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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Nov 03. 2020

사후세계

사후 49제 3편




-본인은 종교에 대해 절실하게 믿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각자맞는 종교가 있고 믿음이 존재하기에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게 맞다고 생각하며, 내 종교가 맞고 상대 종교가 틀리다는 논리로 정쟁을 하지 않는다.


새벽기도를 다니며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것과, 절에서 108번, 1000번의 절을하며 기도하는것은 신념에 따라 각자다르고, 같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사찰이지만 주지스님의 인자함과 꼼꼼함으로 세월을 함께 보낸 절에

20년이 다 되가도록 다니다보니 못보는게 없고 들리지 않는게 없을 정도가됐다.

절은 49제를 지내주기도 한다.

신도들의 가족이 찾아와 49제를 부탁하면 스님은 흔쾌히 허락함에 정성스레 49일동안 영가의 평안과 극락왕생을 기도해 주신다. 그러다 보니 믿지못한 일들도 생기게 마련…

그 대표적인 얘기 3가지를 하려한다.

그저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라 생각하고 불편없었으면…

(전해 들은 얘기, 가족에 직접 들은 얘기를 썼습니다.)












“엄마, 조금있다 아빠 오시면 우리 외식해요. 제가 맛있는거 사드릴게요.”

“그럴까? 그래 그러자 오랜만에 밖에서 먹자.”

엄마와 딸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싣고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살가운 딸은 엄마에게 팔짱을 끼고 연신 웃으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고, 저녁에 먹을 음식 얘기를 하며 잠시 멈춰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많이 힘들지 않아?”

“신참이 뭘 알아야 힘들다고 하지. 무조건 네~ 하며 달려가.”

“그래 그렇게 해서 일을 배우는 거지. 누군 태어나면서부터 일을 배우고 태어나니?”

“나도 엄마 뱃속부터!!!.......................”


 모녀를 향해 한대의 차가 돌진했다.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밑에 여동생이 오는 손님들을 챙기며 장례를 이끌고 있었고 남편과 두아들은 기계처럼 손님과 인사를 나눴다.

“죽었으면 내가 죽어야지 젊은 니가... 아직 꽃도 피지 못한 니가 왜죽어!”

멍하니 있다 갑자기 소리치고 쓰러지길 몇번... 염을 하러 오라는 소리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을때

“아파도 장례식 끝내고 아파해.” 

남편의 한마디였다.

같이있다 나만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딸애는 저리도 죽검이되어 누워있는데 어찌 원망하나 없겠나. 참고 참는 거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겨우 발을떼고 딸아이의 얼굴을 보러갔다.

입구에는 동생이 다니는 절의 스님이와 계셨다.

먼길 이렇게 와 주신 스님께 겨우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가슴이 떨리고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아이를 볼까!

내딸, 내사랑하는 아이야.

자는듯이 누워 있는 아이. 이렇게 이쁜데, 잠들어 있는거야.

“아니 아니야!!”

“언니 정신차려. 좋게 보내주자.”

부정하며 손을 휘젓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스님의 조용한 불경이 시작됐다.

모두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다.

자고 있는건 아닐까? 흔들면 일어나지 않을까? 아까워서 내딸 어이 보낼까…








1제 (7일)

마음 추스를 수도없이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우리의 시간은 멈췄다.

공장을 운영하는 아이 아빠는 그저 멍하니 담배만 피우는게 일이었고, 저녁이면 술을 먹어야 잠을 잤다. 집안은 그저 아무 소리도 들리지않는 암흑과도 같았다.

아들 둘, 딸 하나 낳아 무뚝뚝한 아들들과 달리 살갑게 굴며 착하기만 했던 딸인데, 이렇게 일찍 가려고 그렇게 많은 정을 주고 갔나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동생과 절에 가는길, 다리가 무거웠다.

결혼식도 못올린 아이.

스님께 49제를 부탁하고 일주일을 기다린 시간은 하루하루가 죽어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하지못했다.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그저 동생이 찾아와 같이 가자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가방하나 들고 걷기 시작했다.


법당에는 벌써 음식이 다 차려져 있었다.

마른 몸은 더말라 법당으로 가는 걸음이 휘청휘청했다.

