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인가
고시원에 있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두 달 전 대학교 때 아는 선생님이 소개해줘 행사 아르바이트를 일주일 동안 했는데, 아침 9시부터 시작이라 경기도에서 다닐 자신이 없어 고시원을 예약했다. 보통 오전 10시 기상 새벽 2시 취침인 날들어었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만화도 있고 고시원에 살면 고생이다, 이상한 사람만 있다는 말이 있어서 걱정도 했지만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여기가 사람 사는 곳 맞냐는 표정을 보이는 분도 계시겠지만.
보통 아래 사진 같은 경우 크기가 25만 원이고, 화장실, 샤워실, 외창문, 내창문 등으로 인해 가격이 정해진다. 정말 비싸면 50만 원까지 가는데, 이 정도면 원룸이랑 다를 게 없지만 보증금이 없는 게 그나마 장점이다. 신기한 게 서울이라고 유달리 비싸거나, 경기도라고 유달리 싸지도 않다. 아마 찾아보면 행복주택, 청년 주택 이런 게 더 있겠지만 일단 보증금 없이 당장 20만 원대로 살 곳을 떠올리면 고시원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아르바이트할 때 잠깐 있었던 곳은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었지만 샤워 후에 문이 제대로 안 닫혀 밤새 습했고, 물이 바닥까지 새기도 했다. 샤워실과 변기가 있으면 방 가격도 10~15만 원 더 비쌌다. 그럴 바에 연 30만 원짜리 헬스장을 끊어 방에서 덜 습하게 자고 수건 걱정도 덜한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최소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배설의 자유가 월 10만 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용소에서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먹을 것보다 씻는 걸 택하는 사람도 있었다는데, 그게 현대에서는 월 10만 원이구나.
이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경기도에서 2개 서울에서 2개 정도를 보기로 했다. 가격은 이때 경험으로 대충 알게 됐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가격으로 봤는데도 가격대는 대충 비슷했다.
경기도에서 한 곳은 정말 허름하고 낡아서 여긴 아니다 싶었다. 고시원장이 빈 방이라고 소개한 곳을 몇 개 보고 전체적으로 보는데 한 방이 열려있길래 빈방인가 싶어서 봤더니 안에 사람이 있었다. 방문을 열고 무언가를 틀어놓은 채로 누워 있었다. 눕는 거야 자유지만 오후 시간에 굳이 방문을 열고 굳이 무언가를 틀어놓은 채로 누워있는 중년 남자를 보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다음 구경한 서울 고시원은 그나마 깔끔했다. 시설이야 어디든 비슷하지만 오픈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깔끔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격도 웬만하면 20만 원대로 다른 곳들에 비해서는 저렴했다.
그래서 이틀 뒤 바로 입금했고, 짐도 미리 보내 두었다.
나머지 곳들도 통화는 했지만 가격대가 오히려 신축보다 높아서 제외했다. 경기도에 있는 곳은 일자리가 많은 서울로 가게 되면 불편할 것이고, 다른 서울에 있는 곳은 가격에 비해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났을 때 바로 괜찮은 곳을 찾은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1일차
뭐든 1일차는 벅차다. 고시원 1일차도 그랬다. 늘 그렇듯 10시쯤에 일어났고 어젯밤에 정리해둔 짐에 충전기와 욕실용품을 추가로 챙겼다.
느긋하게 밥을 먹고, 어쩌면 올해는 더 못 볼지도 모르는 신문도 보고 집을 나오니 11시였다. 아버지는 웬일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마중해주셨고, 어머니는 가족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셨다. 밉지는 않지만 서로 화나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잘 살아보겠다'는 답장 정도만 드렸다.
