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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Dec 06. 2022

샤워장이 사라졌습니다

고시원 80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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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좁은 고시원 샤워실에서 씻는 게 싫고, 수건이나 세탁 등도 귀찮아 고시원 첫날부터 헬스장을 등록했다. 하루 두 번 알차게 운동했고, 실제 체지방 감량도 많이 하고 습관 형성에도 도움이 됐다. 그런데 그 헬스장이 망했다.



2. 헬스장이 망했다. 레전드다. 아침에 평소처럼 헬스장에 갔더니 문이 잠겨있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가기에 뭔가 했더니 문에 <문자 참고>라고 적혀있었다.


문자를 봤다. 새벽 다섯신가 와있었다.


헬스장 오늘부터 운영 중지합니다.

오늘부터? 미친 건가?


코로나 잘 버텨보려고 했지만 죄송합니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1년 끊으라고 했지? 접을 생각을 몇 달은 했을 텐데.


어떻게든 책임지겠습니다. 무단 침입해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지는 마세요. 좋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미리 가져갈 시간을 줘야지 오늘부터 망했다는 사람이 어딨는가. 웃음밖에 안 나온다. 좋게 마무리는 당신이 못하게 만들었다. 문에 침이라도 뱉으려다가 참았다.


먹튀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보상 방법을 찾겠습니다.

먹튀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정말 마인드가 문제다.


욕이 절로 나왔다. 운동을 못하는 것도 못하는 거지만 씻지를 못한다. 굳이 따지면 샤워실이 있으니 씻을 수는 있지만 운동기구와 수건과 운동복. 그 모든 게 사라졌다.


고시원에 돌아가 수건과 칫솔을 챙겼다. 처음엔 걱정했는데 그날 씻어보니 괜찮았다. 정말 씻을 목적 하나라면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시장이 개입한 건 틀린 게 없다.


드라이기는 없었지만 운동하기 위해서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반 먼저 나왔으니 머리 말리는 시간도 충분했다. 막상 또 해보니 씻을만해서, 역시 해보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퇴근 후 집에 들렀다. 드라이기를 챙기기 위해서다. 왜 가져가냐고 해서, 헬스장이 망했다고 했다.

4. 그날 가나전이 있었다. 만두랑 이것저것 꺼내먹었는데 저녁 안 먹었냐고 해서,  하루 한두 끼 정도 먹는다고 했다.


어떻게 한두 끼만 먹고 사냐고 해서, 돈이 없는데 어떻게 세끼 다 먹냐고 답했다.


그 이후에는 별 말 오가지 않았고 축구를 봤다.


5. 월드컵 시즌이라 다행이다. 직장은 어떻냐, 네 형은 별 말 없냐. 이야기가 없어서 좋다. 한국 경기도 경기지만, 미국이나 아르헨티나 등 다른 나라 축구 경기도 거의 매일 있어 대화를 축구로 대체할 수 있다. 대화 주제를 축구로 떼울 수 있어 다행이다.

 

6. 최근 본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공사 중이다. 그날 아침부터, 퇴근 후 10층이 넘는 곳을 오르고 다시 챙겨 내려왔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7. 일본인 친구가 왔다. 4박 5일 중 3일을 같이 놀았다. 익선동, 이태원, 강남, 건대 등 이곳저곳 데려갔고 오랜만에 잘 놀았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는데, 3일쯤 되니까 할 말이 없어서 정치나 연애 등 쓸데없는 이야기도 많이 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매칭 어플이 엄청 유행

사람들은 일본인이 평화로워서 좋다고 하는데, 그 체제와 정체 때문에 분노하는 일본인이 꽤 많다는 것. 일본과 한국의 늘어나는 묻지마 범죄.

예상은 했는데 친구가 비슷하게 생각해서 놀랐다.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문화가 정상이겠는가. 과한 친절과 배려는 폭력성과 난폭함을 숨기기 위한 겉치레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8. 저번에 고시원 살면서도 돈이 꽤 나간다고 했더니 헬스장 갈 돈이 어딨냐는 댓글이 달렸다. 그분 덕분인지 때문인지 정말 헬스장이 사라졌다. 월요일 챙긴 짐에는 드라이기와 함께 푸시업바도 있었다. 뭐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으면 운동할만하다.

9. 애인이 고시원에서 사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당연히 힘들다고 답했다. 왜 돌아가지 않냐고 다시 물어서, 긴 답변을 했다.


부모님은 공무원을 오래 해서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경찰공무원이고, 외할아버지도 경찰이었고, 이모랑 이모부는 교사 부부다. 평범한 회사생활 몇십 년 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사촌들도 다 공무원과 공기업으로 갔다.


그래서 퇴사하고 잠깐 2~3개월 있던 그 시간이 부모님에게 고깝지 않게 보였던 게 이해된다. 밤새 준비해 면접보고 점심에 쓰러져 자는 게 게으름으로 보였던 것도 이해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스타트업이 어쩌고, 사기업이 어쩌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나. 면접 보고 들어와서 잘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은 거실 불 켜고 나가지 말라는 거였다. 그런 정신머리로 사회생활을 하면 안 된단다.


그때는 화가 났는데, 지금은 이해된다.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거뿐이었다. 회사생활이나 면접, 스펙 등에 대해서 모르니 그 어떤 실제적 도움이나 조언을 줄 수 없어서 그냥 마인드를 고쳐주려고 한 거뿐이었다.

그 전날 들었던 말은 요즘 신문 보니 일 구하기 어렵다는데, 기술대학이나 공장이라도 가라는 거였다.


요즘은 신문 보면 일자리가 많다니 그 반대일라나? 참 웃기다.


그다음 날 들었던 말은, 1년 안에 취업하고 1년 안에 집을 구해 나가라는 거였다. 그렇게 쉬지만 말라는 거였다.


수백 번 했던 "도서관 다녀올게요"라는 말이 정말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면접, 약속, 쇼핑, 막노동일 수도 있는데 그걸 설명해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걸 내걸고 나를 자극하면 뭐라도 될 줄 안다. 직장과 집이야 1년 안에 구하라면 구하지만, 그게 정말 좋은 직장과 집이겠는가.



고시원 생존기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 '돈은 없지만 독립은 하고 싶어'로 깔끔한 디자인과 멋진 표지로 재탄생했습니다. 많관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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