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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Sep 14. 2021

그때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나'를 찾아가다

© Comfreak, 출처 Pixabay


최악이었던 첫 담임의 기억



교직 생활 첫해 어느 신입사원 못지않게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은 좋은 수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때부터 구상했고, 교생실습을 통해 배웠던 여러 가지 수업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수업에 능숙하지는 못해도 매번 최선을 다해 수업을 준비했기에 아이들 앞에 당당하게 섰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수업에 방해가 되는 행위는 일체 허용하지 않았으며, 내 수업 때 잠을 자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의 행동 또한 용납하지 못했다. 만우절이나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준비한 이벤트조차도 수업 시간을 빼앗는다고 정색하며 못하게 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나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것이다. 잔뜩 기대하며 이벤트를 했는데 그만하고 빨리 교과서를 꺼내라고 말하는 융통성 없던 나는 학교에서 가장 어린 스물여섯 살의 남교사였다.


담임교사로서는 더욱 유연함이 없었다.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서 교사는 항상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시도 때도 없이 교실에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학생들의 입장에서 배려해 주기보다는 나의 입장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려 했다. 또한 잘하고 싶다는 나의 과욕을 아이들은 폭력으로 느꼈을 것이다. 체육대회 응원이든 중간고사 성적이든 내가 담임인 이상 우리 반은 무엇을 해도 다 잘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 학생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인지 그 경중을 판단하지 못했고, 그저 뭐든지 최전선에서 열심히 하자고,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밑도 끝도 없이 열정만 강요했다. 나의 노력과 정성으로 나를 만난 학생들이 개과천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서 빨리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사명감만 가득했다.


하지만 나의 성급함과 집착은 나를 더 나쁜 선생님으로 만들었다. 퇴근 이후와 주말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항상 학생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부모가정 학생들에게는 자주 전화를 해 식사는 했는지 집에 어른들은 계신지 확인했다. 시험 기간 동안에는 반 전체 학생들에게 전화를 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우리 반 1번 강●●부터 36번 현●●까지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렸다. 우리 반 학생들이 조금 더 성장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교문 밖을 벗어나도 여전히 내 정신과 영혼은 학교에 매여 있었다. 심지어 월요병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주말에 하루 정도는 별 다른 일이 없어도 학교로 출근했다. 나는 365일 24시간 내내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심히 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와야 했지만 담임교사 첫해 아이들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나의 판단과 생각만이 그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다는 큰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 실수였다. 내가 내뱉은 말에 아이들이 반드시 따라 주기를 바랐고,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폭언과 체벌을 가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체벌이 가능했다.) 아침 조회 전 학생들의 독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반장을 대표로 불러내 출석부로 머리를 때렸던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지금도 반장에게 한 번씩 연락이 오는데 그때마다 출석부 사건이 생각이 나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폭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첫해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내가 감시와 통제로 그들을 대한 만큼 아이들도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들 역시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담임교사인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1년이 지난 후 나는 부끄럽고 비통한 심정으로 처음 맡았던 아이들을 급하게 떠나보냈다.


아이들과의 마지막 날,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앉아 지난 1년을 떠올려 보았다. 계속 교직에 있으려면 일단 내가 잘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다른 사람 핑계를 대면 안 되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들을 롤 모델로 삼은 것이 실수였다. 90년대 후반 남자아이들에게 통했던 방식이 2000년대 후반 여고생들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물론 사범대에서는 학생 지도나 학급 경영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억지로 엄하고 무섭고 진지한 척 연기해봤자 아이들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다음 해에 만날 새로운 아이들 앞에서는 조금 더 나를 내려놓고 그들을 믿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첫 담임을 했던 1년으로 인해 세상 일은 시험 성적과 달리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노력한 만큼 학생이 움직여주지 않을 수도 있고, 나의 인풋보다 훨씬 더 많은 성장을 보여주는 학생도 있었다. 나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준비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무리한 인풋은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교육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입장과 수준을 인정하고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 지금 당장 바뀌지 않는 모습에 조급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지도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했다.




