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이라. 지금껏 살면서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공부하라'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심지어 교사로 임명받던 날도 아버지께서는 항상 나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공부하라에 말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일생의 모든 순간이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라는 책은 나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공부와 인문학을 통해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다는 이 책의 메시지에 설득당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공부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나 취업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공부에 지쳐 있다. 더 이상 뭔가를 이루기 위해 억지로 하는 공부 대신,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깨달아 가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그 행위 자체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수학을 참 좋아했다. 왜 그 과목을 좋아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좋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수학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알아가고 적용해 보는 것 자체에 큰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시중에 나와 있던 문제집을 죄다 풀었고, 굳이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공식을 증명하려 애썼다. 예전 순수하게 공부를 놀이처럼 여기며 몰두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더 이상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공부를 미루고 싶지 않았다.
책에서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류 최고의 고수들이 쓴 고전을 계속 읽다 보면, 몸에 내공이 쌓이게 된단다. 내공이 쌓이면 그 주변에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사람들을 막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이 생긴다고 한다. 이럴 수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 현재의 행복마저 포기하며 노력해왔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실패를 하면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여기며 가혹하게 남은 현재의 행복마저 스스로 지웠다. 그럼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획득하며 성공하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도 끊임없이 노력을 해 왔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외로워서가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 내 주변에 사람들이 있더라도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주위에 사람들을 계속 곁에 두기 위해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이 정도 잘 났고 폼 나게 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돈이나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하지만 열심히 돈과 지위라는 목표만을 좇아 살게 되면 정작 중요한 나의 사람들의 존재를 잊게 된다.
또한 우리는 더 넓은 집을 소유하기 위해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산다. 현재 나와 가족이 머무르고 있는 집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집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집은 더 이상 가족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이미 일종의 상품이 된 지 오래되었다. 좋은 입지의 집을 잘 꾸민 다음 값이 오르면 타이밍 좋게 팔아치워야 하는 물건에 불과하다. 게다가 집에서 가족이 머무는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집을 지키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가구나 가전제품인 셈이다. 가구와 가전제품을 섬기느라 넓고 비싼 집이 필요하고, 그 집을 구하기 위해 평생 동안 애를 쓰며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 집은 누리는 장소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었다. 나 역시 지금의 집을 좋은 가격에 매도하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학교에서 주어지는 해야 할 일들 중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이 성과급에 반영이 되는지 계산하고 있다. 뼈속 깊이 자본의 노예가 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이 떠드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자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노예가 아닌 삶의 주인이 되어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 모두는 삶의 모든 순간마다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실 제도권 교육에 대한 비판이다. 당연히 내가 몸을 담고 있는 ‘학교’가 주요 타깃이 되었다. ‘탈학교 교육’으로 유명한 이반 일리히는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라고 말했다. 또한 학교는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 말은 학교가 삶의 모든 순간이 공부가 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삶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태도를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학교에 맡겨 버린다는 것이다.
