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있어도 서럽지 아니한가?*
모두가 건강한 몸, 아름다운 몸매를 만드느라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네 집은 네 큰 몸”이니, 몸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라면 집도 좀 잘 보살펴야 할 터이다. 하지만 그 큰 몸을 정작 화두로 떠올렸던 적이 있었던가? 대출 받아 집 장만하기. 아파트 평수 늘리기. 임대소득 올리기. 프리미엄 받고 분양권 팔기..... 웬만한 이들이라면 이런 정도 재테크는 해묵은 상식처럼 되었을는지 모른다. 집을 수단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이들은 많아도 정작 건강하고 좋은 집짓기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보기 드문 것 같다. 골목마다 빼곡이 집을 그리 많이 지어도 집다운 집이 드물 수밖에 없다.
요즘 들어 아파트 리모델링이 한창이지만 사정이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다. 엄청난 돈을 들여 인테리어는 점점 더 번지르르해 간다. 하지만, 거실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디자인 손길이 채 닫지 않은 앞 동 뒷모습을 스산하게 바라다보아야 한다. 세대간 소외현상은 날로 더 심화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맛이 없는 것 또한 여전하다. 자연, 세상, 인간이 서로 등져있는 ‘불화의 공간 구조’는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세대마다 호화스런 인테리어 장식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 휘황한 샹들리에 휘황한 저 아련한 베르사이유 궁의 저 아련한 추억 ! /바닥에는 카펱 벽에는 타펱 그 위엔 거대한 베라스케쯔 그 곁엔/ 거대한 거대한 평양감사행차도(平壤監司行次圖) 그 밑엔 거대한 거대한 거대한 유리장속의 고려자기/ 곁에는 멕시코 소라 곁에는 자수정 곁에는 잉카의 석인(石人) 곁에는 탈/ 신할아비탈 능(能)탈 문둥이탈 풀치넬라탈, 삼현육각 곁에는 리라, 첼로, 하아프/ 곁에는 왕조시대의 은은한 자개의 가지가지 패물함 곁에는/ 로코코식의 검은 접는 꽃부채/ ....” (김지하, 불귀)
70년대 부패로 물들은 고관대작의 집안 풍경을 김지하 시인이 스케치한 대목이다. 놀라운 일이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네 중산층 집안 모습이 그대로 닮아가고 있지 않은가? 허긴 값비싼 가구들을 집안에 지니고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불협화음, 공간과의 불행한 동거가 보기 민망한 것이다. 먹고 살만하다는 과시욕으로 충만해 있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럽고 허전한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이들은 TV를 켜고 드라마든 ‘러브 하우스’**같은 프로그램을 유심히 살펴 보라. “건축=실내장식”인 것처럼, 좋은 집은 인테리어만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왜곡된 진실을 화면발 위세를 앞세워 대대적으로 유포하고 있지 않은가? TV 속 집안 풍경이 “어머!” 하며 안방을 자극한다. 누구든 셋방살이 서러움을 견디어내고 기어이 다다라야 할 꿈 같은 그림으로 뇌리에 박힌다. 그렇게 TV는 남부럽지 않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집의 근본을 묻지 않고, 껍데기의 화려한 변신만을 부추기고 있다. 벼보다는 피가 억센 법이던가.
"하늘로 날아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 일정한 깃을 두고 돌아오거든! 어찌 설지 않으랴, 집도 없는 몸이야!"( 김소월, “제비”)라고 노래했던 소월의 허기진 시대는 지났으나, 우리는 이제 집이 있어도 서럽다. 배고팠던 시대에는 그나마 집을 갈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했건만, 어느새 껍데기가 알맹이를 자처하는 세상이 되어 서러운 줄조차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닐까 ?
* 이 글을 처음 썼을 때가 2002년. 20년이 지난 지금, 그 사정이 그리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없다.
** 2000년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집관련 TV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