통제와 감시 그리고 획일화



교직 생활 초반에는 담임교사로서 시행착오가 나를 힘들게 했다면, 어느 정도 담임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4년 차 때부터는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학교 문화가 나를 괴롭혔다. 학생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던 교사가 관리자가 되면 똑같이 동료 교사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학생들을 똑같은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들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믿는 교사가 관리자가 되면 선생님들을 신뢰하며 그들의 역량을 믿고 맡길 수 있다. 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나의 교육 활동까지 일괄적으로 통제하려는 학교 문화와 관리자들에게 지쳐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업 시간 도중에 교실에 있던 나를 굳이 불러내 커튼을 가운데로 정리하고 수업하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현기증이 났다. 교장선생님이 나가고 난 뒤에 아이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눈치를 보며 "선생님, 커튼 칠까요?"라고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커튼의 용도를 물었다. 권위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커튼의 용도가 햇빛을 막는 거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 용도에 맞게 쓰자며 그대로 커튼을 쳐 놓은 상태로 남은 수업을 이어 나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흥분한 상태로 교무실이 아닌 교장실로 찾아갔다. 다시는 내 수업 때 교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중한 공강 시간을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는데 사용해야 했다. "네, 교장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답하지 않으면 대화는 끝없이 이어질 기세였다.


이때를 계기로 조금씩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나름대로 오랜 기간 교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분노하지 않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 당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오랜 기간 건강하게 복무하기 위해 관리자, 동료 교사, 학부모, 학생에게 어떤 악담을 듣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멘탈이 필요했다. 과도하게 나의 감정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과하게 기뻐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내면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관리자의 결정에 대들지 않았다. 버릇없이 행동하는 학생을 보며 못 보고 못 들은 척 눈을 감았고, 이상한 학부모를 상대할 때는 똥 밟았다는 생각으로 전적으로 그들에게 맞추었고, 굴욕적인 상황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나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침착하고 차분하며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감정이 무뎌지는 것이 곧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도 점점 사라졌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보면 당연히 비난도 듣게 된다. 가령 우리 반 학생들과 주말을 이용해 대구 주변에 캠핑을 가려고 해도 옆 반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게 된다. 중국 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방학 내내 중국에서 머물게 된 나는 여름 방학을 활용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자기소개서 및 면접 특강 및 실습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하게 지냈던 동료 선생님의 한 마디가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좋다. 근데 박 선생님 다음에 우리 학교에 오실 국어 선생님도 배려해 줘야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앞으로 모든 교사가 방학 기간을 이용해 무료로 자소서 특강을 해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의욕적인 것은 좋은데 한 번만 더 생각해 봐라."


나는 그 비판에 맞서 내 생각을 조정하거나 상대를 설득할 용기는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도 생각을 접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탈하게 기존의 관습에 따라 직장 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작은 것 하나도 관리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고, 동료들의 협조를 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하면, 혼자서 튀려고 한다는 동료 교사들의 험담을 견뎌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학교와 조직이 지닌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면을 엿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군사독재 정권 때 완성된 학교의 폭력적인 문화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대안도 없으면서 불만만 늘어났다. 퇴근 후에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직장 상사를 비판하거나 교직 시스템을 험담하는 일이 많아졌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점점 협소해져갔다. 직장이 나의 전부였기에 나와 같은 업이 아닌 친구와는 점점 이야기할 부분이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어느 순간 내가 가진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내면의 평화도 깨졌고 자존감도 점점 낮아졌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직장에서 나름의 대비책을 찾았으나...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모든 시행착오를 겪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성찰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학교라는 곳에서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과 마인드를 찾게 되었다. 우선 내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겼다. 그리고 조직에서 요구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의 경중을 따졌다.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에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에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잡무는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 그리고 아껴둔 에너지로 나와 학생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판단이 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힘을 분산시켰던 이 방법은 꽤 효과가 있었다. 다시 학교생활이 재미있어졌다. 매주 주말마다 동아리 학생들과 디베이트 실습을 하는 것도 즐거웠고, 학급의 학생들과 다양한 사제동행 행사들을 하며 추억도 쌓았고, 교육청 일이나 교과서 관련 일도 재미있게 했으며, 담임 업무에 투자한 시간들의 절반 가까이를 학급문집을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나와 학생들의 성장을 위해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나를 의욕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초창기 때와 달리 매년 학교생활을 반복하며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커졌다. 나와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조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과신하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집착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항상 신뢰하는 눈빛과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졌다. 적어도 아이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이성보다 감정에 지배당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들이 지금 당장 바뀔 거라는 성급한 마음은 버렸고, 언젠가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만 간직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무리하지 않으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학생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만은 궂게 지키고자 했다. 동료들과의 관계나 학교 업무에 있어서도 노련해졌다. 7년 차가 되면서 크게 화를 낼 일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나의 하루는 평화롭게 흘러 갔고 매일 무탈하게 지나갔다. 어느덧 일상은 비슷해졌고 반복되었다.


