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을 함께해 준 소중한 친구를 소개합니다
얼마 전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요구사항을 또박또박 전달했다. "아빠! 동생 낳아주세요. 나 동생이랑 놀고 싶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들의 요구에 나는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둘은 어떻게 키우냐고 일찌감치 둘째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외동으로 살아가야 할 진헌 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내심 아이가 중학생 정도로만 성장해도 동생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친구들을 사귀게 될 거라 믿었다. 그 생각의 한편에는 같은 지역에 살아도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든 나와 동생의 관계가 있었다. 주말부부인 나는 주중에만 시간이 났고, 부장 업무에 육아까지 담당해야 하는 동생 입장에서 주중에 시간을 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같은 대구 땅에 살고 있어도 만날 수 없다.
동생과는 각자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리 형제가 자주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우애가 깊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온 동네를 함께 뛰어다녔고, '배트맨과 로빈'처럼 늘 붙어 있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자고, 매일 함께 밥을 먹고, 가족 여행에서도 함께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어울리는 친구가 바로 내 동생이었다. 같은 부모님을 두었다는 것만큼 진귀한 인연이 어디에 있겠는가.
돌이켜 보니 유년 시절에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는 바로 내 동생이었다. 동네 골목대장을 도맡았던 내 옆에는 늘 동생이 서 있었다. 오락실에서 격투 대전 게임으로 명성(?)을 날렸을 때도 늘 동생은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도 동생을 좋아했지만, 동생 역시 나를 좋아했다. 누군가 내 동생을 괴롭혔다거나 때렸다는 말이 들리면 바로 달려가서 응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와 동생은 서로에게 애틋했다. 한 번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 중학생 형에게 맞은 적이 있다.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이었다. 만화책을 빌려 달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갑자기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욕을 했다. 이유 없이 맞은 것이 서러워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하필이면 내 사연을 들어줄 부모님 모두 부재중이셨다. 대신 동생이 집에 있었다. 동생은 누가 우리 형을 울렸냐며 흥분을 했다. 큰 기대 없이 중학생 형에게 맞았다고 밝혔다. 당시 4학년에 불과했던 동생은 당장 싸울 기세로 주변에 있던 몽둥이를 쥐고 그 형이 살았던 집으로 달려갔다. 사실 그 이후의 일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형제는 용감했다 식의 결론이었는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중학생 형을 상대하겠냐며 서로의 분을 삭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기억이 난다. 누가 우리 형을 때렸냐며 화를 내던 동생의 눈빛 말이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동생에게 부끄러운 형이었다. 모범생이었던 동생은 공부도 잘했다. 부모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동생은 크게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사고는 늘 나의 담당이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을 할 때마다 동생 역시 형제라는 이유로 같이 체벌을 받았다. 겁이 많던 나는 회초리를 한 대씩 맞을 때마다 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때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며 빌었다. 반면에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이빨을 꽉 깨물고 꿋꿋하게 매질이 끝날 때까지 종아리를 내밀었다. 같은 부모님의 유전자를 받았음에도 우리 둘의 기질은 이렇게 달랐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주말에 동생을 데리고 낚시터에 나들이를 가신 적이 있다. 나는 부모님 몰래 오락실에 가겠다는 불순한 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남은 용돈을 모두 들고 오락실에서 실컷 놀았다.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을 오락실에서 보냈음에도 사람의 마음은 간사했다. 아버지의 감시망이 없다는 생각에 오락실에서 더 놀고 싶었다. 하지만 용돈은 이미 다 떨어지고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의 눈에 어머니의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우둔하게도 어머니의 지갑에 몰래 손을 댔고,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곧바로 들켰다. 낚시 나들이 후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크게 실망하셨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며 엄명을 내리셨다.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나는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다. 당시 부모님의 기세는 정말 나를 이 집에서 쫓아낼 기세였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유일한 보금자리인 집에서 쫓겨나면 나는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막막한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나의 애걸복걸에도 부모님께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하셨다. 특히 사연의 끝자락까지 가서는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셨던 어머니께서도 나의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하며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바깥으로 나가려던 찰나 동생이 대성통곡을 하며 부모님께 무릎을 꿇고 빌었다. 형이 없으면 안 된다고, 형 쫓아내지 말라고, 앞으로 형이 절대 엄마 지갑에 손 안 대도록 옆에서 잘 지켜보겠다며 부모님께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울면서 사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내 눈에도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형제가 같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께서는 동생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날 나와 동생 모두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아마도 불을 끄고 잠을 청하기 전 어색하게라도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동생에게 못된 짓도 참 많이 했다. 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백 번을 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실수로 장독대를 깨뜨린 적이 있다. 외할머니께서 누가 장독을 깨뜨렸냐고 동생에게 물었고, 동생은 솔직하게 형이 깨뜨렸다고 했다. 동생이 고자질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나는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쥐어 팼다. 초등학생일 때만 하더라도 나와 덩치 차이가 났기에 동생은 꼼짝없이 나에게 얻어맞았다.
