 어떤 얼굴일까.


팔공산은 대구와 경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주산(主山)이다. 2023년에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고,


산자락 곳곳에는 자연의 깊이만큼이나 오래된 신앙과 역사의 시간이 스며 있다.


특히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인 동화사는 오랜 세월 이 산의 정신을 품어온 곳처럼 느껴진다.


동화사 대웅전 - 약사 여래불


한때 현역 시절 전사(戰史)를 공부했던 내게, 팔공산의 이름과 이 산에 얽힌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탈출구가 없던 그 순간, 장수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왕건은 살아 돌아갔다. 신숭겸은 돌아오지 못했다.


내 유년의 고향 이웃동네는 평산신 씨(平山申氏) 집성촌이었는데, 그 집안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동화사 경내를 걷다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수백 년 된 전각 처마 아래 봄빛이 조용히 고이고 있었다.


저 오래된 나무들은 그 선택을 보았을까. 아니면 그 선택이 있었기에 저 나무들도 여기 서 있는 것일까.




팔공산 남쪽 자락에는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알려진 영험한 기도처, '갓바위'가 있다. 사계절 내내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석조여래좌상(갓바위)


오르는 이들의 표정에는 간절함과 결연함이 함께 있었다. 누군가는 바람을 품고, 누군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오늘의 팔공산은 따뜻했고, 나무들은 조금씩 푸르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한 산길 아래에는 이름보다 선택으로 남은 사람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늘 누가 왕이 되었는지를 기억한다. 하지만 이 땅은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선택 하나가 지금의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오늘의 걸음은 그래서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이름 없이 남은 선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음 연재 안내]

-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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