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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Mar 10. 2022

일상의 언어들에 문제를 제기하다

훈의 시대, 김민섭

동성로에 등장한 국민교육헌장 : 네이버 뉴스 (naver.com)


한 시대의 욕망이 집약된 언어, 훈(訓)


연식이 드러나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워낙 당시의 이미지가 강렬했기에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추측한다. 당시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워야 집에 갈 수 있다고 담임선생님께서 으름장을 놓으셨다. 국민교육헌장은 당시 모든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있었기에 모든 아이들이 책을 꺼내 열심히 암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겁도 없이 딴짓을 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선생님께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한 학생들을 집에 보내주지 않으셨다. 뒤늦게 부랴부랴 외우기 시작했지만 잘 외워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큰 돌에는 국민교육헌장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꼬맹이였던 나는 담임선생님을 원망하고 식식거리며 해가 질 무렵까지 그 문장들을 외웠다. 담임선생님 역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교육부, 교육청, 교장의 지시로 우리들에게 그 긴 문장들을 외우라고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모든 교육 행사를 시작할 때마다 장학관, 교장과 같은 기관장들은 반드시 국민교육헌장을 읽어야 했던 시대였다. 덕분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하는 첫 번째 문장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외우고 있다. 알게 모르게 나는 그 문장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70~80년대 학교에서 통용되는 '훈'이었다. 집단과 조직은 항상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메시지를 개인에게 새기고 싶어 한다. 그런 집단일수록 표어와 노래를 이용한다. 당시 나는 쓰레기 수거차에서 들려오는 새마을운동 노래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군대 입대를 한 후에 제일 먼저 외워야 했던 글이 '해군의 다짐'이었다. '해군의 다짐'의 첫 번째 다짐이 명령에 죽고 사는 해군이 되는 것이었다. 수없이 해군의 다짐을 외치며 군대와 국가라는 조직의 명령이 나라는 개인의 자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온몸에 새겼다. 그다음으로 외웠던 것이 군가였다. 훈련소에서는 5분을 이동할 때조차 끊임없이 '진짜 사나이', '멸공의 횃불', '전우'와 같은 군가를 불렀다. 그렇게 민간인이었던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국가의 훈을 온몸에 아로새기며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군 제대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에 남아 있다.


최근에는 우리 시대의 훈(訓)에 대해 조사한 '훈의 시대'라는 책을 읽었다. 훈(訓)이라는 한자는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훈계, 훈시, 교훈, 훈육, 훈화' 등의 단어로 주로 활용되고 있다. 놀랍게도 이 단어들은 학교에서 무척 많이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일단 '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권위적인 목소리로 바뀐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켜야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저자는 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훈'은 1) 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언어이고, 2) 지배계급이 생산, 유통, 해석하는 권력의 언어이고, 3) 한 시대의 욕망이 집약된 욕망의 언어다.

19쪽


이 책의 저자인 김민섭 작가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에서 개인을, '대리 사회'에서 사회에 대해 말했다. 이제는 학교, 회사, 아파트라는 세 공간의 훈을 통해 시대를 말하고자 한다. 규정된 언어인 훈은 시대의 욕망을 반영한다. 국민교육헌장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기보다 국가의 의도에 충실히 따르기를 바라는 당시 국가 권력의 욕망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국민이란 개인은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강북에 있는 수많은 '강남 맨션들', '휴먼 거지, 빌라 거지'와 같은 신조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와 같은 아파트 광고 문구들과 같은 훈들은 우리 시대의 브랜드의 욕망을 추구하는 천박한 개인의 욕망을 보여준다.



학교의 훈(訓)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학교의 훈'이었다. 특히 남자인 나의 입장에서 공립여고의 교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원주여고의 경우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였고, 춘천여고는 '성실, 순결, 봉사'이다. 대구여고(겨레의 밭), 부산동여고(겨레의 참된 어머니가 되자), 창원여고(자율, 정숙)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은 온전한 개인이 아닌 성별에 따른 역할(어머니, 딸)을 강요받았다. 2022년이 된 지금까지 '정숙, 순결'이란 단어가 들어간 노래를 학생들이 부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히 여고의 교가에서는 그렇게 꽃이 많이 등장했다. 예쁨이란 형용사를 떠올릴 수 있는 수선화, 난, 진달래, 꽃봉오리, 백합 등등. 물론 꽃이란 단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단어가 남학교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고 오직 여성에게만 통용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공립 고등학교로 '경북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여고'가 있다. '경북고, 대구고'는 남자 학교이다. 남학생만 있다고 해서 '경북남고, 대구남고'라고 하지 않는다. 혹시 지역에 '남중, 남고'라는 학교 이름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학교교육의 주체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굳이 '남'이란 말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2천 년대 이후 개교한 몇몇 여학교들 중에 '여고'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여고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2천 년 이후에도 꾸준히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경기, 인천 지역의 신설 학교 중에 있다고 한다.)


