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소득 3만불 시대라지만 우리 사회 곳곳을 살펴보면 갈등과 대립은 깊어만 가고, 패륜과 범죄 또한 날로 극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려는 법과 제도만으로는 암울한 세태를 바로 잡아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다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해법은 없을까?
나는 ‘집다운 집’부터 바로 세우는 데서부터 구체적이고 세밀한 변화를 모색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집이 바뀌면 사람의 성정도 바뀌며, 그렇게 사람의 몸과 마음이 바뀌어야 비로소 삶이 바뀌고, 나아가서는 세상도 밝고 건강하게 바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다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상미 시인의 경우를 보자.
"언제나 그 집이 그립습니다.
대청마루 한 켠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가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읽어 내리시던 아버지
토닥토닥 싸우면서도 동생과 함께 듣던 모차르트,브람스,차이
코프스키의 비창이, 김민기의 노래가
뭐든지 숨길 수 있고 그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지 타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던 집이,
집안의 집이, 우리 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에서 나는 삶의 계율을 익혔습니다.
동그랗게 깎인 사과의 심장을 맛보았습니다.
불가사의한 가족의 현, 그 나긋나긋한 갈등들을 호흡했습니다."
시인의 '그 집'을 보면, <집-사람-삶>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시인은 그 집속에서 삶의 계율을 익혔다 했으니 집은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 다름 아니었으며, 갈등을 곰삭히며 삶속의 은은한 여유와 온유한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족의 성전이었음에 틀림없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 집속에서 삶의 심장을 깊이 맛볼 수 있었다 했으니, 그의 풍부한 감성과 인성교육은 집에서 거의 다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시인의 심상 또한 처마 깊은 건축의 형상을 그대로 닮아, 가족 간의 갈등을 포용하고 화해할 줄 아는 지혜도 자연스레 익혔으리라 여겨진다.
'대청마루 한 켠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와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읽어 내리시던 아버지'의 그 자리, 그 디테일한 풍경과 무언의 대화만으로도 아름다운 삶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자연스레 터득했을 법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손때 묻은 기둥이나 대청마루에 살을 맞대고 가족의 따뜻한 온기와 편안한 휴식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평화와 고요 속에 성품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의 집은 삶의 진실, 그 행복과 지혜를 일깨우는 일상의 도량이었으며 나긋나긋한 현 소리처럼 늘 되살아나는 추억의 사원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시인의 8할을 다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집은 실로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 그런 집에서라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부로 굴렸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유추하건대 우리 모두가 ‘집다운 집’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쉽게 분노하고, 신경질적이며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더불어 사는 맛도 모른 채 각박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요즘 힐링이 대세라지만 그 현상의 이면을 살펴보면 집은 곳곳에 차고 넘쳐도 정작 ‘집다운 집’이 그리 많지 않다는 증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집다운 집’이라면 일상이 곧 힐링일 터인데 집 놔두고 돈 들여가며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난리법석을 떨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고백했듯이 이젠 집이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고 할 만큼, 겉멋에 집착한 집을 짓기보다는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지어야만 한다. 집 안팎 구석구석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 소중한 인연을 보듬어 가며, 그 안에서 주거의 기쁨을 듬뿍 누릴 수 있는 집. 공간 속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뉘여, 갈등을 화해로 요리해 낼 수 있을 만큼 내공을 지닌 집. 이제부터라도 그런 집부터 바로 세워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궁극에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