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장려와 우아가, 또 무슨 자욱한 안개처럼 서린 우수나 애상 같은 것들과 함께 저항할 수 없는 견인력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었다.... 잠시만 침묵해도 이내 회복돼 버리는 무거운 정적과 그을음 낀 회벽, 그리고 기다림으로 이십 년이래 한 번도 잠긴 적이 없는 대문 같은 것들에 그런 우수와 애상이 서려 있었다."(이문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문열은 폐원의 정경을 통해 정적, 우수, 애상을 말한다. 정적이 남다르게 느껴졌던 것은 집주인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서, 유년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되살려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 집은 장려하고, 우아했으며, 잠시만 침묵해도 무거운 정적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집과 정원만이 스러져 가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가치도 함께 잃어가고 있다는 아픔을 말하고 있다. 추억의 적멸보궁! 다 거덜 내고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한 가치를 깨닫는 우리네의 아둔함이 참으로 서글프다. 폐원은 저렇게 서서히 그 자취마저 허물어져 가고 있지만, 폐허의 미학에 매료되어 그 침묵의 정취에 감상적으로 빠져들 수만은 없다. 오늘 우리가 사는 집 속에서 정적의 의미와 가치를 따져보는 것도 시급하기 때문이다.
도심 속 거리를 걷다보면 적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 자동차 매연, 무질서한 주차, 저돌적인 모습의 건물들이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곳곳에 우리의 삶을 거리로부터 소외시키는 배타적인 공간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다, 우리 모두 조그만 자극에도 금방 터질 듯한 폭탄 하나쯤은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다. 집안에 들어서도 자극이 그치지 않는다면, 가슴속의 폭탄을 어찌 내려놓을 수 있을까. 집안의 불화는 사람 사이의 갈등 탓도 있겠으나, 집이 갈등을 부추겨 편하지 못한 데 연유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상이 온통 번쩍거리고 화려함을 지향해 가고 있는 세태를 가로질러, 집은 오히려 투박하고 소박한 구석을 그만큼 더 만들어 나가야만 하지 않을까. 여기저기서 빠르고 커다랗고 소란한 세상이 되어갈 수록 집안은 더욱 더 느리고, 더 큰 침묵을 담아내어야만 하지 않을까. 종교 시설조차 떠들썩한 바깥세상의 세태를 쫓아가는 마당에 집까지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진정으로 어디에서 쉴 것인가? 우리의 지치고 힘든 영혼을 달랠만한 깊고 무거운 정적은 우리 시대 집이 담아내어야 할 성스러운 가치가 아닐까?
어쩌면 도시인들에게 정적은 낯설거나 무겁고 견딜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이 서로 길들여지기 나름 아닌가. 쫓기듯 살아가다 어느 날 우연히 컴퓨터, 냉장고 같은 기계 소음조차 완전히 소멸된 절대 정적의 공간에서 묵상을 해본 이들은 잘 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깊은 허공 속에서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내면적인 영토를 얻어 그 안에서 더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정적 앞에 진실로 자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정적의 시계바늘은 이내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익숙해지기만 하면 정적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은총을 베풀어, 그 순간 집은 성전이 된다. 정적이 깃든 성전 속에서는 귀담아 들을 수 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포도 알 구르는 기념비적인 소리를. 그 우주의 소리를!
“절 문밖에는 언제나 별들이 싱그러운 포도밭을 이루고 있었다.
빗장을 풀어놓은 낡은 절간 문 위에는 밤새도록 걸어온 달이
한 나그네처럼 기웃거리며 포도를 따고 있었다.
먹물처럼 떨어진 산봉우리들이 담비떼들 같이 떠들며 모여들고
따다 흘린 포도 몇 알이 쭈루룩
산창을 흘러가다 구슬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송수권의 ‘정적’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