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느낄 때가 기회다!
교사에게 진짜 1년의 시작은 3월이다. 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3월을 맞이했다. 직장에서 새로운 학생들과 동료들을 만난다는 설렘도 있지만, 다시 나의 일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다. 물론 지난 겨울방학은 가족과 함께 정말로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아들과 일상의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했고 잘 해냈다. 그 와중에 좋은 책도 읽고, 달리기도 하고, 매일 블로그를 통해 미라클 모닝 감사일기도 한 편씩 쓸 수 있어 감사했다. 틈틈이 서평, 여행, 요리 등 일상에서 겪은 내용들을 간단하게 글로 작성하기도 했다. 원씽 독서모임에 참가해 한 권의 책을 깊이 있게 읽어본 경험도 이번 겨울 방학의 큰 수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겨울 방학에서의 아쉬웠던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책 '원씽'을 통해서도 깨닫게 된 '나의 단 하나'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가장 잘하고 싶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매일 쓰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올해도 1일 1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다. 1월부터 2월까지 두 달 동안 무려 98개의 글을 포스팅했다. 하지만 최근에 올렸던 글들은 비교적 가볍게 쓸 수 있는 일기나 후기 형식의 글들이었다. 초고 작성부터 퇴고까지 글 작성에 1시간을 넘긴 글이 없었다. 겨울 방학 내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수월하게 작성할 수 있는 글들만 써 온 것이다. 그 반증이 올해 브런치에 올린 글의 갯수이다. 고작 4편의 글을 브런치에 발행했다. 1주일에 한 편의 글을 브런치에 올리겠다는 다짐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하지만 그동안 나에게도 핑계가 있었다. 2월은 '나'보다 '가족'에 더 충실해야 했고, 가족과의 시간이 나에게 확실한 '원씽'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3월이 되었다. 3월 1일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밤 10시 반이 되어서야 직장이 있는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1인 가구가 된 나는 퇴근 이후의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3월부터 다시 '나'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 나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글을 쓸 것을 기대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블로그 앱을 통해 나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인기글 10편 중에 8편이 감사일기였다. 여전히 블로그를 내 삶을 기록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주일을 떠올려보았다. 개학일인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신학년도 나이스 및 K에듀파인 세팅을 위해 야근을 했고, 금요일은 정시 퇴근 후 바로 천안으로 향했다. 문제는 직장 업무가 바빴고 야근을 했다는 사실은 나의 게으름에 대한 핑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시간 외 근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시간은 오후 8시에 불과했다. 나는 8시 이후의 시간들을 함부로 대했다. 개학 첫 날이라는 핑계로 혼술을 했고, 가장 중요한 글쓰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비교적 쉬운 과제들만 시도하면서 스스로 부지런하다고 자뻑하고 있었다. 목요일은 1주일에 술을 한 번만 마시겠다는 원칙을 어기고 퇴근길에 만난 직장 동료를 꾀어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매일 잠들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며 늦게 잠들었기에 멍한 정신으로 더디게 하루를 시작했다.
지난주를 게으르게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작년에 마음먹었던 자기 혁명의 다짐이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흐트러진 것일까? 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위해 책상 위에 앉기가 힘들었을까? 왜 예전처럼 술과 미디어에 의존해야 했을까? 나를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만든 것은 '외로움'이란 감정 때문이었다. 지난 주는 할아버지 제사로 인해 천안이 아닌 나의 고향 영천에서 아내와 아들을 보내야 했었다. 늘 내가 가족 품을 떠나다가 가족을 떠나보내게 되니 애달픈 감정이 더 커졌다. 우리는 가족인데 함께 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다시 접하게 되니 생각보다 후유증이 컸다. 1달 동안 늘 일상을 함께 보내다가 다시 혼자서 누추한 자취방에서 지낼 것을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퇴근 후에 깜깜한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었다. 혼자서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혼자 있어야 하는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주 중에 계속 야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온몸으로 외로움을 부정적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주중에 술도 두 번이나 마셔 전체적으로 몸과 마음도 건강하지 않았다.