30대 중반이 되어 나를 돌아 보았다. 나에게는 '교사'의 역할밖에 없었다. 학교 업무가 익숙해지자 사회로부터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싶었다. 마침 서른셋의 나이였기에 결혼이라도 해서 '남편'과 '아빠'라는 역할을 맡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은 나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인생에 매너리즘이 오기 전에 선제적으로 나섰다. 나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 머나먼 중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교사라는 나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교직이 주는 안정감은 따뜻했고, 그곳에서도 나는 '교사 박형준'이라는 하나의 역할에만 매달리며 살아갔다. 당시 선배 교사에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 않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나는 고3 담임을 맡아 매일 밤늦게 퇴근을 했었다. 나만 열심히 한다는 착각을 했고, 나처럼 직장에 올인하지 않고 정시 퇴근을 지키는 동료 교사들을 나도 모르게 미워했던 것이다. 그때 내 말을 들은 선배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우리 학교 선생님들 중에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자기가 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수업하고 학생들 지도를 하고 있다. 박 선생이 지금은 총각이라서 학교가 전부이겠지만, 대부분 선생님들에게는 퇴근 후에도 가꾸고 지켜야 할 다른 삶이 있다. 그리고 교사가 아닌 다른 모습의 삶도 건강해야 궁극적으로 더 오랜 기간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다."


퇴근 후에 주로 스크린골프를 치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던 나는 선배의 말에 뜨끔했다. 중국에 가서도 나는 동료들과 배터지게 안주를 먹으며 술을 마시는 일을 즐겼다. 과음은 그다음 날의 시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물론 취업 후에 새로운 취미 생활도 만들었고, 나름 뭔가를 해보겠다고 새로운 시도는 꾸준히 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일관되게 하지 못했고 대부분 즉흥적인 퍼포먼스로 끝나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 어떤 분야에서도 아무런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나만의 시각도 없이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평가했고, 타인의 욕망에 따라 나의 시간을 소모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웬만하면 잘리지 않는 교직이라는 철밥통 '직장'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과 나의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에 올라서다


중국 생활 이후 36살의 나이에 결혼에 성공했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정시 퇴근을 하더라도 또 다른 출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술 한잔하러 나가도 되냐고 아내에게 물어본 부탁이 말다툼으로 번졌던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교사라는 역할 외에 남편과 아빠라는 역할이 추가되었다. 세 가지 모두 잘 해내고 싶었고, 내 삶에 너무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직장과 아들이 곧 내가 존재해야할 모든 이유는 아니다. 언젠가는 나도 직장을 떠나게 될 것이고, 아들은 자신의 삶을 찾아 내 곁을 떠날 것이다. 내 삶에서 직장에서의 역할과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아빠가 된 이후 매일 열심히 살았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신작 영화 한 편 보기도 힘들었고, 골프와 농구를 비롯한 각종 취미 생활을 그만 두어야 했다. 물론 아빠가 된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쩌다 아내의 허락을 받아 밤 늦게 술 마시러 나가는 것이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학교에서는 교사로, 집에서는 아빠로 매일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했는데 뭔가 나아진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이었다. 변화가 없는 일상은 지루했고, 나의 성장도 멈춘 느낌이었다. 마흔을 앞두고서야 진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아들에게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그럴듯한 말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생에 대한 나만의 가치와 기준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때 '퇴사'가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안정된 공직이나 대기업 직장을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다니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간다는 스토리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퇴사 이야기는 나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실제로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안정적인 학교란 직장을 떠났던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내가 아는 지인 중에는 딱 3명이 있다. 늦게라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학교에 사표를 낸 사람 말이다.) 나 역시 한 번뿐인 인생에서 교사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욕심을 실천하기에 나는 용기와 능력이 부족했다. 지루한 삶이 지속될수록 나는 나의 무능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함이 반복되며 아내와 아들에게도 좋은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저 수동적으로 운명이란 큰 흐름이 이끄는 대로 내 몸과 영혼을 맡기며 살았다.


