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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Apr 11. 2021

나의 좌우명은 '최선을 다하지 말자'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비결

 예전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형과의 일화이다. 그 형은 EBS에서 파견직을 수행하며 EBS 강의까지 하셨기 때문에 학교에 오기 전부터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교장 선생님께서 가는 곳마다 다음 학년도에 EBS 파견 출신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온다고 자랑을 하셔서 나는 내심 그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못된 심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형과 가까이 지내면서 실력뿐만 아니라 겸손함과 배려하는 인성까지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술과 여행을 좋아하던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어느새 새학기도 두 달이 지났다. 형이 고충을 하나 나에게 이야기했다. 1년에 4번 발행하는 영어 중국어 신문을 만드는데 너무 스트레스가 크다는 것이다. 나는 형이 신문 발행으로 고민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무심하게 형에게 한 마디 했다. "형님~ 무슨 신문 하나 만드는데 목숨을 겁니까. 최선을 다하지 마세요. 대충 해도 됩니다." 2주일 뒤에 영어 중국어 신문이 발행되었고, 좋은 기획력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직접 쓴 양질의 기사 콘텐츠가 편집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형에게 영어 중국어 신문 발행 기념으로 술 한잔하자고 제안했고, 퇴근 후 조촐하게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형이 나의 조언이 너무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형은 살면서 대충 해도 된다는 조언을 처음 들었다며 나의 이야기가 신선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 덕분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고 좀 더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신문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어 중국어 신문 동아리 학생들에게도 한결 더 부드럽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보너스였다. 당시 형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에 첫 영어 중국어 신문 작업부터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물론 신문이나 책과 같은 것은 학교를 대표하는 인쇄물인 동시에 내 이름이 직접 들어가는 창작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형은 이것으로 내가 누군지 제대로 보여주겠어라는 다짐을 내심 했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기대와 주변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결국 스트레스가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디 학교 업무가 그것 하나뿐인가. 게다가 생각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큰 관심이 없다. 내 앞에 놓인 일도 바쁜데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는가. 학교 신문이 나오면 그저 신문 나왔구나, 신문 만든다고 고생했겠다 정도로 생각하지, 그 신문을 갖고 담당자의 역량을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심히 맡은 일을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만큼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선을 다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본인이 세운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좌절감과 우울함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또한 짧은 두 달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형이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대충 만들어도 된다고 해서 정말 대충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다만 나는 형이 본인 에너지의 70~80%만 사용하기를 바랐다. 20~30% 정도는 남겨두어야 어느 정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맡은 일에 100% 이상 에너지를 쏟게 되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결과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여력이 사라진다. 게다가 나쁜 결과가 나왔을 때 타격도 크다. 심지어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주변에서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동료들에게 서운함과 공격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애송이 담임 교사 시절



 최선을 다하지 말자고 하니 첫 담임을 할 때가 생각났다. 누구나 그렇듯이 첫 담임을 할 때 최선을 다했다. 자나 깨나 아이들을 생각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아침에 눈을 뜨고도 제일 먼저 한 일이 1번 강○○부터 36번 현○○까지 모든 아이들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리는 것이었다. 당시 스물여섯 살의 나는 1년 동안 아이들과 연애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괜히 퇴근 후에도 반 아이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은 먹었는지, 집에 부모님을 들어오셨는지, 요즘 고민은 없는지' 등에 대해 물어보고는 했다. 쉬는 시간마다 학급 분위기가 어떠한지 교실에 자주 방문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의 첫해는 완벽하게 실패했던 1년이었다. 아이들에게 신경을 썼던 만큼 아이들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나름 학교 다닐 때 좀 놀았다고 자부했지만 아이들의 눈으로 나는 완벽하게 모범생이었던 사람이었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았던 나는 공부하기 싫어하고 목표 의식이 없고 무기력한 아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학교 다닐 때 만났던 담임 선생님들께 배웠던 것이 단체기합, 고함 지르기, 체벌뿐이라 잘못된 방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때는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담임교사로서의 최선이라 생각했다.


