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감독을 하며 떠올랐던 나의 수능 이야기
수능 감독 관련 공문이 오면 또 한 해가 끝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원래도 수능 감독 빠질 생각을 하지 않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더 많은 감독관이 각 학교마다 배정되었다. 사실 대부분 선생님들은 수능 감독을 꺼려한다. 물론 교사로서 학생들이 12년의 세월을 평가받는 거룩한 시험을 잘 치르도록 도와주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혹시라도 학생들이 실수를 할까 봐 억울하게 부정행위로 적발된 사례들(부모님 외투 입고 들어왔는데 그 속에 휴대폰이 있다거나, 4교시 선택과목 1 답안지를 수정해야 하는데 실수로 한국사 답안지를 건드렸다거나 등)을 본령이 치기 전에 상세히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거나 민원이 제기되었을 때 그 모든 책임은 교사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상부에서는 우리 시험장에서 아무런 민원 없이 무사히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감독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팍팍 준다.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도 노동이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시험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쉽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은 더욱 고역이다.
하지만 올해도 나는 시험 감독관을 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대기실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점심 식사 전이라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고, 메모지도 없어서 마음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번 정도는 내 인생의 한 사건이었던 수능 시험에 대해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21년 전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당시 포항 지역의 고등학교 기숙사에 거주했던 나는 아침 일찍 부모님을 학교 앞에서 뵈었다. 부모님께서는 영천에서 새벽부터 출발해 포항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배가 고파서 시험을 못 치를까 봐 3단 도시락을 준비해 오셨다. 시험을 치르는 고사장 앞에서 부모님과 각각 포옹을 한 뒤에 비장한 각오로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 보는 후배들이 내가 선배인 것은 어떻게 알고 큰 소리로 나를 응원해 주었다. 시험장에는 당시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친구도 있었다. 1교시 시작 전 그 친구와 서로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나누었고,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1교시 시작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1교시 시험지를 받기 전 문득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올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했다고 자부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였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특히 2학기 들어와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시작한 것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그래도 언어 영역(국어) 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내 실력에 자신이 있다기보다 한 해 동안 내가 기울인 노력에 대한 자신이었다. 1년 동안 공부했던 시간의 70%를 언어 영역에 쏟아부었다. 역대 기출문제 및 모의고사는 당연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웬만한 문제집은 다 풀었다. 자신감을 갖고 언어 영역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웠고, 애매한 보기들이 많았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자기 합리화를 하며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기 합리화란 답을 찾는 근거를 지문이 아니라 내 상식에서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겨우 제시간에 맞춰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있었다.
2교시 수리탐구 영역은 언어 영역과는 다른 의미로 절망적이었다. 문제가 너무 쉽게 나온 것이다. 수학은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과목이었다. 고3 올라와서 치른 모든 수학 시험에서 만 점을 받았었다. 조금 재수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수학이 어렵게 나오기를 희망했다. 상위권과 중위권의 변별력을 수학이 보여주기를 바랐다. 현실은 내 바람과 달랐다. 수학이 쉽게 나왔기 때문에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웠다. 100분이란 시간 동안 같은 문제들을 세 번 넘게 반복해서 풀었다. 무조건 만 점이라는 확신과 함께 전국에 만 점 받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걱정도 함께 했다.
3교시 수리탐구 2 영역(과학, 사회)과 4교시 외국어 영역도 대체로 쉽게 출제되었다. 3,4교시 모두 두세 번 이상 문제를 풀었을 만큼 시간도 여유로웠고, 어렵게 느껴지는 문제도 없었다. 4교시 외국어 영역 답안 마킹을 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시험을 잘 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면서 스스로 가채점했던 나의 예상 점수는 390점 정도 되었다. 2,3,4교시는 만점이라고 확신했고, 1교시 국어에서 10점 정도 깎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은 1교시 국어에서 20점까지 감점당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내가 목표했던 대학을 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에 느꼈던 불안했던 감정은 기우였다. 올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준 세상이 고마웠다. 역시 될 놈은 된다는 자만심과 함께 모든 시험을 마친 후 제일 먼저 교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부모님께서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나를 고사장에 보낸 후에 영천에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해서 고사장 근처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셨다고 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포항 기숙사가 아닌 영천 집으로 돌아갔다. 시험을 잘 쳤다고 생각했던 나는 차 안에서 시종일관 싱글벙글했다. 엄마가 조심스럽게 시험 잘 쳤냐고 물었고, 나는 교만하게도 큰 소리로 "아버지, 어머니! 이제 우리 집에서도 서울대 한 명 나왔습니다."라고 외쳤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셨지만, 두 분 모두 웃고 계셨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다. EBS 방송을 통해 수능 시험 정답을 공개했다. 방송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 앉아 1교시부터 채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어 영역 듣기 문제에서 벌써 4문제를 틀린 것이다. '어! 이게 아닌데.' 그리고 생각보다 언어 영역에서 동그라미보다 엑스 표시를 한 문제가 많이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조용히 밖으로 나가셨다. 큰일 났다는 생각으로 1교시 점수를 확인하니 90점이었다. 당시 만점이 120점이었기에 1교시에서 벌써 30점을 감점당한 것이다. 