나의 직업은 교사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당장에 가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고 학생들 앞에 서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학교가 퍼뜨리는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가 학교와 연령이다. 대한민국은 만 일곱 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같은 나이의 학생들끼리 같은 학년이 되어 진급한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 역시 겪어왔고,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학년, 대학교 시절은 학번이 왕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말한다. 동일한 나이의 학생들을 같은 공간에 몰아넣고 같은 내용을 주입함으로써 모든 차이와 이질성을 지워버리고 아주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국민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왔던 '국민학교'에 '국민'이 들어간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런 연령별 균질화가 만들어낸 가장 잘못된 생각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는 끝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늘 나에게 공부란 시기가 있다고 강조하셨다. 특히 고등학교 3년이란 시간을 얼마만큼 공부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고 하셨다. 그 말을 곡해하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문적으로 책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대학 시절을 헛되게 보냈다. 군 제대를 하고 나서는 취업을 하기 위한 공부를 했을 뿐이었다. 요즘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작년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있다고 학생들에게 말하자, “선생님은 이제 공부할 필요가 없잖아요.”라는 반응을 들었다. 학생들에게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즐거운 놀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이미 10년 넘게 공부에 지친 그들에게 공부가 놀이라는 나의 말은 어느 정도 사회에 자리 잡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변화는 더욱 빠를 것이다. 새로운 문화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어느 시절보다 중요해졌다. 공부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보내기 위해 매 순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는 편견의 힘은 강력하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편견을 심어 준 잘못의 책임은 근대의 산물인 학교에 있다. 아기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다. 올해 만 3세인 아들은 하루에도 정말 많은 질문을 나와 아내에게 쏟아낸다. 아이를 보며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고등학생들의 표정에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찾기가 어렵다. 그들이 호기심을 느끼기도 전에 잘게 쪼개진 학년별 교육과정이 공부라는 영역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들도 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 생활에 적응할수록 질문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학교가 갖고 있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선별'이다. 국어, 영어, 수학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과목인 이유는 선별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의 경우 고등학교 입학 후 수포자(수학 공부를 포기한 자들)가 속출한다. 학교 평가로 선별되지 못한 다수의 경우 학교 교육을 통해 공부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커진다.
결국 진짜 제대로 된 공부는 학교를 마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나 역시 부모가 되고 나서야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아들에게 지혜롭고 현명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학교교육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같은 고민을 먼저 한 사람들의 책을 찾게 되었고, 그들의 생각을 내 것으로 만들어 글로 정리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공부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를 지혜롭게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중한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가까운 사람과 오해하지 않고 진심으로 소통하기 위한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죽음 앞에서 나의 인생을 덜 후회할 수 있을까 등 말이다. 마흔이 된 지금 스스로에게 말한다. 공부하기 정말 좋은 시절이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때로'의 의미는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계속 정진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제야 아버지께서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았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바로 숨을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살아있는 모든 시간이 공부를 해야 할 때이다.
공부의 시작은 독서
그럼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에 등장한 두 사람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한다. 초야에 묻혀 밭을 갈며 살던 제갈량과 남산 묵적골에 살던 허생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와 박지원의 허생전을 통해 대한민국에 꽤나 알려진 캐릭터들이다. 이 둘은 특별한 학력과 경력 없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종횡무진 활약하며 세상을 뒤흔든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들은 세상이 기회를 주기 전까지 단 하나의 행위만을 했다. 바로 책 읽기다. 그들은 주야장천 독서만 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폐족이 되어 과거 길이 막힌 아들에게 편지로 이렇게 전했다.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왜 정약용이 대학자로 현재까지 칭송을 받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독서를 권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벼슬에 성공해서 다시 가문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으로 독서를 권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고독하고 힘든 유배생활 동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력을 원망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다방면의 독서를 통해 얻은 가르침을 책으로 남기며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정약용은 독서를 “위로 성현과 짝할 수 있고, 아래로 백성을 깨우칠 수 있으며, 그윽하게는 귀신과 통할 수 있고, 밝게는 왕도와 패도의 방략을 터득하여 우주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독서가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에는 애물단지처럼 되어버렸다. 독서 역시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영어와 논술 준비를 위해 책을 읽는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 역시 학교에 있다. 애초에 공부와 독서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독서는 개인 취미나 교양 영역이고, 공부는 그것과 달리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유포시켜왔다. 사실 예전에 비해 학교에서 독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국어 교육과정에 한 학기 한 권 책 읽기와 같은 단원도 들어와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입시나 실용성과 관련된 책이 아니면 스스로 찾아 읽지 않는다. 또한 여전히 관리자들은 수업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는 행위를 노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책을 읽지 않다 보니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힘들다. 머리와 마음속에 맴도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내 것처럼 쓸 수 있는 어휘와 문장들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또한 삶과 세상에 대해 질문을 할 줄도 모른다. 독서를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데,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는 악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콩도르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배치를 거스르며 전혀 다른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과감성, 전혀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교육부와 각 지방 교육청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창의성 교육 아닐까? 우리 시대 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병원 없는 사회를 만들 방법, 가족이 해체된 이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 대안 제시 등은 제대로 된 창의성 교육에서 도출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여전히 수동적이고 조심스럽다. 기존의 가치관과 이념을 철저하게 따르도록 학생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 상명하복이 얼마나 철저히 지켜지는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아무런 비판도 없이 그저 수행하기 바쁘다. 교직사회가 현장의 능동성을 확보하기가 이렇게 힘든데 아이들에게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강도 높은 학습의 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활동을 통해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과 창의성을 기르도록 할 수 있을까. 교육부에서는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성 함양을 위해 다양한 교육과정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유행처럼 삶 쓰기, 디베이트 토론, 책 쓰기, 인문학 동아리 등의 활동이 돌고 돈다. 하지만 그전에 학생들이 삶과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의심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학교의 존재 목적부터 새로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보다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와 세상을 보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의문을 존중하는 풍토가 정착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 활동도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우기보다는 그저 학교 밖을 한 번 벗어날 수 있다는 설렘을 주는 레저 활동에 불과할 것이다.