 결국 3월의 그 열정을 12월까지 이어갈 수 없었고, 급기야 내가 노력하는 만큼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급기야 내가 교직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2학기 개학을 앞두고 힘들게 들어온 학교에 사표까지 낼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정도 힘든 일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1년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교장실 앞에서 사표를 찢어 버렸다. 지금도 첫해에 만났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그때의 시행착오들을 생각하면 나는 평생 그들에게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   


 물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첫 담임교사를 하며 아이들과의 시간을 망쳤다는 말도 어폐가 있다. 열정적이었던 당시의 나는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자 했다. 즉, 우리 반은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뭐든지 잘해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욕심이 컸고, 결국 그 욕심이 당시 학생들의 소중한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을 망쳐버렸다. 


 그때 사건을 계기로 '최선을 다하지 말자'가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요즘은 담임교사로 만난 아이들에게 확실히 선을 긋는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일과 시간에는 너희들의 담임이지만, 퇴근 이후에는 인간 박형준과 진헌이 아빠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대신 일과 시간 안에는 그 어떤 일보다 우리 반 학생들과 관련된 일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아이들과 약속한다. 아이들과 1년을 함께 생활하면서도 나는 "걱정하지 마라. 대충 해도 된다."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다가 정말 아이들의 진로에 중요한 행사나 전달사항에는 눈을 반짝이며 이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꼭 시도하고 경험해봤으면 한다고 다른 어조의 목소리로 강조했다. 나 또한 깊은 고민이 필요 없는 업무에는 큰 에너지 소모 없이 관성적으로 처리하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에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생활기록부 많이 적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 전교에서 생활기록부를 가장 자세하고 많이 적어주는 교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관성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일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으면 수업, 학생 상담, 생기부 작성, 평가와 같은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력을 100%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종업식을 앞두고 2019년 우리 반 반장에게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 선생님을 봤을 때는 매사에 귀찮아하는 분인줄 알고 걱정했어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 덕분에 정말 중요한 일에만 나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요.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의 선생님 눈빛을 보고 더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모든 일에 열정적일 필요는 없다. 매사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할 수도 없다. 인간의 체력과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무리해서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가는 요절할 수도 있다.  또한 어디에서든 100%를 발휘하면 세상은 나에게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 이상까지는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60~70%만 역량을 쓰다가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에 간혹 100%를 발휘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학교에서의 일을 오랜 시간 꾸준하고 지혜롭게 잘 해내려면 최선을 다하면 안 된다. 나의 경우 쓸데없는 일까지 열심히 하는 성향이 있어 의식적으로 대충 하자고 되뇌는 연습을 해왔다. 최근에는 작은 일까지 최선을 다하는 이유를 알았다.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쉽고 중요하지 않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무언가 자잘한 일에 집착할 때 정말 중요한 일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오늘도 힘을 빼고 가벼운 마음으로 직장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일들을 행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학교 생활의 목표는 최고의 국어 교사와 담임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학기 초마다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1년 뒤 나와 함께 했던 아이들에게 '최악의 국어 선생님, 담임선생님'이라는 말만큼은 듣지 말자고. 그저 올해 우리 국어선생님 나쁘지 않았지, 우리 담임선생님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말이면 충분하다. 'Best'와 'Good'이 아니라 해마다 'Not Bad'가 나의 목표다. 학생들에게 매년 그 정도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오랜 시간 교직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좋고 나의 일이 나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기에 이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 죽을 만큼 노력하기 보다 죽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오랫동안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그래서 나의 좌우명은 최선을 다하지 말자이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나 자신을 위해서든 항상 여력을 남겨둔다. 직장에서 100%를 소진하면 가정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년부터 내가 좋아하는 술자리도 10시 전에는 집에 들어간다는 제한을 스스로 걸었다.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잘 수행하고 있다. 10시 이후에 귀가할 정도로 과음을 하면 그다음 날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아이들 앞에 설 수 없으며, 퇴근 후에 독서와 글쓰기를 하는데도 지장이 있다.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처럼 과한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 지혜롭게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이든 가정이든 술자리든 자기계발이든 어느 정도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너무 욕심을 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삶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요즘 측근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정말 바쁘게 사는 것 같다."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안 바쁘니깐 좀 놀아달라고 장난으로 애걸복걸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바쁘게 사는 듯하다. 월요일은 방과후수업과 업무를 몰아넣어 워킹 데이, 화요일은 색종이 독서 모임과 책수다 독서 모임을 비롯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모임 데이, 수요일은 퇴근 후 커피숍이나 북 카페에 가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 독서 데이, 그리고 목요일은 퇴근 후 신천이나 앞산으로 향하는 운동 데이의 루틴을 갖고 있다. 금토일은 주중에 독박 육아로 심신이 지쳐 있을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바쳐야 하는 육아 데이이다. (육아 데이가 제일 힘들다. 최선을 다하지 말자는 나의 좌우명을 어겨야 하기 때문이다. 대충 하면 아내의 눈빛 레이저를 받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 1일 1블로그 포스팅, 입이 트이는 영어 공부, 만 보 이상 걷기, 그날 읽은 책 인스타에 올리기, 미라클 모닝은 매일 하는 습관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1년 넘게 크게 흔들림 없이 이 모든 루틴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최선을 다하지 말자 라는 좌우명 덕분이다.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들은 끝이 없다. 독서, 글쓰기, 달리기, 영어공부 등은 올해만 하고 끝낼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내 삶의 일부들이다. 그리고 독서, 글쓰기, 달리기, 영어 공부에 끝이 있는가? 끝이 있지도 않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은 자신에 대한 가혹 행위다. 일도 마찬가지다. 오늘 하루 불태운다고 해서 내일 나에게 주어지는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은 늘 내 주변에 있다.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직장에서의 나의 일과 퇴근 후 내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오래 즐길 수 있는 비결은 최선을 다하지 말자이다.      


