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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Jun 22. 2022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2년 전부터 독서모임을 통해 고전 작품을 읽고 있다. 고전 작품을 혼자서 읽기에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함께 읽기의 힘을 빌려 민음사 고전 작품을 한 권씩 독파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요즘 어떤 책을 즐겁게 읽고 있냐는 내 질문에 대한 선배의 답변으로 또 하나의 고전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선배가 추천한 인생 책은 조지 오웰의 '1984'였다. (사실 선배는 동물농장이 휠씬 더 재미있다고 했지만 나는 '1984'부터 먼저 읽고 싶었다.) 사실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값과 고전을 혼자서 읽기에 나의 문해력이 부족하다는 부담감으로 그동안 '1984'를 쉽게 읽을 시도를 하지 못했지만 선배의 추천에 용기를 얻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을 통해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히는 고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혹시 2년 사이에 나의 문해력이 성장한 것일 수도...) 나에게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작품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든 작품이었다. 이번 주는 조지 오웰이 만든 '1984'라는 작가의 세계관 속에 푹 빠져 지냈을 만큼 책을 읽지 않고 있을 때도 계속 소설 속 주인공인 윈스턴과 그 시대 상황을 생각했다. 작가는 1948년에 1984년이란 미래 사회를 상상하며 이 작품을 썼다. 그가 상상한 1984년은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체제였다.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고 자유를 말살하는지를 보여주는 작가의 메시지는 무척 묵직했다. 게다가 소설 속 사건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 기사를 연상시키는 세계관에 대한 친절한 설명, 캐릭터들을 연출해 내는 기법, 쉽게 내용을 예측할 수 없었던 나름의 반전까지 소설을 읽는 즐거움도 충분했던 작품이었다.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참혹한 미래 사회


천안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라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빅브라더는 모든 정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대명사로 소설 '198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년의 미래 사회는 철저한 감시 사회다. 영속적으로 권력을 지키겠다는 욕망은 개인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았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권력의 영원한 집권이 가능할까?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느 시대에서나 신분을 세 가지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 상층, 중간층, 하층. 물론 어느 시대나 하층의 숫자가 월등히 많다. 이는 '1984' 소설 속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중간층이 독재 정권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킨다. 하류층은 모든 인간들이 평등한 시대를 꿈꾸며 중간층의 혁명을 돕는다. 혁명에 성공한 중간층은 상층이 되고, 다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독재 정치를 펼친다. 새롭게 등장한 중간층은 다시 혁명을 통해 체제 전복을 꾀한다. 결국 최하층은 누가 지배 계층이 되든 큰 신분의 변화가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 무한 반복되었던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1984' 소설 속 상층은 권력 그 자체를 목표로 했다. 어쩌면 지난 역사 속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세웠기 때문에 결국 무너졌던 것은 아닐까? 권력 그 자체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소설 속 사회는 그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당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지금의 체제를 당연히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끊임없이 세뇌시켰다. 그래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하부 당원들에 대한 감시가 가장 심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윈스턴은 중간층이라고 할 수 있는 하부 당원이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래 사회는 참혹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인간다움은 사라졌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기존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소설에서는 사상 교육을 받은 자식이 부모를 사상범으로 신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더 최악인 것은 자식의 신고에 의해 죽게 된 부모는 자신을 신고한 자식을 잘 키웠다며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또한 쌍방향 CCTV라고 할 수 있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개인의 모든 사생활을 감시함으로써 대중의 생각을 통제했다. 잠꼬대나 무의식중에 한 말도 감시할 정도로 그들의 감시 시스템은 무시무시했다.


한편 그들은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이중사고, 신어'라는 개념을 이용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도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의 언어부터 없애려고 했다. 소설에서는 지금의 체제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단어를 없애거나 조정했다. 권력 체계에 저항을 유발할 언어가 사라지면 체제 전복에 대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없던 사실을 만들고 기존의 진실을 왜곡했다. 윈스턴이 진리부에서 맡았던 일이 그것이다.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기록조차 모두 찾아내어 왜곡하는 업무를 맡았다. 가령 빅브라더가 6개월 안에 집값을 잡겠다고 했는데 결국 못 잡았다. 그럼 6개월 전에 빅브라더가 했던 집값과 관련된 모든 발언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식이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다. 과거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곧 미래까지 지배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이론적으로 영원한 권력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작품은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어떻게 빅브라더가 세상을 지배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보여준다.




전체주의 시스템에 반기를 든 주인공의 앞날은


주인공 윈스턴은 개인의 감정과 생각까지 지배하려는 권력 시스템에 몰래 저항해 온 자다. 그는 텔레스크린의 눈을 피해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음에도 그는 몰래 사색했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이후 줄리아라는 이성을 사랑하며 그녀를 향한 사람의 감정을 당의 눈을 피해 표현했다. 당시 권력층은 사랑 역시 체제를 유지하는데 불필요한 감정으로 여겼다. 섹스조차도 당원의 후손을 낳는다는 목적이 아니라면 허락되지 않았다. 성관계조차 텔레스크린을 통해 감시의 대상이 되었기에 섹스는 사랑과 본능의 행위가 아닌 정치적 행위가 된 세상이었다.


