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소년이었던 저는 늘 서울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이 있었습니다. 영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구에 있는 대학을 졸업해 지금까지 쭉 대구에서만 살았습니다. 군 생활마저 경남 진해에서 했으니 경상도 땅을 벗어난 적이 없었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 저의 꿈은 서울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 진학이 목표였기 때문이죠.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과 서울 억양도 미리 연습했을 정도로 저의 열아홉은 당연히 서울에서 시작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첫 문턱을 넘지 못한 셈이죠. 반수를 결심하였고, 약점이었던 국어 과목을 보완하기 위해 지방 국립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또 한 번의 수능 시험은 없었습니다. 학과에 예쁜 누나들이 참 많았거든요. 그대로 학교를 다녔고, 무사히 졸업을 했고,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인생의 첫 관문에서 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 목표가 생기지 않더라고요. 이번 생은 망했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제 몸과 정신을 맡기다 보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교직은 예상보다 제 적성에 맞았습니다. 어쭙잖게 교과서 속 지식을 아이들의 언어와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것을 잘하더라고요. 다양한 매체에서 학습목표와 관련된 자료도 잘 갖고 오고요. 왜 이 단원과 학습목표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도 매 순간 놓치지 않으면서,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빵 터질 수 있도록 진지한 유머도 준비했습니다. 경력이 쌓이자 반 학생들과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친하게 잘 지냈습니다. 최소한 학생들에게 적어도 1년이 지난 후에 저 사람이 우리 담임이라서 또는 우리 국어 선생님이라서 불행했다는 말은 듣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업무를 맡더라도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학교라는 곳에서 내가 못할 일은 없다는 거만한 생각까지 갖고 있었죠. 어쩌면 제가 꿈꾸었던 목표가 아니었기에 눈앞에 놓인 일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해야 할 직장과 제가 맡은 일들을 우습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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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살, 제법 건방졌던 교직 5년 차 시절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끝이 났고 개학까지는 주말을 포함해 5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갑자기 명문 대학에 진학했던 친구들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와 고려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한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참고로 그 둘 모두 저처럼 영천소년이었던 친구들입니다. 무턱대고 전화했죠.
"친구야~ 내 OO이다. 얼마 만이고. 얼굴 본 지 한 10년 됐나? 내가 내일 서울 한번 가 볼라 하는데, 시간 괘안채? 별일 있는 건 아니고, 니 보고 싶어서 가는 기다. 내가 시간 맞춰 니 있는 곳으로 갈 테니 잠깐 얼굴이라도 함 보자."
광복절 전 날인 8월 14일에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이미 결혼을 해 아이도 있어 점심때 만났습니다. 변호사가 되었으니 맛있는 거 사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청국장을 사주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더 비싼(?) 디저트를 사주었습니다. 뭐 얻어먹으러 간 것은 아니니까 섭섭하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장난기 많고 개구쟁이였던 친구였는데 제법 진지한 사람으로 변해서 좀 놀랐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외로울 거라 걱정했는데 벌써 누군가의 남편과 아빠가 되어 있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오랜만에 만났기에 궁금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을 어떠했는지, 사법고시 준비가 힘들지는 않았는지, 군대는 어디 갔는지, 아내는 어떻게 만났는지, 일은 할 만한지, 요즘도 축구 좋아하는지 등. 하지만 아쉽게도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전 친구는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야 한다며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고향 친구뿐입니다. 전 날 연락하고 무작정 찾아갔는데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해주네요.
첫 번째 친구와 헤어진 후 두 번째 친구를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남았습니다. 회사원인 그 친구는 밤 9~10시가 되어야 퇴근한다고 하더라고요. 두 번째 친구는 아직 총각이라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해 늦게 만나도 상관없었습니다. 만나기로 한 예정 시간까지 무려 8시간이 남아 있어 수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수원 화성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수원 화성을 둘러보며 친구와 시간을 맞춰 다시 서울로 이동할 계획이었습니다. 수원 화성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갑자기 회식이 생겨서 어떡하지.
괜찮다. 그럼 회식 끝나고 보면 되지. 내가 니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거 못 기다리겠나.
근데 우리 회식 꽤 늦게 끝난다. 니 못 기다린다.
그래도 내일 광복절이니까 괜찮다. 너거 집에서 자고 내일 놀면 되지.
근데... 나 내일도 회사 가야 된다.