그때뿐인가. 대학생이 된 우리 형제는 8년 만에 대구에서 같이 자취를 하며 함께 살게 되었다.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공간에 거주하면서 전혀 동생을 배려하지 못했다. 청소나 설거지와 같은 궂은일은 동생에게 시켰고, 컴퓨터 또한 늘 내가 독차지를 했다. 같이 자취를 하며 동생에게 부끄러운 짓을 많이 했다. 형으로서 양보와 배려를 하지 못했기에 동생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급기야 부모님께서도 형제간의 우애를 위해서 자취 집을 하나 더 잡아야 하나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돌이켜 보아도 나는 나밖에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형이었다.
나와 같은 시기에 교직 생활을 시작했던 동생은 뒤늦게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군대에 가게 된 동생이 무척 안쓰러웠다. 입대 전 맛있는 거라도 많이 먹이고 싶은 마음에 술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동생은 정말 생뚱맞은 표정으로 입대 전까지 바쁘다고 답했다. 평소에 잘하지도 않던 형이 갑자기 웬 친절이라는 표정이었다. 동생 입장에서 입대 전 한정된 시간 속에서 형에게 쓸 시간은 없던 셈이다. 당시에는 동생이 무척 괘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저지른 업보였다.
동생이 군 입대를 하며 우리는 떨어지게 되었다. 동생이 입대하는 날이 우리가 같은 이불을 덮고 잤던 마지막 날이 되었던 셈이다. 이후 시간이 흘렀고 나와 동생은 각각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다. 소중한 사람들 중에는 동생도 있다. 한 번씩 동생이 보고 싶고 그립기도 하다. 가끔 동생에게 전화를 걸면 그 역시 반갑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준다. 그런데 내가 동생에게 먼저 전화를 하는 횟수가 훨씬 더 많다. 내심 동생에게 '꼭 형이 먼저 전화하게 만든다'라며 서운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그에게 잘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간사해서 나에게 불리한 것을 쉽게 잊어 먹는다. 늘 형이 먼저 전화하게 만든다는 서운함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동생에게 저지른 실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변 어른들로부터 결혼 후 각자 가정을 꾸리다 보면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 관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실제로 주변을 살펴보면 형제 사이가 좋지 않은 집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예 인연까지 끊고 명절 때조차 왕래하지 않는 형제들도 있다. 대부분 '돈'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혹시 물려주실 유산 있으시면 전부 동생에게 줘도 된다고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다행히 우리 형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딱 당신들의 노후에 필요한 생활비만큼의 재산만 있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상 밖의 문제로 동생과 갈등이 발생했다. 자식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나와 동생의 성향이 다른 만큼 아들과 조카의 성격도 완전히 달랐다. 아들은 아빠인 나를 닮아 거침없이 행동하는 편이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조카 입장에서는 동생인 아들이 부담스러웠으리라. 아들이 조카에게 잘못을 했고, 나와 동생은 자녀가 문제 행동을 했을 때의 대처 방식이 서로 달랐다.
우리 부부와 마찬가지로 동생 부부도 교직에 몸을 담고 있다. 각자 자녀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분명하다. 그런데 상대의 교육관이 다른 것이 아닌 틀렸다고 생각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것을 강조하는 우리 부부와 달리 동생 부부는 규율을 지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할 수는 없지만 두 관점이 달랐다. 넓은 마음으로 자식 교육에 대한 동생의 훈수를 듣고 싶었지만, 아들의 실수를 지적하는 불편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동생 가족 또한 불편해졌다. 섭섭함이 쌓이면 어떻게든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그런 못된 마음을 적어도 동생에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사이가 나쁜 형제 사이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섭섭함이 쌓였고, 어느 순간 울컥한 감정까지 올라왔다. 섭섭함이 혐오의 감정까지 전이될까 봐 두려웠다. 용기를 내어 동생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긴 시간 동안 통화하며 솔직하게 나의 상황과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고 쌓였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아무래도 동생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발생하는 일이다. 적어도 동생과 1년에 한 번 정도는 단둘이서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우리 둘 모두 육아와 직장 생활로 인해 바쁘다 보니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다. 물론 아무리 바쁘더라도 중요한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지금 누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동생과 통화를 마무리하며 올해 꼭 한 번은 둘이서 식사를 하고 싶다고 강조를 했다.
그는 나의 오래된 소중한 사람이면서 앞으로도 진행형이 될 친구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형제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에게 내가 저질렀던 미안함을 생각하면 평생 그가 나를 섭섭하게 해도 괜찮다. 매번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일방적인 사이여도 좋다. 자녀 교육 문제로 부딪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기 이전에 나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했던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