고전에서 배우는 공부법
학교는 20세기 초 근대 국민 국가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중세 신분제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국가가 요구하는 근대 시민으로 재탄생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학교였다. 따라서 학교식 공부의 대안을 꿈꾼다면 근대 제도 교육의 틀을 넘어서야 한다. 탈근대적 모색에 대한 방법 중 하나가 ‘고전'을 읽는 것이다.
고전을 읽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고전이 지금까지 고전이란 이름으로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당시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통용 가능한 인생과 사유의 비전을 제시하는 혁신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과거로부터 왔지만 앞으로 우리가 겪을 미래 시간에 대해 예고해 준다. 내가 가진 한계를 깨고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전 읽기가 필수이다.
그래서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쉬운 책은 덮으라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건 저자의 수준이 나와 같다는 뜻이고, 이런 책에 몰입하여 고전을 멀리하는 것은 게임 중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편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빈민들에게 인문학 공부를 강조했다. 먹고살기로 어려운 판에 웬 인문학? 그는 빈민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박탈당한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라 보았다. 또한 빈민운동이란 빈민들 스스로 인생을 성찰하고 세상을 탐색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철학적으로 무장하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공적인 영역까지 목소리를 내며 연대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빈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뭔가 다르게 살고 싶으면 고전을 읽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오래된 과거의 책이지만 동시에 미래에도 통용되는 비전을 담고 있는 고전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삶의 지혜와 인생의 비전을 키우는 것,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호모 쿵푸스의 전략이다.
앞서 언급한 제갈량과 허생의 예를 통해 독서는 삶의 지혜뿐 아니라 비전도 열리게 함을 알 수 있다. 유비는 초야에 묻혀 있던 제갈량을 어떻게 알아보고 삼고초려했을까? 또한 변부자는 허생의 무엇을 보고 만 냥을 빌려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두 사람에게 뿜어져 나오는 기운과 내공 때문이다. 즉, 책을 통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종류의 신체가 된 것이고 고도의 감응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학년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담임인 나를 닮아 간다. 그렇다면 책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책을 읽을수록 거기에 담긴 기운이 내 몸 안에 축적되는 것이다. 책을 반복해서 읽을수록 책을 쓴 저자의 결이 내 몸에 베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 독서를 통해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지으면 사랑도 따라온다. 엉망인 삶에서 멋진 사랑이 탄생할 리가 없다. 또한 삶에 대한 통찰력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상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사랑을 지속할 힘과 에너지가 충만해야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운명적 사랑을 하고 싶으면 내가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어줄 만한 능력을 가지면 된다. 이것을 터득할 길은 독서뿐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나의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 나에게 독서를 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는 순간이다.