어! 정말? 그래. 그라믄 다음에 보자. 덕분에 서울 구경 잘했으니깐 나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마무리 잘해라. 그라믄 나 대구 내려간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
여기까지 왔는데 친구를 볼 수 없다는 섭섭함보다 괜히 내가 올라와서 신경 쓰이게 했다는 미안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휴일까지 일하는 친구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서울에서의 모든 직장 생활이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참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나와도 신입 사원으로서의 삶은 참 빡빡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치열함을 선택했을 것이고,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른한 살 여름 방학의 끝을 서울 나들이로 보냈습니다. KTX 기차 시간도 맞출 수 없어 무궁화호를 타고 대구까지 갔습니다. 덕분에 많은 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냈고, 그날 하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명문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에 비해 대구에서 교직 생활을 하는 저의 삶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마음 한구석에 실패했다는 자격지심이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제 삶과 제 일에 대한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떨어지다 보니 행복하지도 않았고요.
그래도 그때의 경험을 통해 막연하게 늘 동경해 왔던 서울 생활에 대한 환상은 깨졌습니다. SKY 대학만 나오면 남들보다 편하게 살 줄 알았는데, 제가 본 친구들의 모습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똑같이 저처럼 직장 상사한테 혼날 때도 있고, 주택 담보 대출 빚 갚고 있으며,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살더라고요. 물론 마흔을 앞둔 지금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 살고,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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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인생에 정답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은 없습니다. 남들보다 좋은 학벌과 많은 돈을 버는 직업을 가졌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저에게 주어진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삶이더냐.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을 외쳤던 니체처럼 내 삶의 매 순간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끝이 정해져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는 그의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려 봅니다.
서울 강남에서 태어난 누군가도 있고, 지방이지만 광역시에 태어난 사람도 있고,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난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특목고에 진학한 학생도 있고,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도 있고, 특성화고에 진학한 학생도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기 다른 인생입니다. 그들의 삶에 우열이 있지 않습니다.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듯이 삶의 기회도 다르게 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현재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미래의 기회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관찰하고, 남과 다른 내 안의 무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시간들로 그것을 갈고닦아야 합니다. 각자의 길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자존감이 생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블로그 글쓰기라는 영감을 준 김민식 피디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본인이 원했던 학과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본인이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찾았습니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책을 읽고 춤을 배웠습니다. 이후 회사원으로서의 직장 생활에도 실패합니다. 그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는 평생직장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절의 퇴사는 사회 부적응을 뜻했고, 그것은 곧 실패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힘들게 했던 직장을 욕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았죠. 그것이 바로 영어 공부였습니다. 또한 회사가 힘이 드니 무턱대고 퇴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어통역사가 되겠다는 계획이 있었죠. 이후 한국외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통역사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통역사라는 직업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학과의 좋아했던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MBC에 우연히 지원합니다. 그의 어릴 때 꿈은 피디가 아니었습니다. 피디를 목표로 준비한 적도 없었고요. 하지만 재미가 있어서 꾸준히 했던 독서와 영어 공부가 무기가 되어 그는 MBC 피디가 됩니다.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과 같은 드라마들을 히트시키면서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정권의 하수인이 된 MBC 사장에게 찍혀 더 이상 프로그램을 맡지 못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회사와 세상을 원망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권력에 저항하되 스스로의 삶은 누구보다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그동안 삶을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했던 영어공부, 글쓰기, 여행이란 주제로 자기 계발 3종 세트 책을 썼고, 어린 시절 꿈이었던 작가가 됩니다. 그의 삶을 통해 인생에 정답이 없음을 배웁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습니다. 작가가 된 그를 부러워하기 전에 10년 동안 매일 꾸준히 글을 썼던 그의 하루하루를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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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사입니다. 학생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무기력하게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선물처럼 여기며 주체적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학생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말로만 상황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너희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라고 하지 말고, 저의 행동과 삶으로 학생들에게 보여주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저부터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에게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긍정적인 감화를 줄 거라 믿습니다.
저는 무수히 많은 단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만의 빛나는 장점을 찾아 그것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명문대 진학, 높은 연봉, 비싼 아파트, 높은 지위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삶이 브라운관 속이나 인스타그램 속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인생도 멋지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인생도 충분히 멋이 있습니다. 충실한 매일의 삶 속에서 자존감을 찾고,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