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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Feb 05. 2023

전세 살며 감사하는 12가지

고시원탈출기

전세로 온 지 2주 정도가 됐다. 고시원에 있다가 전세로 가는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감사함을 조금 잊었지만, 잊기 전에 그 감동을 적어보려고 한다.

1. 화장실


가기 위해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가랑이가 터진 내복을 가리기 위해 깔깔이를 입는다. 그리고 화장실에 누가 똥테러를 해놓는지는 않는지 신경 쓴다. 화장실 가는 건 꽤 귀찮은 일이었다. 지금은 너무 편하다. 1초 거리에 화장실이 있다. 직접 청소해야 하는 건 귀찮지만, 그래도 나만의 화장실을 가진다는 건 은근히 기쁜 일이다. 화장실을 가지지 못하는 저개발 국가들에게 변기를 주려는 빌게이츠와 재용이 형은 이 기쁨을 아는 걸까.


2. 세탁기


밤늦게 가지러 올라가지 않아도, 누가 가져가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아도 된다. 밤늦게 돌려도 누가 내 걸 빼놓을 걱정 없다. 자리가 없을까 신경 쓸 일도 없다. 건조기가 없는 건 아쉽지만, 빨래가 말라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3. 넓은 침대


정확히는 토퍼지만 아무튼. 침대는 가져오기도 어렵고, 처분도 피곤할 거 같아 토퍼를 선택했다. 그것도 퀸사이즈로. 사이즈도 모르지만 그냥 커 보이는 걸 샀다. 좁은 고시원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벽에 붙어 자곤 했던지라 큰 잠자리를 원했다. 100일 넘게 살면서 떨어진 적은 없었지만 아마 필자가 조심한 덕분이 아닐까. 친구들이 이렇게 큰 건 공간낭비라고 해서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름의 보복소비를 해버렸다.


4. 냉장고


누가 가져갈까 봐 닭가슴살을 사기 두려운 날은 사라졌다. 심지어 창업센터 냉장고에 잔뜩 비축해 둬서 집 냉장고를 쓸 일도 없다. 아침점심저녁을 다 회사에서 해결하고 있다. 고시원 살 때는 그렇게 개인 냉장고가 좀 컸으면 하고 바랐는데 신기한 일이다.

5.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탁기가 있는 앞베란다가 있고, 또 문을 열면 주방이 있고, 분리된 문을 열면 그때서야 방이 나온다. 공간이 3개나 있다. 신발이나 세제 등은 베란다에 두고, 부엌과 방에도 가구를 많이 안 두고 있어 넓게 방을 쓰고 있다. 물건을 보관해 두는 곳이 하나쯤 있기를 원했는데, 마침 딱 맞는 방을 찾아서 다행이다.


6. 온수매트


작년 겨울 추울 때, 난방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전기를 이용하는 기구는 쓰지 말라고 해서 괜히 쫄아 사용하지 않았다. 하루이틀이긴 하지만 막 추워지기 시작할 때 입김이 나는데도 그냥 지냈었다.


3주 전쯤, 영하 15도 날에 이틀 정도 그냥 잤더니 머리가 너무 아팠다. 급하게 당근으로 온수매트라는 걸 사봤다.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따뜻했다. 바닥 난방을 안 하고 자는데도 따뜻해서 행복했다. 고시원에서 막 추워지기 시작할 때, 패딩을 입고 방 안에서 지냈던 걸 생각하면 이건 기적이다. 거의 저개발국가에게 변기를 주는 것과 같은 혁신이다.


7. 창문


외창이 있는 방을 원했다. 물론 벽돌뷰라서 만족스럽진 않다. 그래도 환기시킬 때, 아침에 햇빛이 조금 들어올 때 기분이 좋다. 추워서 뽁뽁이를 붙여 제대로 들어오진 않지만, 살짝 들어오는 햇빛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다. 고시원에서는 7시에 일어나는지, 10시에 일어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22시에 자는 것도, 02시에 자는 것도 구분할 수 없었다. 막판에는 리듬이 많이 망가졌었다.


8. 음악


아침에 출근 준비하면서 유튜브나 음악을 그냥 틀어놓을 수 있다. 이어폰과 헤드셋을 달고 살던 때와는 또 다른 기적이다. 물론 이어폰 따위는 안 키고 그냥 핸드폰과 TV를 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듣기 싫은 걸 남에게도 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시간이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그 탓인지 꽤 비싸게 주고 샀었던 소니 이어폰이 망가지기도 했었다.


9. 통화


애인과 통화하기가 꽤 힘들었다. 애인은 시험준비와 취업준비를 하고, 필자는 늘 도서관과 헬스장이 끝난 23시쯤 돌아왔기 때문이다. 딱 23시에 집에 가는 길에 통화하는 게 아닌 이상, 늘 겉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옥상으로 올라가 통화를 해야 했는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애인도 이해하는지 하루 2~3분의 짧은 통화만 하곤 했다.


지금은 자기 전에 편하게 몇십 분씩 통화한다. 이것도 행복한 일인 거다.

10. 홈트


헬스장이 망하고, 고시원에서 산다고 하자 그 방에서라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 조언을 듣고 감탄해 스쿼트나 푸시업은 꾸준히 했었다. 그렇지만 책상에 머리를 넣고 침대 위에 발을 올려하는 강제 파이크 푸시업은 그렇게 유쾌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요가매트를 사 요가를 조금씩 하고 있다. 클래스 101이나 요가유튜브를 보며 따라 하고 있다. 헬스장이 쉬는 날에는 안 해본 운동을 하면서 몸을 깨우려고 한다.

11. 헬스장


고시원 근처 헬스장이 망하고 전셋집에서는 홈트나 할까 하고 요가매트를 샀는데, 역시 헬스장은 필요했다. 샤워와 생존형 자기 관리를 위한 곳은 헬스장밖에 없었다. 시설은 훨씬 넓고 쾌적했는데 저번이랑 가격은 똑같았고 심지어 무료 PT도 있었다. 운동은 고작 20분 가르쳐주고 40분 동안 "등록 안 하면 그 몸 그대로일 거예요. 2년 전에 받은 수업 다 소용없었네요"라고 몇 번을 말해서 좀 짜증 나긴 했지만, 그래도 20분 하는 동안은 꽤 효과가 있었다. 심지어 왜 생각을 안 하고 운동하냐는 말을 들어서, 예전에 열심히 했었던 때가 떠올라 자극까지 받았다.


12. 친구들


크진 않지만, 이제 나만의 공간에 친구를 초대할 수 있다. 외국에서 친구가 오면 재워줄 수도 있다. 토퍼도 퀸이다. 애인을 데려오기에는 너무 안 꾸며서 민망하지만, 나중에는 애인과 보낼 수도 있겠다. 모임공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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