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이서원)'라는 책에서는 영어 단어 'stupid'의 어원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우둔한'이란 뜻을 지닌 'stupid'라는 영어 단어에는 '듣지 않는다'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본인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결정에 이런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하면 눈과 귀를 닫아 버립니다. 제대로 알려는 노력은 하고 싶지 않으면서 자기 확신에 가득 차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쉽게 폭군이 됩니다.
복직 후 두 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주변의 'stupid'한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상황에서 답답함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과 원만하게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릅니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 꼰대와의 대화는 숨이 막힐 만큼 견디기 힘이 듭니다. 결국 주변에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의 확증 편향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경험이 쌓이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꼰대가 되기 쉬운데요. 그럼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바로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과 남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동시에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만에 학교 행사로 인해 졸업생들을 만날 수 있는 즐거운 하루였음에도 퇴근길이 우울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기분이 울적해졌을까요? 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응어리이자 마음의 앙금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stupid'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속에서 조직과 인간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구성원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편가르기를 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을 누르고 제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저 역시 그들에게 'stupid'한 고집불통으로 보일 수 있으니깐요. 누군가의 행동에 쉽게 증오의 감정이 생길 때는 저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상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그래서 너는?"이란 질문이 필요할 때입니다.
상대가 나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자괴감이나 수치심을 느낍니다. 뭔가를 보고하기 위해 상사를 찾아갔을 때 그가 나의 얼굴이 아닌 모니터에 시선을 두면서 건성으로 대답을 할 때 모멸감이 듭니다. 교사는 학생이 용무가 있어 교무실을 찾아왔을 경우 아무리 업무로 인해 바쁘더라도 모니터가 아닌 학생의 눈을 보면서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저부터 학생들이나 아들이 하는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었는지 되돌아봅니다. "힘들었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괜찮다."라는 말 대신 "그게 뭐가 힘들어,원래 힘든 거야, 너 참 유별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 실망스럽다." 같은 메시지를 내 기준에 비추어 쉽게 표현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좋은 조직은 개개인이 존중을 받는 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권력자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외부의 입김보다 내부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조직입니다. 좋은 멘토, 선배, 부모, 스승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궁금해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내가 알고 있는 최선의 지혜와 방법을 조언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stupid'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일 것입니다. "근데 말이야, 선생님도 사실 백 프로 내 생각이 맞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