다행히 2~4교시는 예상했던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총점을 합산한 결과 한 번도 모의고사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점수가 나왔다. 비록 고3 때 피시방에 빠져 조금은 나태하게 보내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3년 전체를 되돌아보았을 때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게 노력했다.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이 끝났음에도 에어컨도 없는 학교 교실에 남아 양동이 속 찬물에 발을 담그고 공부했다. 기숙사 독서실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소등을 해야 오늘 하루 열심히 공부했다며 스스로에게 칭찬을 했을 만큼 독하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3년이란 시간의 노력은 기대했던 것보다 낮은 결과로 나에게 주어졌다. 아마 그날이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다. 한참을 울고 난 후에 아버지께서 방으로 들어오셨다. 배고플 테니 저녁 먹으러 나가자고 하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단둘이서 식사를 하러 나갔다. 돼지갈빗집에서 아버지는 소주를 시키셨다.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나에게 술을 따라 주셨다. 어디선 배운 것은 있어서 등을 돌린 후에 술을 마셨다. 아버지께 처음 받는 술이어서 긴장도 되었지만 그날 술은 참 달았다. 그날 하루 동안 많은 감정의 변화를 거쳤고 인상적인 날이었기에 술이 달았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시험을 망친 것이 오히려 잘 됐다고 나를 위로하셨다. 어린 나이에 실패를 겪어 보는 것도 괜찮다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용기를 주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실패'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시니, 수능 시험 성적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왔다. 열여덟 살의 나는 실패를 성장의 기회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 그저 운이 나빴다고, 시험 출제자가 난도 조절을 제대로 못했다고,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 돌리기에 바빴다. 또한 수능을 망쳤다고 스스로 여긴 나는 즐겁게 놀거나 편하게 쉴 자격도 없다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우울과 냉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이후 학교로 돌아간 나는 담임선생님께 재수를 결정했고, 올해 대입 원서는 쓰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곳에서 공부하는 것만큼 좋은 전략은 없다고 생각하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방 국립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눌러앉은 나는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고, 21년 전의 나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들의 감독관이 되어 교탁 앞에 서 있다.
누군가는 나의 삶을 보고 실패했다고 정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명문대 진학이라는 내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좌절이 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살아 보니 인생이 그러하더라. 세상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또는 겨우 찾은 그 길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경쟁자들이 있어 내 것이 되지 못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 게다가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더 좋기도 하다. 잘못된 기차가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기도 하더라. 중요한 것은 기차가 나를 데려다 줄 목적지가 아니라 그 여행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가에 달려있었다.
교사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내가 탄 기차가 잘못 탄 기차라고 생각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을 기대할 수밖에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탔던 기차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걸어왔던 길은 누군가가 우러러보고 부러워할 만큼의 꽃길은 아니다. 앞으로도 내가 갈 길은 꽃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거름이 가득한 흙길이 되어주는 나의 길이 좋다.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지금의 이 길이 좋다. 나의 길을 좋아하는 근거 중 하나가 나를 보고 교사의 꿈을 가진 학생들이 더러 있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내 모습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착각해 본다. 지금의 나의 길을 긍정하고 나니 이제는 나의 과거도 긍정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후회하며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사범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 준 나의 고교 생활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수능을 망친 경험도 소중하게 여긴다. 나를 더 성숙하고 겸손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인생에서 의미 없는 사건은 없었다.
2021년, 또 한 번의 수능시험이 끝났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고3 학생들은 원격수업에 들어갔다. 예년이었으면 교실 속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수능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시험을 잘 치른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로 패가 나뉜다. 물론 시험을 잘 치른 학생들보다 본인의 점수에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이 훨씬 더 많다. 시험을 잘 치렀든 그렇지 않든 원격수업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올 모든 고3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수능 공부한다고 고생했고, 12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제도권 학교 교육 안에 있는다고 욕봤다. 그리고 수능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한순간의 수능 실수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수능 시험은 한 챕터 또는 한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 잘 쳤다고 지나치게 오만해질 필요도 없고, 시험 망쳤다고 지나치게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못된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도 되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른 길로 가도 된다. 인생에 있어서 올바른 길과 잘못된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년에 어느 곳에서 스무 살 시절을 보내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다 보면 그 길이 너의 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은 수능을 잘 친 사람들만 필요로 하지 않는다. 쌤이 또 말이 길어졌네. 일단 좀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