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읽고
혹시 잠들기 전에 자기도 모르게 이불속에서 발길질을 한 적이 있으신가요? 안 좋았던 기억이나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 적은요? 꼭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더라도 오래전에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이 한 번씩 떠올라 두고두고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흑역사를 갖고 있지요. 저 역시 지금 다시 생각해도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잘못과 실수들을 많이 하며 살았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사건은 최근까지도 저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주말을 이용해 가족 모두 경기도 안성에 있는 스타필드에 방문을 했습니다. 안성 스타필드에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놀이터, 서점, 장난감 가게 등이 있습니다. 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더라고요. 코로나 시국에 밖에서 외식을 하기가 부담스러워 점심은 집에 가서 먹기로 했습니다. 지금 출발해도 천안 집에 도착하면 오후 2시가 되겠더라고요.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습니다. 서둘러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스타필드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아이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 손을 씻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랜 시간밖에 있다 보니 예민해진 아이는 저와 화장실에 함께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강제로 아이를 둘러업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죠. 아이는 더 격렬하게 반항을 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고 손을 씻기는 것에만 집중을 했습니다. 그 순간 아이가 저의 손을 쳤고, 제 손은 수도꼭지에 부딪혀 멍이 들었습니다. 순간 화가 솟구쳐서 아이에게 크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의 목소리로 인해 화장실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화장실 밖에 있던 사람들까지 다 놀랐습니다. 우악스럽게 우는 아이를 둘러업고 화장실 밖을 나가니 아내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아이가 손을 안 씻으려고 해 어쩔 수 없었다며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씩씩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마음이 좋지 않더군요. 일단 주말 나들이를 망쳐 버려서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아들에게 아빠가 너그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남은 주말은 더욱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맞춰주었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충실히 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내와 아들은 안성 스타필드에서의 사건을 잊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요일 밤, 대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그 사건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이는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갑니다. 반대로 부모는 미래도 함께 생각합니다. 그래서 늦게까지 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유치원에 가야 하니깐 지금 자야 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를 훈육하는 과정에서는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한 번 말했다고 바로 알아듣지는 못하잖아요. 아이의 욕망을 존중하지 않고,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낸 제 자신이 무능하고 나쁜 아빠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이의 감정에 공감하고 달래 가며 손을 씻겼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기차 타고 내려가는 내나 그 문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내가 그렇지 뭐. 사람이 쉽게 바뀌나. 나는 아이 앞에서 자신의 감정도 쉽게 컨트롤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어른이야.'라는 결론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한 권이 반복적으로 자기 파괴를 일삼던 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아잔 브라흐마라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승려가 쓴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108가지 일화로 수많은 감정들 속에서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첫 번째 일화를 간략히 소개할까 합니다.
우리는 절 짓는 일이 시급한 가난한 승려들이었다. 인부를 고용할 형편은 되지 않아 스스로 집을 지어야 했다. 그중에 벽돌 쌓는 일은 특히 쉽지 않았다. 명색이 수행자라 참을성을 갖고 최선을 다해 벽돌을 쌓았다. 마침내 첫 번째 벽을 완성했다. 한 발자국 물러나 감탄의 눈으로 벽돌을 바라보던 순간 중간에 있던 벽돌 두 장이 어긋나게 놓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두 벽돌만이 약간 각도가 어긋나 있었다. 그 벽돌 두 장이 벽 전체를 망치고 만 것이다. 솔직히 그 벽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토록 공을 들였는데 일을 망쳤으니 당혹스러웠다.