소설 속 권력층은 개인의 지성과 감성을 모두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했다. 하지만 윈스턴은 글을 쓰며 지성을 지키려 했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접근한 줄리아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감정 또한 잃지 않으려 했다. 급기야 그는 체제 전복을 꿈꾸며 평소 자신이 믿었던 상류 당원에 접근해 소문만 무성했던 지하 단체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개인인 그보다 권력층이 유지하던 시스템의 힘이 훨씬 더 컸다. 이미 오랜 시간 그의 행적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사상경찰에 의해 줄리아와의 밀회 현장에서 그는 체포된다.


체포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단순한 고문이나 사형이 아니었다. 전체주의 시스템은 그의 정신까지 개조해 버렸다. 우선 그의 지성부터 무너뜨렸다. 소설에서 가장 무서웠던 장면이기도 했다. 사상경찰은 손가락 네 개를 펼치며 지금 손가락이 몇 개인지 그에게 질문했다. 육체적 고문 끝에 그는 눈앞에 보이는 손가락의 개수가 네 개라도 당이 다섯 개라고 하면 다섯 개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의 명령이라면 2 더하기 2도 4가 아닌 5라고 믿어야 했다. 그의 지성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당이 말하는 답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고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 사상경찰은 그를 조금씩 회복시켜주었다. 그의 육체는 고문실에 오기 전만큼 건강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마음이 파괴될 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빅브라더로 상징되는 권력층은 철저한 감시 시스템을 통해 모든 개인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맞춤형 고문이 윈스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빅데이터를 통해 상대방이 가진 모든 약점을 동원해 고문하는 식이다. 그가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을 통해 그는 본인이 갖고 있던 모든 정신적인 가치를 가차 없이 버렸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소설을 통해 확인하시기를 바란다.) 그 공포 앞에서 어떤 고문에도 당신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약속했던 줄리아를 나 대신 고문하라며 소리를 지른다. 이 잔인하고 참혹했던 과정을 거치며 그의 인간성은 모두 말살되어 버렸다. 그저 당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된다. 주인공은 빅브라더에게 순종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1949년의 조지 오웰이 우리에게 주는 엄준한 경고


소설은 주인공의 패배로 끝났다. 보통의 SF 영화에서는 한 명의 영웅이 사회 시스템을 전복시키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은 시스템에 의해 저항을 꿈꾸었던 한 개인이 얼마나 무참하게 개박살(박살이 아니라 개박살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소설의 결말 앞에서 착잡한 감정이 들었고 설명할 수 없는 공포와 우울함을 느꼈다. 소설 1984 속에서 사상범은 발각될 경우 무조건 사형이다. 하지만 당은 기존 체제에 저항했던 사람이 영웅 또는 순교자로 죽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형 집행 전에 어떻게든 완벽한 빅브라더의 추종자로 만든 다음 죽였다. 이 정도로 잔혹하고 치밀한 전체주의 시스템을 고안하고 예견한 작가 조지 오웰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표적으로 한 것으로 알려진 '1984'는 이 세상의 모든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책이다. 이 책이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책으로 왜곡되기도 하지만 사실 저자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소설을 통해 생각과 감정까지 지배하려고 하는 국가의 과도한 통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한없이 무력한지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이유가 1984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그려낸 디스토피아 세상이 유효하다는 점에 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사를 고치고,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쉽게 대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 집단의 횡포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독재 정권이 활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불법 사찰과 도청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언론에 유포해 권력층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선동했고, 북한과 휴전 상태라 이 시대가 평화롭지 않다는 위기 상황을 강조해 자신의 정권을 수호하는 데 사용했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은 어떠한가? 코로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역이라는 최우선 가치를 위해 국가는 예전보다 쉽게 개인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에 방역을 강화하기 위해 어디를 가든 QR코드를 찍어야 했고, 확진자의 경우 모든 행적이 대중들에게 낱낱이 공개되었다.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국가는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쉽게 그 권한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사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정보 통신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개인을 통제하기 수월한 세상이 되었다. 어디를 가든 CCTV를 비롯한 수많은 카메라가 당신을 추적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용한 신용카드 내역 그리고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통해 쉽게 나의 사생활이 공개될 수 있다. 얼마 전 국가 정보기관에서 카카오톡에 개인 정보를 요구해 엄청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우리 옆에 있는 중국의 경우 코로나 이후 개인의 자유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세계의 감시 카메라의 절반이 중국에 있을 정도로 중국 정부는 디지털 과학 기술을 이용해 인민들을 감시하고 있다.


새삼 책 표지의 '눈'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빅브라더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장이 무서웠다. 예전에 농담처럼 직장의 메신저 프로그램을 관리자가 모두 열람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대화한 적이 있다. 만약 메신저 프로그램을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감시당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정신은 죽고 독재 권력이 더 강화되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조지 오웰은 '1984'라는 소설을 통해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세상에 빅브라더가 존재하지 않는지, 아니 우리의 무관심 속에 빅브라더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경계해야 한다고 삼엄한 경고를 보냈다.


우리 사회에서는 소설 속 1984에 등장하는 텔레스크린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텔레스크린은 존재한다. 분명히 사회 곳곳에서는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나는 얼마나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았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에 나를 맞추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싶다. 그리고 누구나 그 용기를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빅브라더의 존재를 경계하는 태도를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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