그런 나에게 교사가 아닌 다른 자아를 발견하게 해 준 소중한 취미 생활이 바로 독서이자 글쓰기이다. 퇴근 후 2~4시간 정도 매일 글을 썼고,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공부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행위는 꽤 즐거웠다. 하루 24시간 중 일정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 행복했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더라도 나를 둘러싼 상황이 더 좋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그 확신이 삶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미숙하지만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생산자의 삶을 살아가며 잃어버린 자존감도 찾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정말 소중하지만, 내가 단지 그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정신적인 위안도 얻었다. 블로그와 브런치에서 '영천소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제2의 인생을 얻게 된 것이다. 경제용어를 포스팅하며 경제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설명을 잘했다고 칭찬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괜히 내가 경제 전문가가 된 듯한 착각을 했다. 여행 리뷰를 올리며 순간 여행 작가가 된 듯한 기분에 빠졌다. 아이와의 일상을 올리며 육아 전문가가 되기도 하고, 서평을 올리며 독서 평론가가 되기도 한다. 브런치에서는 '작가'리는 호칭을 들으며 '그래, 매일 글을 쓰면 그게 곧 작가지.'라며 자신을 격려했다.


이제 나는 직장인의 삶에만 얽매이지는 않는다. 학교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블로거, 브런치 작가, 러너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 교사라는 직함 역시 가장 중요한 나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에 나의 자존감에 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시간 동안 직장에서 최선을 다한다. 다만 나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직장에 갈아 넣지는 않을 뿐이다. 사실 하루 24시간 중 3분의 1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와 육아도 마찬가지다. 블로그를 통해 내 삶을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내 모든 삶이 블로그 전시를 위해 흘러가는 것은 곤란하다. 또한 나를 가꾸는 시간을 포기하며 아이에게 올인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아이에게 집착하지 않으려면 나부터 지켜야 한다. 물론 나는 주말부부라 이 부분에 대한 걱정은 불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주말이라도 아이와 단둘의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아내가 아이에게 올인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그녀의 개인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주는 것이다.


내 삶의 균형을 잡으며 직장, 가족, 취미생활 모두에서 꿈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또 다른 꿈을 갖게 되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자기혁명을 꿈꾸게 해 준 故 구본형 선생이 한 말이 있다.



꿈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꿈의 실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즐거움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통해

내 꿈의 의미는 확장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기계처럼 살아가는 내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즐기기만 했던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의 하루를 사랑하고, 나의 삶을 사랑한다. 매일 나를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일상은 지루한 일의 반복에서 벗어났다. 오늘 하루는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해야 나의 가족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나의 일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줄 수 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외부에 있지 않았다. 바로 내 안에 있었다. 글쓰기를 통해 내 안의 행복을 찾게 되었고, 이제 나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 단 2시간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쏟아붓는 일 자체가 삶의 활력이며 즐거움이 되었다. 앞으로도 더욱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아침에 일어나 매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장 먼저 할 것이다. 계속해서 러닝을 즐기고, 좋은 책을 읽고, 글을 통해 내 생각을 다듬으며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


이번 주 종영을 앞두고 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란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 마음껏 캠핑 장비를 구입하는 송화를 익준이가 부러워했다. 송화는 의사로서의 일과 아빠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익준이 안쓰러웠다. 그런 익준에게 송화가 물었다.


"익준아! 요즘 너를 위해 뭘 해 주니?"


송화를 사랑하는 익준이의 대답은 "나를 위해 너랑 같이 밥을 먹어."라는 대사였다. 글의 마무리로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묻고 싶다. 오늘 하루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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