부처님전에 기도가 시작되고 멍하니 부처님을 바라봤다. 왜 우리 아이가 이렇게 일찍 죽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비명횡사하듯 가야 하는지…

겨우 26살이었다.

동생과 스님의 불경이 들렸지만 따라 읽지 못했다.

영가전에 기도가 시작될때 영정 사진에 있는 딸아이의 모습에 눈물이 폭포수처럼 나왔다.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도 가슴에 엉겨 붙은 울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번 터진 소리는 더크게 나왔고 그울음에도 스님의기도는 계속됐다.

보고싶은 딸. 

딸아...


“보살님 많이 힘드시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스님의말에 아무말 할수가 없었다.

“많이 우세요. 괜찮습니다. 기도하다가도 울고, 밥 먹다가도 울고, 자다가도 울고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마음의 병을 이길수 있습니다. 참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울지 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스님은 울라 하셨다.

“다음주에 오실때는 좀더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뭐도좀 드시고해야 딸잘 보낼수있죠. 엄마가 쓰러지면 영가가 걱정 많이 합니다.”

 “그래 언니, 스님이 말씀하시잖아. 49제 끝 때까지 언니가 건강해야 00도 잘 갈거야.”

“네”

겨우 대답만하고 절을 나왔다.


‘장례식 끝나면 나도가마’ 했던 말이

‘49제 끝나면 엄마가 갈게. 기다려’로 바뀌었다.




2제(14일)

처음 1제를 지낼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울기만 했는데, 스님말씀처럼 잘 보내줘야 잘 갈거란 생각에 밥도 꾸역꾸역 입으로 넣었다. 맛도 느낄수가 없지만 그저 몸이 움직이길 바라며 먹었다. 49제만 무사히 끝나길…

남편은 같이 가자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법당에 가면 정말 딸아이가 죽은거같아 가기 싫다고... 보름정도 지났지만 남편도 말이 아니다. 연신 담배와 술로 시간을 죽이는 사람처럼 눈은 공허 어딜 보는지 알수없고, 눈의 초점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평소 그리 다정한 성격으로 잘챙겨 주던 사람이 등을 보이고 벽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는게 일이됐다.


“어서오세요. 보살님.”

평소처럼 스님이 맞아 주셨다.

첫날 왔을때는 보이지 않던 주변이 보이고 얼굴이 생각나지 않던 스님얼굴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방석에 앉고 스님의 불경이 시작됐다. 책을 보며 조금씩 따라했다.

영가기도가 시작되고 아이의 영정사진을 봤다.

준비하지 못한 사진이다. 뭘써야 할지 몰라할때 지오빠가 웃는모습이 마지막이었으면 한다고 고르고 골랐던 사진... 

저 사진을 찍을때 영정사진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스님 00가 좋은데 잘가고 있나요?”

1제때 아무 얘기도 없으신 스님께 오늘은 궁금하다며 동생이 먼저 물었다.

“좋은곳에 잘 가시라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49일 안에 심판을 받고가니 그동안 잘가라고 어머님도, 이모님도 저도 이렇게 빌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공이 어디 가겠습니까?”

인자한 미소로 말씀을 하시지만

혹시라도 죽은 이의 말이라도 듣고 싶어 찾아온 길인데, 아무말 없으신 스님이 서운하기까지 했다.

스님말에 동생은 더이상 묻지않고 고개만 갸웃했다.




3제(21일)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편도 같이 가겠다고 먼저 준비를했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그래도 혼자보단 엄마, 아빠 보고 싶을까 이렇게 둘이가니 마음이 한결좋다.


“어서오세요. 보살님, 처사님”(절에선 여자를 보살, 남자를 처사라 부른다.)

스님은 남편을 보고 반가워했다.

“잘 오셨습니다.”

스님의 기도가 시작되고, 2번은 해봤던지라 순서도 알고 스님을 따라 불경도 외웠다. 

남편은 그저 방석에 앉아 스님의 불경 소리에 귀기울이고 부처님을 바라봤다.

그도 나처럼 삶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영가전에 기도가 시작되고... 남편도 아이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도록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렸다.


스님의 차대접을 기다리며 남편을 봤다. 그새 눈이 빨갛게 퉁퉁 부어있었다.

