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억중 Jan 29. 2023

점례의 경우



전공 탓일까. 나는 소설을 읽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다는 공간과 더불어 펼쳐지는 주인공의 남다른 삶에 더 큰 관심을 두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보면 대수롭지 않은 대목에서도 필이 꽂혀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내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이를테면 한승원의 '해산 가는 길'에 나오는 점례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녀의 삶은 이름만큼이나 촌스럽고 칠칠맞아 보일지 모른다.

 

"점례는 우물가에 피는 하얀 치자 꽃에다 코를 대고 걸신들린 귀신처럼 시금하면서 산뜻한 향기를 맡곤 했다. 아침노을이 떠오르고 일찍 깨어난 참새들이 지저귀고, 꽃이 흐드러지고 벌들이 잉잉거리면 가슴이 두근거려지곤 했다. 저녁노을이 질 때 새들이 둥지를 찾아 날아들면 슬퍼 울었다." 


집 바깥에서지만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삶은 하루 종일 움직이는 태양과 밀접하다. 특히나 그녀의 미묘한 감정 변화는 아침에서 저녁까지 생성하고 소멸하는 다채로운 햇빛의 기운과 무관치 않다. 소설의 다른 장면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그녀의 하루는 온 세상에 흰 가루처럼 쏟아지는 새벽 달빛의 서늘함으로 시작하여, 슬프고 장엄한 음악이 흐르듯 저녁노을의 따뜻함으로 마감된다. 그 빛깔에 따라 한기와 온기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그녀의 순수한 감수성이야말로 매순간 충실한 삶의 에너지원인 셈이다.  


점례의 삶이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녀처럼 태양의 은총을 느끼며 살아가려면 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하는 의문이 스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햇빛을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그 축복을 가득 담은 집이 마음속에 그려진다. 밝게 비친 동창에 대나무 그림자가 비치고 이슬 머금은 목소리로 새들이 우지지면 감각도 부스스 깨어 일어난다. 그렇다면 침실을 동쪽에 배치할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스러져 가는 태양이 세상에 마지막 남아 있는 체온을 뿜어내는 시간에 채 가시지 않은 햇살의 온기를 느껴가며,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하루를 되새기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실을 서쪽에 배치해 보면 어떨까? 이렇게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태양의 운행을 평면구성에 대입시켜보면 결국 동-서향집이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꼭 남향집을 고집해야 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태양의 운행에 따라 공간이 긴밀하게 대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남쪽을 향해 서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터. 


하지만 아파트 분양 광고지를 들여다보면 거의 예외 없이 '전세대 남향배치‘를 커다란 장점으로 내세우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집은 반드시 남향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기대어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문구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각 세대별로 남향 배치공간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를 냉정하게 살펴보면 전체 공간의 50%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나머지 공간은 직사광선 한 뼘도 들어오지 않는 우울한 북향 방들이다. 그나마 거실과 방 3개가 남쪽으로 배치된 4베이(bay) 아파트의 경우, 다소 사정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다. 긴 막대처럼 생긴 아파트동들이 남쪽을 향해 줄지어 서있을 뿐, 각 세대는 판에 박힌 광고내용만큼 남향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게다가 같은 단지 안에 동-서향 아파트의 경우도 비뚤어진 대지 형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려 앉힌 것일 뿐, 남향 아파트와 다르지 않다. 태양의 운행을 제대로 고려한 동-서향 아파트라면 남향의 경우와 달리 세대공간의 동-서간 길이를 늘이고 방의 폭을 좁혀 공간의 깊이를 취하다보면 평면구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태양의 고도가 낮아 눈살을 찌푸릴 만큼 날카로운 서향 빛을 적절히 차단할만한 발코니나 그릴 같은 시설이 보완되어야 하는 동-서향 아파트는 그 외관도 남향 아파트와 근본적으로 달라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같은 단지 내, 향이 서로 다른 아파트의 평면이나 외관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햇빛의 가치와 미학에 대한 정교한 사유의 과정을 결여한 채 설계되어 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향이야 어떻든 햇빛만 들어오면 그만이라는 식의 안이한 생각에 정작 태양이 선사하는 은총과 삶의 축복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해온 셈.

 

그렇다면 어느 누가 '태양의 처녀' 점례의 삶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쉽사리 폄하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녀만큼이나 태양의 리듬을 따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되물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집을 짓더라도 햇빛의 이치를 잘 다스려 주거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 곧 팔푼이 점례가 일깨워준 생생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아파트, 그 천편일률적 미완의 풍경이 바뀌려면 점례의 경우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그대의 집은 그대의 큰 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