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은 죽기 위해 유럽에 가고
나는 더 잘 살기 위해 유럽에 간다는 것이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핸드폰에 미리 받아온 영상을 켰다.
'은중과 상연'이라는 OTT 드라마였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일부러 예고편을 전혀 찾아보지 않는다.
다른 이의 관점이나 시선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내가 느끼고 싶은 방식대로만 작품을 감상하고 싶기 때문이다.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래 글에 드라마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극 중 주인공이 암에 걸린 것이다.
심지어 기수가 높은 말기암이라는 설정이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의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여행 준비를 하는 과정과 공항 인파 속에서 나의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었는데,
하고 많은 드라마 중에 하필 다운로드 받아온 한 1개의 드라마가 암환자가 나오는 이야기라니.
우연일까, 필연일까.
배우의 연기가 어찌나 훌륭한지, 병색이 얼굴에 완연해 보였다.
극 중 인물의 신체적 고통과 죽음이 가까워올 때 느껴지는 두려움이
너무나 세세하게 장면마다 묘사될 때마다 내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꼭 그것들이 나의 고통과 나의 두려움인 것 마냥.
하지만 한 가지 분명 다른 사실은
나도, 드라마 속 인물도 모두 말기암 환자이고 유럽으로 떠나는 건 똑같지만
드라마 속 인물은 죽기 위해 유럽에 가고
나는 더 잘 살기 위해 유럽에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시간을 더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
남은 시간을 더 잘 살아낼 힘을 얻으려고 떠나고 있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프라하국제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13시간 남짓이라,
2차례의 기내식과 1차례의 간식이 차례대로 제공된다.
진단 후 나는 식단에 매우 신경을 썼었다.
막연하게 환자는 당연히 잘 챙겨 먹어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항암 중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백한 이유가 있다.
항암 중에는 일반인보다 필요로 하는 칼로리가 높다.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제는 정상세포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쉽게 피로해지고 근육이 손실될 수 있다.
또한 단백질을 매끼 잘 섭취해 줘야 면역세포가 원활하게 만들어져
항암 치료 중에 떨어지는 면역력과 체력을 잘 유지할 수 있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단백질이 풍부한 식단을 기내식에서 기대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겠으나,
몇 달째 항암 환자용 식단으로만 식사를 하며 지내다 보니 기내식이 영 잘 먹히지가 않았다.
'어떡하지, 13시간 비행하는 동안 식사 후에 챙겨 먹어야 할 약이 산더미인데.'
기내식에 함께 나온 과일과 빵이라도 남김없이 먹고 약을 입에 털어 넣어 물과 함께 삼켰다.
암환자의 인생 이야기가 처절하게 그려지는 줄거리의 드라마를 보고
적정 칼로리와 영양소를 채우지 못하는 식사를 하고
제대로 잠도 못 잔 상태에서
평소 먹는 대로 많은 양의 약을 먹으니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의 컨디션은 매우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장거리 비행은 확실히 나에게 무리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이미 떠나온 여행에서 도착하기도 전부터 여행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아프다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왠지 모르게 현실에 지는 것처럼 느껴져 분했기 때문이다.
흙빛이 된 얼굴을 한 나를 보며 걱정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간신히 참고 택시를 타고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을 내리 잤다.
나는 체코에, 프라하에 그렇게 힘겹게 도착했다.
제 삶의 한 순간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구도
[사진 출처]
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