원주여고의 경우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라는 교훈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원주여고의 학생들은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라는 규정된 목표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규정한 행복한 삶과 자기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교훈이라는 공감 아래 교직원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까지 모두 동의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80세가 넘은 졸업생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평생을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로 살아왔을 그들에게 교훈을 바꾼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전체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익숙해진 것들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변화는 늘 두렵고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기존의 훈은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바꾸기가 쉽지 않다. 반갑게도 성공 사례도 있다. 강화여고의 경우 두 번 반복되는 '여자다워라'라는 교가 가사를 '지혜로워라'로 바꾸었다. 스스로 기존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의 언어를 되찾아 온 멋진 사례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내훈'이 있다. 내훈은 그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3년 전에 겪었던 일이다. 국어 교사들과 협의를 해 지필시험을 학기 당 한 번으로 줄이고, 과정형 수행평가로 한 학기 수업을 계획했다. 학교에서 중요 교과이기도 한 국어 과목의 지필시험을 한 번만 치른다는 것이 관리자들에게 부담이었던 듯하다. 곧 국어 선생님들은 교장실로 불려가 각개격파를 당했다. 나의 경우 끝까지 나의 수업에 대한 권리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나를 제외한 모든 국어 교사들은 평가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혼자 기존의 평가계획을 고수할 수 있었던 나는 동료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내년에도 평가계획으로 또 관리자들과 부딪혀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2차시 이상의 교과는 반드시 지필 고사를 학기마다 2회 실시하는 것으로 내훈을 변경한 것이다. 물론 관리자는 이론 교과는 반드시 학기 당 두 번 이상의 지필 고사를 치러야 한다는 자신의 훈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나는 지필 고사보다 수행평가가 학생들의 국어 실력을 키워줄 것이라는 나의 훈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관리자에게는 훈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나는 그 힘이 없었다. 법과 규정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법과 원칙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소위 말하는 갑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갑질은 훈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약자에게 더욱 치명적이고 가혹하게 작용한다.


Page not found - 지적 존재들의 B컷 - 비주얼다이브 (visualdive.com)


나의 훈(訓)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의 훈(사훈, 인재상, 비전)과 아파트의 훈(광고, 브랜드, 마을 이름, 건물 이름)에 나타난 언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욕망의 기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령 '고객이 왕이다'라는 훈은 기업에 많은 이익을 주었지만, 그 훈으로 인해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 위계가 부여되어 현장의 사원들은 더욱 심한 갑질과 감정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이 사는 공간을 특별한 언어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도 인상적이었다. 어느 학교에서 브랜드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의 교복을 다르게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음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물론 천민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다행히 이 주장은 없던 것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 자체가 무척 슬픈 현실이다. 나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타인의 품격을 무시하고 떨어뜨리겠다는 욕망이 반영된 사건이었다.


'지잡대'라는 단어 역시 지방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시대의 훈이다. 기안 84라는 만화가는 이 현실을 '복학왕'이라는 웹툰으로 표현한 바가 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동료 선생님 중 한 분이 학부모에게 전화로 폭언을 들었다. 워낙에 학부모님의 목소리가 커 당시 교무실에 있던 대부분 선생님들이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너 K대학 나왔다면서. 어디 지방에 있는 대학 나온 주제에 내 딸에게 감히." 대부분 선생님들께서는 대구 지역에 있는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교무실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고 무겁게 얼어 붙었다.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나의 모교를 폄하하며 지잡대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장난이라도 '지잡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비판적 의식 없이 특정 언어를 사용하다 보면 특정 대상을 천시하는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조직, 사회, 국가가 언어를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나만의 사유를 지켜내자고 역설한다. 주변의 언어를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고 불편해하고 궁금해하라고. 세상이 나를 규정하게 하지 말고 나를 규정하는 언어를 스스로 만들자고.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수많은 우리 시대의 훈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욕망을 반영한 그 훈들 중에 우리를 좀비와 괴물로 만드는 언어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훈들을 전파하는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세상에 욕망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훈을 만들어야 한다. 김민섭 작가는 자신의 훈을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고 밝혔다. (놀랍게도 그의 훈은 약 2년 뒤에 동명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을 통해 김민섭 작가를 알게 되었다.) 지금 나의 훈은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이다. 원래 '훈'이라는 것은 자신이 잘 지키지 못하고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기분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나를 지키며 살고 싶다는 것이 마흔한 살의 내가 규정한 나의 훈이다.


한편 어느새 김민섭 작가의 세 번째 책을 읽었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최근 책을 시작으로 '대리 사회', '훈의 시대'를 차례대로 읽었다. 작가가 집필한 순서대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나(지방시), 사회(대리 사회), 시대,(훈의 시대) 그리고 다시 나(당신이~)로 돌아오는 그의 시선과 통찰이 흥미롭다. 현장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생생한 언어도 좋지만 언제나 위트와 따뜻함을 잃지 않은 그의 문장이 참 좋다. 만화와 웹툰을 다룬 그의 또 다른 책(고백, 손짓, 연결)을 구했다. 아마 마지막으로 그의 첫 책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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