“잘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남편을 보고 얘기했다.

“왜요? 왜, 형부를 기다리셨어요?”

그새 동생이 먼저 물었다.

“자식 잃은 심정 어디에 비할수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평생 그아픔 간직해야 하는데 그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스님말씀에 다시 눈물이 터질듯 남편이 헛기침을했다.

“00영가가 아버지 걱정을 많이합니다.”

모두 얘기를 더 들으려 주위는 정적이 되었다.

“아버지 걱정을 많이해 어디 가지도 못하고 아버지곁에 있습니다. 참 밝고 똑똑한 따님인데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고, 미련없이 가려하는데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말에 남편의 울음이 터졌다.

“보살님은 걱정을 덜 하는데 아버지하고 많이 친했나 봅니다. 여기 법당에 처음 온날부터 아버지 걱정을 그렇게 많이하고 슬퍼합니다. 갑자기 죽은 것도 원망스럽고 자신의 몸뚱이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된것에  충격이 큰데 남겨진 가족이 이리 힘들어하니... 너무 걱정을 합니다. 원래 죽은 영가들은 자신들의 고향도 보고 집도 가고 학교도 가보고 한번씩 다~ 둘러보는데 00영가는 그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 형부 거봐요. 00가 못 간다잖아요.”

동생이 나무라듯이 남편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스님”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간절하듯이 스님께 물었다.

“오늘 왜 오셨습니까?”

스님이 남편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네? 아 저... 그냥... 어제 꿈에 00가 나와서…”

“사진 보고 방에서 울고 담배만 계속 피시고…”

“네 맞아요. 스님. 형부가 그래요.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요.”

“그러지 마십시오.”

스님말씀이 무슨 의미를 포함하는지 알고있다.

하지만 지금 집에 갑자기 닥친 이 불행을 인정하고 아이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눈앞이 깜깜한걸 어떻게 표현할 수가없다. 잠을 자려해도 잠은 오지 않고, 술기운에 정신을 놔야 아침에 눈떠지는걸... 밥한술 뜨려해도 첫 걸음마부터 다리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않던 아이가 생각나 눈물인지 밥인지모를 짠기를 느끼는데…

지아빠 일하는거 힘들다고 퇴근하고오면 졸졸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그렇게했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부부여행을 보내주던 속깊은 아이였다.

혼내기 전에 자신이 알아서 다했던 보기도 아까운 자식... 내 자식 보내놓고 어떻게사나..

“처사님, 사셔야지요. 남은 가족은 어쩌겠습니까. 아드님들은... 보살님은요. 처사님이 기운을 내야 집안 식구가 제자리를 찾을겁니다.”









4제(28일)

동생은 일이 있어 못오고, 남편은 절을 다녀오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씩 일을 시작했다. 한달 정도 시간이 지나니 아이의 방에 들어가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올거란 생각에 급하게 벗고나간 옷이며, 화장대위에 쓰다만 화장품이 그대로 있었다. 처음엔 딸의 체취며 손길을 그대로 간직하고싶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엄마! 또 내방 들어왔지”하고 들어올것 같아 아이를 기다리다 잠들기를 몇날인가…


스님의 불경은 다른날과 다를바 없고,

한글자 한글자 스님을 따라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그래도 사진에서 웃고있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멈출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건 시간이 지나도 어쩔수 없는거 같다.

“마음 좀 추스르셨습니까?”

스님이 조용히 물었다.

“네…. 아니 아니요. 스님…. 시간이 지날수록 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들고 있던 손수건을 눈에 갖다댔다.

“원래 이별은 어렵습니다.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십시오. 남는사람도, 가는영혼도 헤어짐에 가벼울 수는 없습니다. 전생의 연으로인해 현생의연이 있고, 현생의연으로 인해 내생의 연이있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보고싶어요. 스님 어찌하면 좋을까요.”

엎드리다시피 하며 울었다. 이 감정 언제까지, 이 아픔... 칼로 내심장을 도려내는 이아픔이 언제까지 가야하나.

어느정도 진정이되니 스님이 찻잔을 앞으로 밀어내어 줬다.

“진정 좀 되셨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스님”

“아닙니다.”