절을 다 짓고 서너 달쯤 시간이 흘렀다. 한 방문객과 함께 절 안을 거닐다가 그 벽을 보고야 말았다. 그 남자는 무심코 정말 아름다운 벽이라고 말했다. 나는 혹시 벽 전체를 망쳐 놓은 저 잘못 놓인 벽돌 두 장이 보이지 않냐고 물었다. 그가 다음에 한 말은 벽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측면에 대한 나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두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나는 석 달 만에 처음으로 그 두 개의 실수가 아닌, 벽을 이루고 있는 훌륭하게 쌓아 올린 수많은 벽돌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벽은 전혀 흉한 모습이 아니었다. 방문객이 말한 대로 '매우 아름다운 벽'이었다. 스무 해가 지난 지금 나는 그 잘못 얹힌 벽돌 두 장이 어디 있는지도 잊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더 이상 그 벽에서 잘못된 벽돌을 발견할 수 없었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24~28쪽 요약)
누구나 잘못 놓은 벽돌 두 장을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저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그러하고요.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완벽해지려고 애씁니다. 제대로 놓인 벽돌 998장보다 잘못 놓인 벽돌 2장에 온통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혈기 왕성했던 스물네 살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학과 집행부에서 총무를 맡았습니다. 학과 행사에서 돈을 쓰는 것이 총무가 해야 할 일이었지요. 1년 행사 중에 가장 큰 행사가 학술제와 학술답사였습니다. 학술제의 메인 행사 중 하나가 전문가 초청 강연이었습니다. 강연 홍보를 위해 사범대 신관과 우당교육관 입구에 플래카드를 걸어 놓았지요. 그날 오후에 지도 교수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플래카드에 기재된 날짜가 잘못되었으니 빨리 수정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망치로 한 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플래카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했거든요. 한 번 출력하면 끝이기 때문에 특히 날짜는 더 유심히 봤습니다. 그런데 목요일을 수요일로 기재하는 실수를 해버렸습니다. 플래카드를 새로 만드는 것은 낭비이기에 A4 용지로 '목'이라는 글자를 출력했습니다. 수위실로 가 사다리를 빌려 플래카드 위에 종이를 붙였지요. 행사일까지 비가 안 오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저의 실수는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학술답사에서도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학술답사는 4학년을 제외한 전체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함께 하는 큰 행사였죠. 첫째 날은 콘도에서 지냈고, 둘째 날은 민박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민박집에서 방 배정을 할 때 한 학번 후배들의 방을 빠뜨린 겁니다. 후배들은 잔뜩 화가 나서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냐고 저를 찾아와 따졌지요. 하루 종일 전체 행사를 진행하고 교수님들을 모시느라 진이 빠졌던 저는 소위 말하는 멘붕이 왔습니다. 후배들에게 사과를 하고, 급히 인근의 다른 숙소를 구했지요. 학술제와 학술답사 때 제가 저지른 실수는 꽤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스스로에게 납득할 수 없는 실수였거든요. 최근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이불킥을 하고는 했지요. 왜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했을까 하는 기억은 지속적으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의 그 실수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까를 떠올리며 완벽하지 못한 제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누군가 2005년에 총무 일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말하라고 하면 그 두 가지 실수만을 떠올렸습니다.
잘못 놓인 벽돌 두 장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저의 잘못된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스스로를 부족한 선배이자 복학생으로 규정했습니다. 2005년에 바르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저의 벽도 잘못 쌓은 벽돌보다 제대로 쌓은 벽돌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학과 행사에 들인 저의 시간과 노력 덕분에 많은 학우들이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고 더 많이 웃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총무라는 직책 덕분에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고, 2005학번 새내기들이 학교에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해 최고의 수혜자는 저였습니다. 선거를 통해 회장, 부회장으로 뽑힌 2003학번 후배들이 저에게 총무 자리를 제안해 준 덕분에 재미있고 의미 있게 복학 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실수와 잘못으로 당혹스러웠던 기억보다 즐거웠고 뿌듯했던 기억이 훨씬 더 많았던 2005년이었습니다.
