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쥐인간
1. 8일차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 번 운동을 해서 그런지 생활리듬이 꽤 안정됐다. 이제는 8시면 눈이 떠지고 새벽 1시면 졸려 죽을 거 같다.
2. 식단도 안정됐다. 기한 임박 곤약젤리가 있어 개당 150원 정도에 잔뜩 사두었다. 배고플 때 공짜라고 라면을 먹으면 오히려 더부룩하고 그다음 날을 망칠 수 있으니, 차라리 이게 낫다. 견과류는 아직 고민 중이다. 적당히 배고프게 먹으니 집중력도 올라가고 체중관리도 되고 있다.
3. 슬리퍼가 사라졌다. 아침에 운동을 다녀왔는데 슬리퍼가 없어져있었다. 내가 신발장에 안 넣고, 바닥에 두었던가. 그래서 누가 가져갔나. 굳이 다른 비싼 신발을 두고, 실내에서만 신는 슬리퍼를 가져간 게 이상하다. 내가 급하게 운동 가느라 슬리퍼를 안 치운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4. 무작정 지원은 안 하고 있다. 까다롭게는 안 해도 한두 시간은 찾아보고 지원하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5. 그렇지만 그 분야는 1차 산업부터 4차 산업, 직무는 영업부터 마케팅, 기획 등 수십 개를 넘나 든다. 이 정도면 조류에 붙었다가 포유류에 붙었다 하는 박쥐가 아닐까. 언제는 농업이 좋아 보이고, 언제는 반도체가 좋아 보이고, 언제는 소프트웨어가 좋아 보인다. 나름 접점을 만들고, 있는 스펙 없는 경험 다 끌어다 쓰지만 오늘도 고배를 마신다.
6. 당근마켓으로 알바를 넣고 있다. 하나는 했고, 두 개가 남았다. 아니 남았었지. 원래 오늘 푸드트럭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는데, 날짜가 헷갈렸다고 취소해버렸다. 시간이 떠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생각하는 계기는 됐지만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건 신고 못하나? 시간을 저당잡히는 삶은 역시 괴롭다.
7. 답을 찾고 있다. 왜 일론 머스크와 빌 게이츠는 죽을 때까지 일할까. 왜 일본의 초밥 장인은 90세까지 밥을 만질까. 왜 누구는 빨리 은퇴하고 싶어 안달복달이고, 왜 누구는 은퇴 후 일이 없어 무기력하게 살까.
죽을 때까지 할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그게 사명감이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든, 재밌어서든 그런 무엇이 있어야 인생은 보람차다. 살아갈 이유를 느낀다. 도전과 성장 없이, 보람과 재미없이, 기쁨과 노여움 없이 편하기만 한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편하게 많이 벌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덕담처럼 퍼지는데, 편하게 많이 번 뒤에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게 없다면 이룬 뒤에도 행복하지 않을 거다. 대학 가면 다 된다는 부모의 말에 속은 것처럼.
나에게 그 무엇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다양한 알바를 하려고 한다. 일단은 단기이긴 하지만.
8. 그래서 저번에 말했던 대로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꽤 많다. 외적인 것도 있고 경험적인 것도 있다. 지금 당장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괜히 들떴다.
9. 마케팅 커뮤니티를 찾아 좀 둘러봤다. 어떻게 커리어를 시작하는지 궁금해서였는데, 어딜 가나 비슷한 말이 있었다.
교육은 실무를 이길 수 없다.
알고 있지만 실무할 건덕지가 없다. 조금 더 머리를 굴려봐야겠다. 직무마다, 회사마다 쓰는 툴이 다 다르다. 뭐든지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내가 조금 부끄러워진다. 철마는 달리고 싶은데, 달리지 못하고 있다.
10. 지금까지 지원했던 스타트업들이 투자를 받는다는 소식을 보면 조금 뿌듯하다. 내가 그래도 잘 봤었나 싶다. 자세히 보느라 위에 소신 있는 지원자들보다도 더 적게 지원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보다 더 지원 횟수를 늘리면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확신을 못 가지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걸까?
11. 혹자는 고작 고시원 살면서 매일같이 일기를 쓰냐고 말할 수 있다. 나보다 고생하는 분은 널렸다. 나도 안다. 서울을 조금만 지나가도 노숙자들을 볼 수 있다. 앞으로는 수십층짜리 업무빌딩이 보이고, 뒷골목에는 노숙자들이 보이는 광경은 이제 익숙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까먹기 때문도 있다.
왠지 모르겠는데 기억력이 안 좋아서 친구들이랑 뭐 했는지, 일을 어떻게 했었는지 자주 까먹는다. 애인과 저번 주에 뭐 했고 뭐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친구들이 너 그때 그랬어,라고 할 때도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른다.
이게 무언가를 읽고 듣느라 너무 많이 때려 박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뇌 문제인지, 정신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계속 기록하는 거 같다. 일은 어떻게 했는지 다이어리든 메모장이든 다 기록하고, 누가 무슨 말했는지 모임 후 기록한다.
맥북으로 바꾸면서 2017,18년 메모를 보게 됐다. 예전에 읽었던 책 메모랑, 예전 애인들이 무슨 말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놓은 게 있었다. 읽기 전에는 '걔가 그런 일이 있었나?' 싶었고 지금도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도 안 난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계속 기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