영천소년 홀인원 증거 자료, 두 사진 속 골프공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자랑을 하나만 하겠다. 나는 2016년에 필드에 나가 홀인원(저자 추가 설명: 티샷에서 휘두른 공이 단번에 그대로 홀로 들어가는 일로서 실력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줘야 하기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마추어 골퍼들이 수두룩함)을 한 적이 있다. 135미터 거리의 PAR3 15번 홀이었다. 골프 초보 입장에서 홀인원은 꿈도 꾸지 않았다. 게다가 그날 너무 많이 OB를 해서 의기소침해있었다. 이미 스코어도 어느 정도 확정되었기에 승부욕도 사라졌다. 남은 4홀은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 나는 15번 홀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잘 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이 공을 잘 때려서 5미터 이내로 붙여 버디를 잡아야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거리가 안 나와도 좋으니 그저 공을 정확하게 앞으로만 보내자고 생각했다. 70%의 힘만으로 때린 공은 거짓말처럼 잠시 후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날 워낙 시야가 좋았기에 골프공이 몇 번 통통거리더니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함께 라운딩 했던 동료들은 홀인원 아니냐고 깜짝 놀라서 흥분했고, 나는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왜 갑자기 골프 이야기냐고? 보통 골프를 인생에 많이 비유한다. 골프를 잘 치려면 어깨에 힘을 빼고 70~80%의 힘만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ㅠ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낼 때 내가 휘두른 공은 방향을 잃고 필드 밖으로 나가버린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조금 느리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힘을 빼고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기에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추신



 우연히 변실모 단톡방에서 '60점이 최선이다'라는 글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소에 남기지도 않는 답글을 달았습니다. '제 좌우명도 최선을 다하지 말자'입니다라는 답글에 몇몇 분들이 호응을 해주시면서 결국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왜 나의 좌우명이 '최선을 다하지 말자'가 되었는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조금은 두렵습니다. 평소에 생각했던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거라 1시간 만에 빨리 작성을 하기는 했는데,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학교 선생님이 최선을 다하지 말자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비난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니깐요. 저처럼 최선을 지양하는 삶에서 찾은 여유를 통해 삶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사람도 있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채워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니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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