주섬주섬 가방을싸서 일어나려했다.

“따님의 방은 아직 정리하지 마십시오.”

“네?”

일어서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49제이후 정리해도 늦지 않을거 같아서요. 보면 보고싶고 생각나는 맘은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느끼고 싶은건 살아서도, 죽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제(35일)

4제때 스님말씀을 생각해 아이의 방은 그대로 뒀다. 아무것도 건들지 않았고,

열심히 먼지와 방바닥을 닦고닦았다.


법당안에서 기도가 시작되고, 부처님을 보고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는 아무것도 보이지않고,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딸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프고 '왜 내딸이었는가'에 억울했다.

한달이 지났다고 억울함이 없어지는건 아니다. 평생안고 가야할 아픔이다.

하지만 그때는 '왜 나였는가'가 였고, 세상 모든 위로는 내게 타당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기도를 하니 딸아이의 죽음이 서서히 인정이되기 시작했다. 딸과의 좋은 추억이 생각나 미소가 지어지기도...

절실한 기도로 내딸이 좋은 곳으로 갔으면,

이 한몸 어찌돼도 좋으니 그아까운 젊음 다시 받을수만 있다면,


“스님, 이제 두번만 있으면 49제가 끝나는데 우리 00은 마음편히 잘 갈수 있을까요?”

“심성이 착해서 나쁜 곳으로 가지는 않을거 같습니다.”

“네 맞아요. 착해요. 착하고 이뻐서, 어찌 내속으로 낳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부모와 자식의 연은 서로 갚아야하는 인연입니다. 부모는 세상에 낳아놨으니 키워야 하는 공이 있어야 하고, 자식은 낳고 키워준 부모를 위해 봉양하고 효를 다해야 합니다.”

“갚아요?”

“따님이 태어나고서부터 얼마나 많은 웃음과 행복이 있었습니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힘든일도 힘든줄 모르고 살았지요? 자식은 자라면서 부모에게 많은 행복을 줍니다. 거기에 다치거나 아프면 심장이 덜컹거리기도 하죠."

“네, 그애 웃음만으로 피로가 달아날 정도였어요.”

“따님은 부모님 만나서 사랑받고, 이쁨받고, 행복해했지요?”

말없이 끄덕이는 보살을 보고 스님은 계속 말을이었다.

“어느 부모와 자식은 서로 죽이기도 합니다. 속을 썩여 부모 애간장 다 녹이기도 하죠. 또 어느 부모는 자식 제대로 키우지 않고, 방관하고 학대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살님과 따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깐의 인연이라도 삶의 기쁨을준 따님 아니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영가방에 가시면 침대밑에 뭐가 있는거 같습니다. 한번 열어 보십시오.”

“네? 침대요?”

스님은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6제(42일)

길게만 느껴졌던 49일의 여정이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

떼를쓰며 잡고 싶지만 그건 나만의 욕심이란걸…

부처님기도가 끝나고 영가기도를 시작할때 사진을 다시봤다. 그곳에 웃고 있는 딸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 사진을 법당에 올려놓을 때도 그 웃음이 슬프게 보였건만 지금은 웃는 얼굴은 평소와같이 내게 보여주는 웃음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보살님.”

스님이 찻잔에 물을 따르며 말을 건넸다.

“스님, 세상에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소름이, 와”

자리에 앉자마자 동생은 속사포처럼 쉴틈 없이 얘기했다.

“언니가 스님 말씀을 듣고 침대 밑을 봤는데, 세상에 세상에 거기에”

“뭐가 있었습니까?”

스님도 궁금한지 물었다.

“며칠전이 형부 생일이었는데, 이런일이 있는데 무슨 생일이에요. 그냥 가족이 아무말하지 못했죠. 미역국도 끓이지 말라고. 형부가.”

“스님 말씀에 집에 가자마자 침대밑을 보니 상자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남자 구두 한켤레가 있었어요.”

급한 맘에 동생대신 말을했다. 어떻게 알고 스님이 침대밑을 보라고 했는지…

“누구의 구두였습니까?”

“애 아빠요. 거기에 편지도 있었어요. 아마 생일날 주려고 준비했던 모양이에요.”