공부는 함께 해야 제 맛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의 공부는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공자, 부처, 자희, 양명, 연암을 따르는 학인들의 그룹은 코뮌이라 부를 수 있다. 코뮌은 스승과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앎의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집합체를 말한다.
그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학교를 16년을 다녔음에도 평생을 좌우할 사제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따르고 싶은 스승을 찾아 다시 학교로 가더라도 학교라는 틀 안에서 스승과 도반의 관계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하지만 학교 밖에도 멋진 스승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나를 이끌어 주었던 존재들은 있었다. 군 생활하며 만났던 선임 수병이나, 직장 생활에서 만났던 동료들, 블로그를 통해 소통하는 이웃들 중에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나의 인복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불어 내가 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함께 모여 고전을 읽고 같이 토론하고 그 결과물들을 다양한 놀이로 만들어 내는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다. 몇 년 전부터 어설프게 학생들의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 주기 위해 동아리 활동을 조직했다. 사실 학생들보다 그 모임을 조직하고 운영해 나가는 내가 훨씬 더 많이 공부를 하고 있다. 아이들과 교사인 나 역시 아는 만큼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동아리를 잘 꾸려 나가고 싶다. 동아리 활동을 지식과 지혜의 축제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 자신이 썩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게 하고 싶다.
최고의 공부법 - 암송, 구술, 글쓰기
한편, 저자가 강조하는 공부 방법은 암송과 구술이다. 암송이라? 예전에 청산별곡, 용비어천가, 관동별곡, 기미독립선언서 같은 작품을 통째로 암송하는 과제가 있었다. 수업 시간 내내 1번부터 55번까지 순서대로 작품을 암송하고 제대로 못할 경우 선생님께 몽둥이로 맞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모범생이든 농땡이든 맞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외웠었다. 그 당시의 나는 무식한 80년대 공부 방법이라며 국어 선생님을 욕했었다. 그런데 이런 주입식 방법인 암송이 학교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공부 방법이라고 한다. 우리는 처음 사람을 만나거나 대할 때 여러 가지를 통해 그 사람의 깜냥을 짐작한다. 그중 하나가 목소리다. 누구나 어떤 사람의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목소리만을 듣고 상대에 대해 파악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 목소리의 내공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 방법이 어릴 때부터 낭송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낭송할 때의 텍스트를 인생과 우주를 논하는 수준 높은 글로 선정하자는 것이다. 그런 소리들과 접속하면 머리가 좋아질 뿐 아니라 신체도 건강해진다고 한다. 사실 아직은 암송을 나 스스로 어떻게 실천할지와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공부법 중 하나가 구술이다.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구술이 좋은 공부 방법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학생들 같은 경우 친구들과 이야기는 매일 하면서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은 의외로 떨어진다. 매년 수업 시간에 책을 읽고 난 뒤에 서평을 쓰고 그중 1~2가지 단락을 골라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학급의 3분의 1 정도의 학생들이 책의 내용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표현 스킬의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적 수준에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게 없으면 할 말도 없다. 아이들이 면접 가서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독서와 독후 활동이 중요하다. 또한 나 역시 구술을 통해 좋은 효과를 본 적이 있다. 복학하고 나서 2년 동안 꽤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그 성적을 받을 만큼 학점에 욕심이 있어 생활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공부한 것도 아니었고, 성실하게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 방법이 좋았던 것 같다. 현재 D고에 근무하고 있는 대학 동기와 함께 자주 공부를 했었다. 각자 파트를 나누어 공부한 다음 서로 돌아가며 공부한 부분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시험기간에 혼자 많은 분량을 외우기도 벅찬데 언제 서로 이야기할 시간을 확보하냐고 면박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구술 방법으로 엄청난 효과를 보았다. 구술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절단하고 수집한 것을 머릿속에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지식에 ‘서사’를 입혀 머릿속에서 재구성한다. 이 방법은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오래 기억하고 답안을 서술하는 데는 훨씬 효과적이었다.