아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말에 아이와 함께 한 이틀 중에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시간은 고작 5분입니다. 나머지 23시간 55분은 아이에게 친절하고 인내심을 갖고 아이를 기다려주었던 아빠였습니다. 자꾸 아이에게 행했던 저의 B급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저도 모르게 B급 아빠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이에게 행한 저의 잘못을 두고두고 반추하는 것은 다시는 아이 앞에서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과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또다시 쉽게 화를 낼 저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고 싶은 욕구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사람 사는 거 다 고만고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이 없습니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부자와 같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모두 엿볼 수 있습니다. 꼭 부자까지 안 가더라도 SNS 속 지인들의 삶조차 저보다 훨씬 더 화려해 보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타인과의 비교가 익숙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사람은 생존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나는 완벽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자기 계발의 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잘못된 벽돌 두 장을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완벽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요. 하지만 삶은 내 뜻대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 역시 불완전합니다. 또다시 잘못 쌓은 벽돌을 발견할 것이고,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질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끊임없이 비하하며 급기야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급기야 '뭐야! 고작 이거 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한 거였어'라는 마음으로 깊은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게 됩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완성, 완벽'이란 단어는 인간의 속성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바시에 나오는 그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도, 자신의 삶을 책으로 낸 작가들도 결함이 있고 실수를 합니다. 제가 좋아했던 마이클 조던이라는 농구 선수도 농구라는 분야 외에는 많은 약점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불완전'이란 단어가 인간과 우리의 인생과 훨씬 더 잘 어울리지요. 우리 주변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만 늘 하는 자녀를 보며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푸념을 합니다. 게임을 즐겨한다는 한 가지 속성으로 자녀의 미래까지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의 존재에 집착함으로써 나의 직장에 대한 장점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성급하게 퇴사하고는 합니다. 998개의 잘 쌓은 벽돌은 보지 못하고 2개의 잘못 놓인 벽돌에만 집착하면서 헤어지고 이혼하고 때로는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립니다. 성능이 멀쩡한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차주는 차가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차의 성능이나 외관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카시트가 좀 헤어졌을 뿐이었죠. 카시트만 바꾸면 다시 차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시트의 낡음이 차 전체의 호감에 반영되어 차를 바꿔 버리는 엄청난 실수를 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타인을 바라볼 때 낡은 카시트에만 초점을 두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 뜻대로 모든 상황을 완벽히 컨트롤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탄생조차도 우연히 발생한 여러 사건들의 결과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공정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행복한 순간만큼 힘들고 괴로운 순간도 같이 찾아옵니다. 2개의 잘못된 벽돌에 집착하듯 힘든 순간만이 내 삶의 전부이고 영원할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두려움과 고통을 느낍니다. 저는 오랜 시간 대입에서의 실패로 인해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해 왔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범대에 진학한 것을 잘못 놓은 벽돌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실패의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수능 시험을 망쳐 사범대학에 진학한 것은 잘못 놓은 벽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한편 삐딱하게 놓인 벽돌 두 장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익숙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실수,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드는 대형 사고,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착오 등은 언제든지 우리 삶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냥 실수와 잘못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 놓은 벽돌 두 장으로 인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고,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성장의 기회를 지닐 수 있으니깐요. 다만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잘못된 벽돌 두 장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제대로 쌓은 998개의 벽돌도 볼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또한 잘못된 벽돌 두 장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완벽하게 해내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을 만족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는 편안하게 내가 만든 결과물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문제에 대해 자꾸 생각하고 집착하는 행위는 사안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문제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할 때 오히려 나를 괴롭혔던 문제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누구나 잘못 놓인 두 장의 벽돌을 갖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와 상대를 평가할 때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는 잘못 놓은 벽돌보다 제대로 쌓아 올린 벽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나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져 자기 비하를 하고 싶을 때, 배우자와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미울 때, 친구와 절교하고 싶을 때, 연인과 헤어지고 싶을 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잘못 놓인 벽돌 두 장에만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닌지, 제대로 놓인 998장의 벽돌을 찾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했는지 말입니다. 앞으로 이불에서 발길질을 하고 싶을 때도 잘못 놓인 2개의 벽돌보다는 제대로 놓은 998개의 벽돌을 떠올려 봅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니깐요.
당신이 자기 자신 안에서, 상대방 안에서, 혹은 삶 전체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어쩌면 당신이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 주는 '특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당신이 오로지 그것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을 중단하기만 하면 말이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