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게 된 나
1. 인턴까지 포함하면 직장이라는 걸 5개를 다녔습니다. 나이는 서른입니다. 정규직으로 일을 '제대로' 했던 건 2개네요.
2. 알바까지 포함하면 10개가 넘어가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아무튼 정규직 혹은 인턴, 수습이라는 딱지를 달고 일을 한 건 꽤 됩니다.
3. 일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는 거 같습니다.
학원에서의 아르바이트와, 교육기관에서의 단기 인턴은 애매한 사무직이 되는 건 지양하자.
언론사에서의 인턴은 조금 더 만들어내는 일을 하자.
홍보팀에서의 경험은 업무나, B2X에 대해서 확실하게 파악하고 입사를 해야겠구나.
가족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은 이런 데는 가지 말아야겠구나..
플랫폼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은 정말 소중했습니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일했고, 같이 일하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 집중했던 걸 놓아버렸을 때의 아픔 등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사실 아직도 스타트업뽕과 성장에 대해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자리가 3이라는 건 뭔가 사람을 옥죄게 만듭니다.
4. 한편으로는 세상 모든 게 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전문직이 아닌 문과로서, 회사원으로 10년차에 연봉 1억을 찍은 선배를 만났습니다. 개인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했습니다. 수익은 안 나는데, 동기들은 잘 나가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커리어'라는 거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듯 했죠. 좋은 학교뿐 아니라, 좋은 회사에 운 좋게 들어가고, 좋은 부서에 발령받아서, 좋은 사수를 만나 성장하고, 좋은 이직을 해야지만 커리어라는 게 생기는데 생각보다 더 어렵다고 했죠.
그 말을 듣는데 좀 민망했습니다. 찔렸달까요. 좋은 기회들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거에 몰두하다보니 여기까지 왔거든요.
2학년부터 직무경험을 쌓고 싶어 교육협회 인턴을 했고(여기밖에 없었으니까)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언론사에 지원해봤고
언론사 경험이 있으니 뭐가 있을까 하다가 홍보팀에 가게 됐고
스타트업 뽕에 취해서, 바닥부터 간다고 가족회사라도 지원했고
마침 브런치로 연락이 온 분과 일을 하게 됐습니다.
5. 조금 더 운이 좋았을 생각을 막 하곤 했죠
우리 학교에 스타트업 겨울 인턴이 있었다면? (그러면 스타트업 뽕이 20대 초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언론사가 아닌 아예 스타트업에서 인턴이나 계약직으로 마케팅을 했었다면? (2020년은 스타트업 붐이었을 때이니 어쩌면 로켓까지는 아니어도 기차 정도는 탔을까?)
홍보팀이 아닌 스타트업의 마케팅으로 들어갔다면? (실제로 2~3곳 정도는 면접을 봤습니다.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글 몇 자 적는 걸로는 마케팅팀에서 일할 역량이 되진 않았죠)
가족회사에 그냥 떨어졌다면?
최근에 나온 회사가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고 인원이 확충됐다면?
6.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그 앞선의 앞선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수능 점수를 조금 더 잘 받았다면? 과를 경영학이나 특수학과로 갔다면? 제 갈림길이 갈라질 수십만가지의 미래와 과거를 고민해보지만 공무원 부모 밑에서 공부에 지쳐 과 따위는 부모에게 맡겨버린 제가 선택할 선택지는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입니다. 정말 정말 더 앞선까지 갈까요. 부모님이 만화학원을 보내주셨다면? 내가 흥미를 느꼈다면? 우리 가족이 조금 더 오래 붙어 살았다면? 어떻게든 될대로 되라지 하며 공부했던 것과는 다른 미래를 골랐을까 싶은 겁니다.
7. 그래서 최근에는 많이 좌절했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했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때부터 쉴새없이 무언가 하며 달렸는데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30대가 되면 다르게 살 거야. 말했던 친구가 정말 다르게 살고 있는데, 저는 그러자고 하면서도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될 수 있는 길을 걸었습니다. 책을 읽고 기록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거 없이, 될 수 있을만한 일만 골라 했습니다.
8. 사람들이 말하는 '커리어'리는 건 저 같이 그때그때 최속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고른 사람이 아니라 정말 1년 2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노력하고 쌓아놓은 사람들이 가져가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은 결국 투자하고 소비한 만큼 그걸 애지중지하기에, 만약 제가 어떤 커리어의 기회를 가졌더라도 그걸 소중히 하지 못했을 거에요.
9. 지금 꽤 많이 좌절하고, 좌절보다는 조금 더 많이 노력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번 글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커리어라는 걸 쌓기 위한 최선과 최속의 선택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겠죠.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대체 뭐에 끌려 중화학공업의 영업을 하는지, 제약영업을 하는지, 개발자가 되는지, 회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최속과 최고 효율을 고민했고, 그걸 후회하는데 커리어도 똑같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2년짜리지만 후자는 30년을 봐야 하는데도 말이죠.
열망과 열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돈이 좀 생기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10. 그래서 20대를 잘 사는 방법에 대해서 적었던 글을을 거의 다 지웠습니다.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업계에 대한 부업이든, 대외활동을 하라고 적었던 글들을요. 그건 분명 최속과 최고효율은 맞지만, 그렇게 달려온 제가 4번째 취업을 고민하고 있잖아요. 만약 인간이 정말 고민하고 투자한 만큼 커리어를 애지중지한다면, 혹은 책임감과 생계를 위해서 커리어를 이어간다면 다음이 제 마지막 직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헤메기도 했고, 꽤 많은 직무를 거쳤고, 책임감과 생계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거든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