또한 우리는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두 가지를 욕망한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기를, 그리고 내 말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를.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욕망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술 능력은 리더십으로 연결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의 주제로 엮으며,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구술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룹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것이다.
공부 방법의 마지막 과제이자 최종 보스, 바로 글쓰기다. 독서와는 차원이 다른 과제이다. 나 역시 작년부터 자기 계발을 결심하고 난 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글쓰기 과정에 치열함이 빠져 있다는 반성이 저절로 들었다. 저자는 대학원에 들어가 첫 리포트를 발표할 때의 참혹함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 이 책 저 책에서 베꼈다고 한다. 당연히 선배들에게 쓴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예전 학창 시절 소설 연구반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학부생들끼리 같은 소설을 읽고 소설에 대해 토의 및 토론을 하는 활동이다. 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을 읽어 와야 하고, 발제를 맡은 사람은 발제지를 만들어 와야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작품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을 이것저것 조금씩 베껴서 발제지를 만들었다. 심지어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시범수업을 맡았을 때도 윤흥길의 ‘장마’라는 소설을 나의 시선이 아닌 여러 전문가들의 눈으로 걸러진 글들을 짜깁기해서 발표했었다. 그때 나이가 아무리 어린 스무 살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글을 쓰기 전 자료들을 참고할 때 자신의 눈으로 재구성하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차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보고 또 보고 반복해서 보며 밥 먹듯이 봐야 한다. 문득, 지금의 내 방식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현재의 나는 독서습관 기르기가 최우선이므로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한 내용 정리 및 꼭 기억해야 할 대목, 내 경험 및 견해 등을 적당히 버무리는 수준의 글쓰기를 계속해 나가야겠다.
그리고 저자가 두 번째로 겪게 되는 글쓰기의 고충은 ‘논리’였다. 착상은 흥미롭지만 논리가 거칠다는 것이다. 논지가 뒤죽박죽이거나 말이 길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 후 하나의 논리로 관통하는 글쓰기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저자는 자신의 글을 읽은 독자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지금까지와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너무 공감되는 대목이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독서를 통해 내공을 쌓고, 다시 글쓰기를 통해 정신과 신체를 단련하며, 나아가 용기 있게 배운 바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에필로그
관료제에 찌들어가는 학교의 억압적 구조, 교사를 바라보는 사회의 냉혹한 시선, 자기 자식만 챙기려는 이기적인 학부모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는 아이들, 교사로서 의미 있게 잘 살기가 참 척박한 환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 탓만 하는 불만론자가 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개척한 방법이 바로 공부이다. 독서를 통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내 생각에 힘을 보태어 줄 책을 만났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는 나의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이 되어 주었다. 나는 적어도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의 고단함을 핑계로 본인은 공부를 접었으면서 자식에게 공부에는 때가 있다며 학창 시절 동안 (입시를 위한) 공부만 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나부터 열정적으로 공부할 것이다. 진심으로 공부를 놀이처럼 즐기고 좋아할 것이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닮을 거라고 믿는다. 또한 교사인 나부터 공부에 미치면, 나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자연스럽게 학교의 아이들에게도 전달될 거라 믿는다. 나부터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막연히 미래에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현재 내가 그토록 거부하려는 명령이자 억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배운 것들을 정리해보자. 소위 ‘철밥통’이라고 불리는 직장을 가진 내가 마흔 살의 나이에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어 고가의 아파트나 외제차를 사기 위해서도 아니고, 출세하여 교장이나 전문직에 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고도의 감응력을 가진 내공 있는 사람이 되어 나를 만날 사람들과 학생들에게 더 많이 퍼주기 위해서다. 언젠가 최고의 경지에 올라 퍼준다는 느낌조차 없이 퍼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된다면, 내 인생에서 언젠가 찾아올 최후의 순간에 미소를 지으며 눈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막 벅차오르기 시작하고, 독서와 공부에 대한 열정이 다시 샘솟는다. 오늘도 공부하자~ 그리고 남 주자! 마음껏 나눠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