사실 외로움은 무서운 것이다. 어쩌면 내가 외로움을 부정적 감정으로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원시 시대 때부터 고립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의 DNA에는 무리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남았다는 감정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추위와 맹수라는 위기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겨울에 더 외로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외로움은 생존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은 원시 시대처럼 인간을 위협하는 추위와 맹수의 위기는 없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외로움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로 받아들여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점차적으로 사회적 외로움의 문제에 맞춰 국가 정책이 만들어질 것이다.
외로움이 무서운 이유는 우울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우울은 같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울한 감정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지난 주 무기력에 빠진 나는 쉽게 알코올의 유혹에 넘어갔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가수들의 무대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결혼 전의 내가 매일 퇴근 후 술과 프로야구에 빠져 살았던 이유도 외로움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는 결혼을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 믿었지만 말이다.) 다시 예전처럼 흘러가는 대로 나의 삶을 맡기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삶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작년 뜨거운 마음으로 자기 혁명을 다짐했던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나의 삶에 가장 큰 주적이 되어 버린 '외로움'을 극복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도 외로움은 예고 없이 불쑥 나를 찾아온다.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 눈물을 흘리신다고 했다. 그럼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외로움을 훌륭하게 극복한 역사적 인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다. 2월에 방문했던 수원 화성 박물관에서 정조보다 더 눈길이 간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는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올해 나의 나이이기도 한 마흔 살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강진 땅에서 그가 느꼈을 첫 감정은 처절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배를 가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억울했을 것이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진에서의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 동안 무려 5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다. 1년에 27권, 매달 2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신 것이다. 만약 그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을 외로움과 억울함 그리고 원망의 감정으로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자 정약용은 없을 것이다. 그가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외로웠을 그 시기의 공부 흔적을 500권이 넘는 책이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음주와 미디어에 의존했던 지난 주의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하였다. 그의 삶을 통해 앞으로 남은 2021년을 어떻게 외로움으로부터 극복해 의미 있게 보낼 것인지 새롭게 다짐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다산은 외로움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가족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움이란 고통 속에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지 않았다. 외로움을 안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로움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 속 인물들 중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가 된 후에야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분들이 많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대성인인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 예수 모두가 해당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굳이 가족과 떨어질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외로움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외로움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외로움의 감정이 문득 올라온다면 곧바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기뻐할 것이다. 오늘은 개학 후 처음으로 해가 떠 있을 때 퇴근을 했다. 행정실에서 업무 요청이 들어와 정시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게 퇴근하게 되었다. 혼자서 교문 밖을 나설 때 다시 외로움이란 부정적 감정이 밀려왔다. 그 순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신난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에 감사하자. 나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이 시간들을 사랑한다. 집에 가자마자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들과 영상 통화를 해야지. 그리고 1시간은 운동을 해 정신을 깨우고, 1시간 동안 '태도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남은 2시간은 이번 주를 반성하는 글을 써야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준 우리 가족에게 참 감사하다."
