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7쪽)
이방인(알베르 카뮈)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라는 파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년과 올해 가장 화제가 된 소설 중 하나인 '아버지의 해방일지' 역시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문장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사흘 동안 장례를 치르면서 딸의 관점에서 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것을 퍼즐 맞추듯이 깨달아가는 과정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다. 3일 동안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추억이 시트콤처럼 연이어 펼쳐지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모두 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고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이념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해방 이후의 시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사회주의를 선택했고, 신념을 실천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우파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고, 사회주의를 선택했던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택은 집안에 풍비박산을 불러왔다. 아버지가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는 군인들에게 살해당했고, 가까이에서 그 죽음을 지켜본 작은아버지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아버지의 빨치산 행적으로 인해 자식과 조카들의 출셋길까지 모조리 막혔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이었던 태수가 연좌제로 인해 사관학교에서 떨어진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선택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고통을 가져왔다. 해방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빨갱이'라는 말은 금기의 단어였고, 워딩 그 자체만으로 공포심을 유발했다. 빨치산의 딸이었던 '아리' 역시 아버지의 행적으로 인해 자신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고 원망했다. 나의 신념과 가족의 안녕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쉽게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투사들은 자신의 가족과 후손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의병 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안위는 당연히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주인공인 고상욱 역시 사회주의를 선택한 자신의 선택이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벌어진 역사를 알고 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고상욱의 인생 또한 같은 처지가 되었다. 두 번의 수감 생활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인 구례에서 살아간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그의 인생이 비극인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가 바라던 세상은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는 세상이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현실로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일상에서 '사회주의'와 '유물론'을 바탕으로 방물장수를 집에 재워주는 것에 민중의 사랑을 운운하며 코믹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었다. 어떤 세상이든 그에게 최고의 가치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47쪽)
아버지에게는 우파 친구가 있다. 매일 아침 조선일보를 읽고 교련 교사로 퇴직을 한 박 선생이다. 아버지는 가치관의 차이로 매일 아침 신문배급소에서 투탁거렸던 '박 선생'을 인성이 최고로 좋은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에게는 사상보다 사람이 더 중요했다.
고 봐라, 가시내야. 믿고 살 만허제? 영정 속 아버지도 나를 비웃는 듯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인간을 신뢰했다. (57쪽)
딸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에게 술 담배 값으로 삼십만 원을 송금하다 어머니께 들킨다. 이후 아버지의 절친인 박 선생에게 돈을 보낼 테니 빌려주는 척하고 매일 아버지께 만원 정도를 드릴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그는 박 선생에게는 삼십만 원이 아닌 이십만 원을 보낸다. 아무래도 남에게 큰돈을 맡기기가 꺼림직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박 선생은 지출 품목이 빼곡히 적힌 종이와 잔금을 딸에게 건넨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102쪽)
소설은 이념 대립과 상관없이 '아버지'라는 사람의 매력을 마음껏 보여준다. 딸은 장례식장을 찾아온 아버지의 지인들과의 사연을 통해 자식도 몰랐던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현실과 유리된 황망한 유물론, 사회주의 따위를 늘어놓으며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극히 그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일관된 사람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의 사정을 모른 척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었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를 대했고, 세상을 긍정했다. 아무리 실망스럽고 어이가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누군가의 호의와 도움을 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가 없이 돕는다고 하더라도 상대에게 아무런 피드백을 받지 못할 경우 실망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죽하믄 그렇겠냐'라고 말하며 자신을 배신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문재인 전 대통령, 유시민 작가 등의 추천을 받으며 더욱 유명해졌다. '사회주의, 빨치산' 등의 민감한 현대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불편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중심은 이념이 아니라 인간이다. 특이한 점은 갈등의 정도가 심하지 않음에도 소설이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이다. 이미 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로 인해 앞길이 막히고 상처를 받은 바 있는 딸과 작은아버지와의 갈등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다. 오직 예전 기억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만 예전의 갈등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죽음 이후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사연을 통해 빨치산의 딸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자식처럼 생각했던 '상수'와의 일화를 들으며 아버지께서 바라는 자식의 모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웠던 노란 머리 소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며 자신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브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265쪽)
소설은 시종일관 가볍고 경쾌하게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죽음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있다.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딸은 아버지의 의외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느 한 단면을 갖고 쉽게 누군가를 판단하고는 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다. 역할에 따라 그 사람의 특징 또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도 자식에게는 나이스 한 부모일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 노릇이 처음이기 때문에 서툴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살아가는 방식은 답답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 부모의 존재는 자식이 극복해야 할 산이 되기도 하고, 버려야 할 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만난 부모님을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대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식은 부모에게 다양한 자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짜 부모님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말이다.
