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대한 추억'과 함께
어느새 마흔 번째 추석이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그동안 나를 둘러싼 추석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외동아들이었다. 우리 집은 큰집이었지만 우리 가족뿐이었다. 명절이라고 우리 집에 방문하는 친척은 없었다. 엄마는 혼자서 차례 준비하신다고 바빴고, 아버지께서는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한 친구들을 만난다고 정신이 없었다. 명절이라고 특별할 게 없었다. 평소처럼 나는 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히려 명절 때문에 동네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을 만날 수 없어서 짜증도 났다. 그때는 친척들로 북적거리고 또래 사촌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친구의 집을 무척 부러워했다. 우리 집에도 누군가가 방문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추석 때만큼은 먹을 것이 풍부했다. 차례가 끝나자마자 나와 동생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부터 집어먹었다. 일사불란하게 정리를 한 후에 아침 식사를 했다. 추석 아침은 늘 소고기뭇국(탕국)과 나물 비빔밥이었다. 아침 식사 후 성묘를 다녀오고, 외갓집까지 방문하면 공식적인 추석 행사는 끝이 난다. 나와 동생은 공식적 추석 행사 후에 항상 동네 오락실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지인들을 만나러 나가셨고, 엄마는 추석 이벤트를 치르느라 고단했기에 휴식을 취해야 했다. 부모님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형제는 오락실에서 신나게 게임을 하고는 했다.
게임을 무척 좋아하던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청운의 꿈을 이루어 보겠다고 고향인 영천을 떠나 포항에 있는 기숙사 학교에 들어갔다. 한 달에 두 번만 외박이 허락되었기에 늘 집과 부모님이 그리웠다. 그래서 명절은 늘 기다려졌다. 나름 편안한 마음으로 장기간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오늘은 고3 때 추석을 앞두고 있었던 일을 소개할까 한다. 수능을 두 달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나에게 이번 명절 때 집에 가지 말자고 제안을 했다. 기숙사는 추석 기간 동안 당연히 문을 닫기에 지낼 곳이 없었다. 그는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지내면 된다고 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기숙사 공사로 인해 학교 인근 독서실에서 지낸 전례가 있어서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학교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명절 기간에는 학교 식당도 당연히 문을 닫는다. 친구에게 밥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컵라면과 김밥으로 때우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으로는 고기 뷔페 가서 실컷 삼겹살을 구워 먹자고 나를 꾀었다.
아무리 고3이더라도 명절 때 집에 가면 공부하기 쉽지 않은 환경임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3~4일 내내 컵라면만 먹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보고 싶었고, 엄마가 해 주는 밥이 그리웠다. 심사숙고 후에 나는 고향에 가야겠다고 친구에게 전달했다. 실망하던 그에게 마지막 날은 조금 일찍 포항으로 올 테니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추석 연휴 동안 나는 영천 집에서 편하게 쉬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잤다. 물론 공부는 안 했다. 책은 많이 가져갔으나 명절 때도 공부를 할 만큼 모질지가 못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기숙사 앞에서 만난 친구는 많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는 게걸스럽게 고기 뷔페에 가서 많은 음식들을 먹어 치웠다. 미친 듯이 식사를 하는 그를 보며 함께 남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나와 그는 같은 고등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그와 나는 평소 모의고사 성적 패턴이 비슷했다. 우리 둘 다 '중앙'에서 출제한 모의고사에 강했고, '대성'에서 출제한 모의고사에서는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였다. 농담 삼아 우리 둘은 어떤 시험에서든 성적이 비슷하게 나왔으니, 수능 결과도 비슷할 것이고, 수능 이후에도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슬프게도 당시 수능 시험 결과에 따라 교우 관계가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능 이후 나는 그와 급속도로 멀어졌다. 처음으로 그와 나의 점수가 10점 이상 차이가 났다. 10점이면 고작 6문제 정도를 내가 더 틀린 것인데, 당시에는 그 차이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그는 명문대에 진학을 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의 자격지심은 수능 이후에도 나에게 여전히 친밀하게 다가왔던 그를 밀어냈다.
한동안 1999년의 추석을 많이 떠올렸다. 만약 당시 내가 그와 함께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추석 기간을 보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물론 3~4일 공부를 더한다고 해서 시험 성적이 크게 차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랜 기간 나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았다. 그는 수능이란 최종 도착지에 집중했고, 올인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면에 나는 수능을 두 달 앞두고도, 해야 할 일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맛있는 식사와 같은 하고 싶은 일을 더 중요시했다. 평소 그와 모의고사 성적이 비슷했다는 것은 허상이었다. 수능이라는 목표를 앞두고 있던 나와 그의 마음가짐은 분명히 달랐고 그런 작은 디테일들이 모여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꽤 오랜 기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18살을 후회했다. (참고로 나는 빠른 년생이라 고3 때 18살이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최선은 식욕과 수면욕까지 절제하며 노력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 연휴 동안 딱딱한 독서실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그는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최선의 크기는 나의 최선의 크기보다 휠씬 더 컸다.