13시. 고시원에 도착했다. 전화해보니 고시원장이 항상 상주해있는 건 아니니 적당히 입주해있으라고 하여서 바로 들어갔다. 기본적인 짐을 정리하고 나와서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고 헬스장을 몇 군데 둘러보았다. 시설은 예전 용인에서 다녔던 곳보다 못한데 가격은 거의 두 배였다. 고시원 가격은 비슷한데 헬스는 왜 이런지. 연중무휴지만 조금 비싸고 먼 곳으로 할지, 한 달에 6일 쉬지만 싸고 가까운 곳으로 할지 고민이 되어서 일단 조금 쉬고자 장을 보러 갔다.
15시. 다이소에 가서 옷걸이와 샤워 바구니 등을 샀다. 얼마 안 산 거 같은데 3만 원이나 나왔다. 샤워 바구니를 헬스장용과 고시원용 두 개를 산 게 6천 원이라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용히 다녀야 한다고 해서 슬리퍼도 구매했는데 이것만 해도 거의 1만 원이다. 게다가 3만 원어치 짐이라 꽤 무거워서 선선해지기까지 기다리기 위해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기까지 했다. 벌써 지출이 상당하다.
카페에서는 오랜만에 채용 사이트에 접속해보고, 유튜브 쇼츠를 만들고, 작성했던 브런치를 다시 봤다. 2주 전만 해도 꽤 또랑또랑한 정신을 유지했던 거 같은데 그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쯤 시간을 보내고, 다시 고시원에 돌아와 짐 정리를 했다. 옷걸이에 옷을 걸었고, 수건을 꺼냈고, 샤워 바구니에 용품들을 나눠 담았다.
17시. 역시 헬스장은 집 가까운 게 좋겠어서 가까운 곳으로 가서 등록했다.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여자가 나와 느긋하게 상대하며 "제가 좀 느리.. 쥬. 그래도 재촉하면.... 더... 못하니까.... 이렇게 할게요..." 하며 응대를 하고 사물함 열쇠를 주었다. 환불은 솔직히 말하면 어렵다고 해서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설도 그저 그렇고 응대도 마음에 안 들지만 8개월 만에 헬스를 하니 너무 신나서 2시간 넘게 했다. 오랜만에 근육통까지 느낄 수 있었다.
19시. 저녁을 먹으면 졸릴 게 뻔하니 할만한 거를 찾다가 청년지원센터를 발견해서 컴퓨터를 좀 했다. 스터디 카페처럼 생겼는데 서울 청년은 무료란다. 닫히는 시간까지 지원서를 하나 작성해 제출했다.
21시. 고시원에 돌아와 라면을 끓였다. 라면은 무료란다. 2끼를 이렇게 먹으면 1000kcal긴 한데, 그래도 칼로리를 생각해 나중에 건면을 따로 사서 먹을까 생각했다. 한 끼는 사 먹고 한 끼는 라면을 먹을 예정이다. 부족한 영양은 혹시 몰라 영양제를 잔뜩 사두었다. 음식으로 먹는 게 좋은 걸 알지만 먹을 돈도 없고 먹기도 번거롭다. 처음이라 가스레인지를 다룰 줄 몰라 어버버하고 있는데, 내 앞에 라면 끓이던 사람이 다 끓이고 내 것까지 냄비를 올려주고 갔다. 타인은 지옥이 아닌가? 회사 다이어리를 받침대 삼아 젓가락이 없어 포크로 먹으면서 그래도 아직까지는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시.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하고, 오랜만에 밥을 먹어서인지 바로 졸려 꽤 오래 핸드폰을 했다. 어디서인지 모르는 방에서 계속 소리가 나서 집중이 안 되어서 더 핸드폰을 보기도 했다. 슬슬 다들 조용해지기도 해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을 봐야 할 거 같아 전자책을 봤다.
1시. 잠에 들었다.
4시. 모기 때문에 깼다.
5시. 잡고 다시 잠에 들었다.
10시. 기상했다. 근육통 때문인지 꽤 오래 잠을 잔 듯하다.
고시원 생존기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 '돈은 없지만 독립은 하고 싶어'로 깔끔한 디자인과 멋진 표지로 재탄생했습니다. 많관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