10년 전 어머니께서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 오랜 기간 수령해야 할 수당을 받지 못하셨다. 뒤늦게 청구를 하였으나 사 측에서는 당연히 여러 핑계를 대며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진보 정당의 도움을 받아 정당하게 수당 지급을 요구했다. 당시 돈 몇 백만 원 때문에 어머니께서 상처를 받거나 다치는 것이 싫어서 그냥 모른 체 지나가자고 말했었다. 내 입장에서는 투사로서 어머니의 모습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늘 연약해 보이는 어머니를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엄마는 아들인 너에게 늘 친절하고 상냥하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냥 웃지만은 않는다. 너희 엄마도 용감하고 무서운 구석이 있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파이팅이 넘치는 엄마의 모습이 도저히 연상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당한 경로를 통해 노동의 대가를 지급받는데 성공하셨다. 정년퇴직 후 지금은 요양보호사로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계신다. 이 책을 읽으며 부모님의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이 궁금해졌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물론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도 있지만 적어도 자식으로서 나의 부모님의 사정은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살아온 과정과 주변 사람들과 겪은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어졌다. 항상 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를 지켜보셨던 부모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부모님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수필을 쓰고 싶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을 통해 아버지를 불멸의 존재로 박재 시킨 정지아 작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글을 통해 부모님의 삶과 가치관을 기록하고 싶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구례'는 빨치산 이후 아버지의 모든 행적이 담겨 있는 곳이다. 사실 아버지의 인생과 후손들의 삶까지 결정한 빨치산 시절은 4년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삶은 '구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평생을 구례에 살면서 이웃들과 질긴 인연을 이어왔다. 나는 군대 제대 직후에 구례에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친구와 함께 지리산 종주를 했었는데 그 출발점이 구례였다. 노고단으로 가기 전 구례 버스터미널 입구에 있는 작은 백반집에서 식사를 했다. 친구 녀석이 전 날 급하게 햄버거를 먹고 체했다. 친구의 상태를 보니 지리산 종주가 가능할지 걱정이었다. 우리의 사정을 듣고 식당 사장님께서 민간요법으로 친구의 손가락을 따 주셨다. 그리고 소화에 좋은 매실차를 내어 주셨다.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어 주신 선의였기에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다. 그렇게 나에게 '구례'란 푸근한 인심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구례에 대한 나의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쉽게 이해가 갔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 번만 와도 되는데, 한 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197쪽)
아버지는 죽음을 통해 삶이라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정치범으로 감옥 생활을 했고, 그 결과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도 주어지지 않았다. 혈육인 동생에게 평생 미움을 받았고, 자식에게도 늘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죽음을 통해 해방을 맞이했다. 이제 가족들은 아버지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엄마는 남편 없는 삶을, 딸은 아빠가 없는 삶을, 작은 아버지는 형이 없는 삶을 말이다.
사실 아버지는 크고 작은 억압 없이 인생을 살아왔다. '사램이 오죽하먼 글겄냐'라는 말을 달고 살며 너그럽게 세상사를 받아들이며 살아오셨다. 어쩌면 이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기보다 아버지를 떠나 보낸 나머지 가족들의 해방일지라고 해야 더 옳은 것이 아닐까?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