두 번째, 다산에게는 유배 생활 동안 뚜렷한 방향이 있었다.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다산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만약 그가 유배지에서도 어떻게든 다시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할까? 물론 유배지로 향하기 전에 그는 재상으로서 자신의 역량으로 조선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죄인이 되어버린 그는 관직에 대한 욕심 대신 학문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했다. 벼슬길이 막혀버린 그의 자식들에게도 편지를 통해 이제서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독서를 통한 공부, 그리고 자신이 공부한 바를 책을 통해 세상에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뚜렷한 방향성은 다산이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도록 해주었다. 우리의 인생에도 방향이 필요하다. 특히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외로움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뚜렷한 방향이 필요하다. 그럼 나의 방향은 무엇인가? 진짜 나를 찾기 위한 공부, 그 과정에서의 결과물들을 글과 책으로 남기는 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세 번째, 좋은 습관과 계획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긴 유배 생활 동안에도 철저히 루틴을 지켰다고 한다. 물론 그는 오래전부터 한결같은 생활 습관으로 스스로를 지켜왔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었으며, 항상 일정 시간 이상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난 주 나태함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퇴근 후에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지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를 맡기기에 나는 그렇게 의지가 강하지 않다. 겨울 휴가가 끝이 나고 2021학년도가 시작되었으니 다시 시간 계획을 세워야겠다. 그래서 주 중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 4시간을 확보하고자 한다. 새벽 시간 1시간(글쓰기), 직장에서의 자투리 시간 1시간(독서), 퇴근 후 2시간(독서와 글쓰기)으로 루틴을 짜 보았다. 매주 화요일은 독서 모임을 하거나 지인들과 저녁 약속을 가질 예정이다. 그래서 화요일 퇴근 후 2시간은 다른 요일로 분산해서 채우고자 한다. 금요일은 천안으로 향하는 KTX 기차 타는 시간을 활용하고, 가족과 함께 하는 주말에는 새벽 시간을 활용해 2시간을 확보하면 된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 연습장에 구체적으로 올해의 시간 계획을 디테일하게 구성해 보았다. 퇴근 후에 해야 할 구체적인 것들을 손으로 직접 써 보니 벌써부터 외로움이란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성장의 기회를 나날이 얻을 수 있다는 충만함으로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이 생긴다. 외로움을 긍정적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는 디테일한 계획이 필요하다.
네 번째, 좋은 동료가 필요하다. 작년에 미라클 모닝 강의를 듣기 위해 온달 님이 운영하시는 '변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 단톡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대화방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기 초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단톡방의 대화 내용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단톡방 속의 사람들이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결같이 새벽 4시부터 기상 인증을 하고 새벽 5시에 달리기 인증을 꾸준히 하는 그들이 불편했던 것이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고 무리를 이룬다. 나와 비슷한 성향을 만나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 주변에는 부정적이고 게으른 사람들이 다수 있다. 하지만 불편함이 느껴질수록 더욱 변실모 단톡방을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제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감화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삶의 에너지가 충만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 계속해서 나를 노출시켜야겠다. 그럼 외로움을 통한 부정적인 감정이 내 속에 자리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성장은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주변에 좋은 동료가 있어야 한다. 오늘 다시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작년부터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는 나의 글쓰기 멘토, 최호진 작가 덕분이다. 지난주 처음으로 글쓰기 모임에 글을 제출하지 못했다. 온달 님께 개학 첫 주라 바빠서 글을 못 썼다고 메시지를 남기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바쁘다는 이유는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면 그것이 바쁜 이유가 되어 다른 일을 못 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제 퇴근 후에 온달 님께서 응원의 카톡을 보내 주셨다. (사실 온달 님께 카톡을 받은 그때도 주식 시황을 분석한다는 핑계로 유튜브를 보며 놀고 있었다.) 힘들어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메시지였다. 누군가 격려와 지지의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외로움, 우울, 무기력의 감정이 사라졌다.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바로 컴퓨터를 끈 후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달리고 난 후 찬물로 샤워를 했다. 개운한 정신으로 지난주에 대한 반성문을 지금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낀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
작년에 '행복의 기원'이란 책을 읽고 행복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책에서 최고의 행복이란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경험이라고 했다. 그만큼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행복하다. 그래서 사람 인(人)이란 한자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던 형상이 아니던가?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랜 역사를 지닌 한자라는 글자도 말해준다. 하지만 아무리 가깝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존재한다. 외로움이란 감정의 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항상 자식 옆에 딱 붙어 있을 수는 없다. 자식에게 부모와 떨어져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주어야 자식이 성장하듯이, 우리 역시 누군가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주 중에는 외로움이라는 틈을 통해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싶다. 그리고 주말에는 성장한 나를 이끌고 사람 인(人)이란 글자처럼 사랑하는 가족이 마음 편히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더 단단하게 그들을 지탱해 주고 싶다. 이제는 외로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삶에서 문득문득 나타나는 외로움이란 감정은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외로움은 나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