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따기, 택시호출

by 빈성

회식이 두려운 나의 아버지


“아들, 나 30일에 회식 있는데… 그날 약속 있니?”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흔히 있는 부자지간의 대화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내가 서른 살을 넘긴 이후로 아버지가 내 스케줄을 묻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몇 분 뒤, 아버지는 본래의 의도를 드러내셨다.

“혹시 택시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돼?”


그제야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약주를 하시는 날이면 내가 종종 어플로 택시를 보내드렸던 일이 떠올랐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나라도 집에 없는 날은,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이 아버지에겐 걱정거리였나 보다.

물론 택시 호출을 위한 어플 사용법을 알려드린 적은 있으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탓에 매번 잊어버리신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런 부탁을 하기에 앞서, 어색한 방법으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신 것이다.


택시를 대신 불러드리는 일은, 나에겐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만은 아니었기에 어플 사용법을 다시 설명해 드렸다. 하지만 나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몇 번을 가르쳐도, 결국 또 잊으실 거라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그러면서도 아들로서 도와드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일상에서 느끼는 부담감이 서로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세대 간 갈등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젊은 세대는 몇 번의 터치만으로도 택시를 호출하고, 음식을 주문하며, 일상을 효율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은 어르신들에게는 점점 더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주는 이점은 그들에게 마치 하늘의 별 따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기술의 속도는 늘 앞서 가지만, 어르신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 나 또한 버거울 정도니 말이다. 배우고도 금세 까먹고, 다시 배워야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자신감을 잃는다.




늦은 밤, 할머니의 외로운 손짓


어느 겨울 늦은 밤, 지팡이를 짚은 한 할머니가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몇 분이 지나도 택시는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예약'이라고 적힌 택시뿐만 아니라 '빈차'라고 적혀있는 택시마저도 마치 이미 태울 승객이 정해져 있는 듯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손짓을 해보아도, 다시 또다시. 그러나 그 손짓에 응답하는 차량은 없었다. 외로운 손짓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 나는 내가 탈 버스를 보내고, 택시를 잡아 할머니를 태워드렸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마음은 계속 무거워져만 갔다.


할머니께 택시 호출 어플을 알려드렸더라면 좋았을까? 아니,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사회와 어르신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간극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효율을 중시하며,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나아가지만, 그 속도에 뒤처지는 이들은 잊히고 있다.


별이 되지 않기를


아버지가 택시를 잡는 일, 어느 할머니가 늦은 밤에 귀가하는 일, 이런 평범한 일상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느껴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기술을 발달시켰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나은 삶인가를 돌아보아야 필요를 느낀다.


다음에 아버지가 택시를 호출하려고 내게 물어보신다면, 나는 단지 사용법을 가르치는 대신 함께 택시를 잡는 일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할머니가 또다시 늦은 밤에 길가에 서 계신다면, 나는 그분이 별을 따는 대신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보태보려 한다.


어르신들이 겪는 불편함과 외로움에 공감하며 그 순간에 함께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 그들이 소외되지 않고 누군가의 관심과 배려를 받는 중요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하고 싶다.


정답은 없지만, 공존하는 사회란 그렇게 서로의 손짓에 응답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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