그때 그구두를 발견했을때 남편과 얼마나 눈물이 났던가... 마지막 선물이될지 알고 미리 사서 넣어놨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군요.”

스님은 이해한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스님?”

동생은 못참고 스님께물었다.

“영가가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침대밑을 봤으면 했어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으로 미련을 너무둬서 말씀드렸더니. 아버지 생신 선물을 미리 준비했던 거군요. 참 딱합니다.”

“저렇게 갈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선물은 줘야겠고 전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동생이 눈물을 흘렸다.

“애 아빠도 신발 보고 많이 울었어요. 아까워서 어떻게 신고 다니냐면서…”

“영가님이 사랑을 많이받고, 또 주고 가는군요.”

스님말씀에 동생과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쁜 내아가.

"다음주에 오실때는 영가가 제일 좋아했던 옷과 신발 좀 준비해 주십시오."

"아. 태워 주시려고요?"

동생이 아는 체를 했다.

"많이 갖고 오셔도 무거워서 영가가 못갖고 갑니다. 평소 좋아했던 옷한벌, 신발 한켤레면 족합니다."

"알겠습니다."








7제(49일)

두 아들, 남편도 왔다.

하루전 잠이 오지 않아 00의 방에서 한참을 앉아있다 나왔다.

이승을 떠난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모든게 그대로인데...

남편은 검은 정장을 입고, 00가 사준 구두를 신고 왔다. 아빠 잘 있다고, 걱정말라고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쇼핑백에 고이 접어 흰 꽃무늬 원피스와 베이지 구두를 넣어뒀다.

한참의 기도에 두 아들은 울었다. 

처음보는 광경에 자기 동생이 이세상에 없음을 인정하기싫어 가자고해도 오지않았던 절이였다.

마지막은 다른제와 달랐다.

삶과 죽음의 갈림을 인정하고 싶지않았고,

지금은 내딸의 영혼이 사라짐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아이 만날 생각에 버티고 버텼는데, 이제는...


"보살님, 처사님들... 가족을 보내는 마음, 그 아픔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현생에 피로 맺어진 인연, 이별의 아픔이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오래 머물다 가는것도, 짧게 머물다 가는것도, 보내는 마음도, 가는 마음도 다  업 입니다. 보살님 부디 나쁜 마음먹지말고, 기운 내십시오."

스님이 합장을하며 나를보며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들은 남편과 두 아들은 의아하단 표정으로 나를봤다.

"네?"

"혼잣말로 '곧 따라가마' 하셨습니까?"

머리를 한방 맞은것처럼 띵했다.

"나도 모르게 내뱉는 말에 영가는 가슴을 치고 울었습니다. 그런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49제안에는 영가에 대한 좋은 얘기만 해야하고, 잘 보내드리려 49제 천도재를 하는데, '나도 가야지 나도 가야지' 하면 영가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엄마!" 

두 아들은 스님말씀을 이해하고 놀래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업(業)이고, 명(命)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영가님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엄마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둘이 같이 죽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하냐고."

스님말씀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렀다. 옆에서 남편은 연신 한숨을 쉬고있다.

"두 아드님들, 어머니 아버지 잘 보필하셔야겠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스님이 아들을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보살님은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절에 자주 오셔서 기도 많이하십시오."


밖으로 나와 딸아이의 옷과 신발을 태웠다. 흰 연기가 하늘을 향해 쭉 뻗어가고 있었다.


그날저녁

흰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딸이 다가와 나를 살짝 안았다.

너무나 따뜻한 기운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꿈에서라도 나타나라 했지만 한번도 보이지 않더니 지금에야 보여지니..딸은 아무말 하지 않고 잠시 나를 쳐다보고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아이를 잡으려 손을 휘져었다.

"가지마, 가지마!"

눈을 떠 딸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꿈이였다.

49일동안 한번도 꿈에 보이지 않던 아이가 오늘 내게와 나를 안아주고갔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도 이쁜 내 딸...


내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49제 얽힌 이야기 총 3편을 이었습니다.

그저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라 생각하고 불편 없었으면 합니다.

(전해 들은 얘기, 가족에 직접 들은 얘기를 썼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슬피 울고 괴로워했다.”

-티벳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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