추석을 계기로 냉정하게 나의 18살을 되돌아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나는 무척 어렸다. 당시의 나는 입시 실패라는 결과가 너무 두려웠다. 혹시라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컸다. 어릴 때부터 명석하다는 말을 곧잘 듣고 자란 나는 내가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일까 두려웠다. 나에 대한 의심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결되었고,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나의 최선을 방해했다. 만약 실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결과였기에 스스로 괜찮다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는 최선에 대해 잘 몰랐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실패에 대한 책임과 실패를 견뎌야 하는 감정까지도 오롯이 내가 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작년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하며 생각이 또 조금은 바뀌었다. 어쩌면 18살의 나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허점 투성일 수밖에 없다. 미래를 알고 과거를 보기 때문에 아쉬운 점들이 많다. 19살의 추석 연휴 때 내가 좋아하던 가족, 맛있는 음식, 친구, TV 시청 등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맞다. 그럼에도 고교 생활 전체를 보았을 때 성실하게 공부를 했던 날들이 훨씬 더 많았다. 정해진 학교 야자 시간 이후에도 1시간을 더 공부하며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교실 불을 끄고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며 기숙사로 향했던 나는 분명히 최선을 다했다. 다만 예상했던 것보다 결과가 나빴기에 그동안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당시의 꿈과 목표를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교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 또한 내가 가고 있는 길에 의문을 달지 말고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 했다. 굳이 학과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SKY 중 하나만 합격을 하면 나머지 인생은 알아서 술술 풀릴 거라고 다들 말했다. 결국 남에게 인정받고 세상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추석 연휴를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18살의 나는 영천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을 거라 확신한다.
오랜 기간 그때의 선택을 후회했다. 당시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기차를 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잘못된 기차가 내가 원하던 목적지로 데려다줄 수도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 매일 나답게 즐겁게 살아가려는 내 모습이 그 당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시간들이 만든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더 이상 과거의 최선을 다하지 못한 시간에 얽매여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럼 최선이란 무엇일까?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꾸준히 해내는 것이다. 매일 블로그에 글을 한 편씩 쓰고 있다.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브런치에 글을 기고하려고 애쓴다. 매일 글을 쓰지만, 나의 글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의 반응이 무관심할 때는 힘이 빠진다. 그럼에도 매일 내가 해야하고 하고 싶은 글쓰기를 꾸준히 한다. 매번 홈런을 터뜨릴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젠가 홈런을 칠 그날을 기대하며 꾸준하게 나의 루틴을 수행하는 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꾸준하게 주어진 일을 매일 같이 해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다. 언젠가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구매할 만큼 좋은 글을 쓰고, 늙어서도 날씬하고 건강한 몸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니며, 외국 사람과 능통하게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나 자신을 꿈꾸며 오늘 하루 작은 실천을 묵묵히 해나갈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라틴어 수업'이란 책에서 이런 구절을 있어 메모해 두었다.
하루의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그날그날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사실 마흔 살이 된 지금도 크게 열여덟 살의 나와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해야 할 루틴을 체크하는 '골 트래커'를 모두 채운 날은 싱글벙글하다가, 그렇지 못한 날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어깨가 축 처지기도 했다. 공부 노동자로 자처한 저자는 공부 역시 마라톤처럼 강약 조절이 필수라고 했다. 공부가 잘되는 날이 있으면, 잘되지 않는 날도 존재한다고 말이다. 매일매일이 공부가 잘될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컨디션과 기분이 좋지 않아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이 있다. 공부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긴 리듬으로 인해 공부가 잘되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는 것이다. 하루의 결과가 어떻든 전체로 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학교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직장에서의 일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하는 힘이다. 그 힘이 있어야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추석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내 인생에서 마흔 번째로 맞이한 이번 추석은 행복하다. 오늘 하루도 나의 성장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최선을 다했다. 주어진 오늘 하루의 시간이 감사하고, 지금 여기에서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의 내 모습이 나의 기대와 다르더라도 괜찮다. 41번째로 맞이할 2022년도의 추석에도 나는 꾸준히 나를 격려할 것이고,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손을 내밀며 기회를 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 나 자신이 그렇지 않은 내 모습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