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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Oct 27. 2022

내 인생의 첫 평양냉면 시식

소소한 잔재미가 많은 사람의 삶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소소한 잔재미가 많은 사람의 삶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에 읽었던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부제: 아무튼 평양냉면)'에 이런 류의 문장이 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듯이 소소한 잔재미를 많이 가진 사람의 삶이 행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나 역시 주변에 취미 부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잔재미를 추구하는 성향이다. 취향에 있어서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요즘 뭐가 재미있냐고 꼭 물어보는 편이기도 하다. 음식 또한 새로운 도전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못 먹어 보았던 음식을 꼭 먹어 보려고 한다. 작가의 평양냉면 사랑과 덕질을 다룬 그 책을 읽고 결심했다. 내 삶의 잔재미에 평양냉면을 추가해야겠다고.


잔재미들을 합치면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재미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 여러 경험들 중 직장 생활과 육아로 힘이 들었던 5년 전 어느 겨울에 겪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아들은 태어난지 4개월이 된 아기였다. 신생아인 아들이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봐 외출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느라 답답해하던 상황에 아내로부터 4시간의 자유시간을 부여받았다. 그 4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을 하다가 영화를 보러 갔다. 당시 극장가는 '신과 함께'가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뮤지컬 영화인 '위대한 쇼맨'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돼지국밥집에서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마셨다. 혼술 하기에 돼지국밥집보다 식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환경은 없다. 뜨겁고 뽀얀 국물에 차가운 소주를 들이부으니 금방 술기운이 올라왔다. 잔뜩 얼근해진 얼굴로 찬 바람을 맞으며 지금은 사라진 대구 CGV로 향했다. 좌석에 나의 몸을 구겨놓고 2시간이 넘는 영화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위대한 쇼맨'은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은 걸작이었다. 사실 뮤지컬 영화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대신 동화적인 요소가 많다.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노래가 등장해 관객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적재적소에 작품을 채웠던 모든 사운드트랙이 직장 생활과 육아로 무덤덤해져 있던 나의 감정을 건드렸다. 동화 속 세상에 깊게 파묻혀 주인공들의 희로애락을 몸소 체험하며 울고 웃던 나는 엔딩크레딧이 끝나가는 순간까지 이 동화가 끝이 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돼지국밥과 소주 그리고 좋은 뮤지컬 영화와 겨울바람이 묶여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작고 소소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하모니가 삶의 큰 행복이 될 수 있음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음악과 관련된 영화를 볼 때면 늘 국밥에 소주 한 병을 마시게 되었다. '라라랜드(재개봉)',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기 전에도 그러했다. 이번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한국 뮤지컬 영화 차례였다. 이번에는 소주와 함께 할 음식에 약간의 변주를 주기로 했다. 뜨끈뜨끈한 돼지국밥 대신 내가 선택한 메뉴는 시원한 '평양냉면'이다. 극장(메가박스 신세계백화점) 주변에 새로 생긴 '평양냉면' 집이 있음을 확인했다.


'아무튼 평양냉면'의 저자인 배순탁 님은 화약용 알코올을 신체에 들이붓는 느낌의 소주를 싫어한다고 밝혔다. 그랬던 그가 유일하게 소주를 마실 때가 있다. 바로 평양냉면과 함께 할 때다. 냉면을 안주로 소주를 먹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조합이다.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숱한 술자리를 가지며 한 번도 냉면을 안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도 가끔은 모험(?)을 걸어볼 필요도 있다. 삼겹살에 소주, 우럭회에 소주처럼 늘 안정적인 선택만을 하며 살기에는 재미가 없지 않나. 혹시 냉면과 소주의 조합이 내 취향에 맞지 않고 실패로 끝나더라도 고작 한 끼 식사 아닌가. 다행인 점은 이번 한 끼가 실패로 끝나더라도 수많은 끼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5시 오픈 시간에 맞춰 서리빛이라는 가게에 방문했다. 서리빛은 대구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건물 2층에 있는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고급 한정식 느낌이 드는 가게였다. 점원에게 한 명이라고 인원을 밝힌 후 구석에 있는 1인용 테이블에 착석했다. 호텔 서비스를 방불케 하는 미소와 인자함을 장착한 점원께서 지금은 손님이 뜸한 시간이니 조금 더 넓은 테이블에서 편하게 식사를 해도 된다고 안내해 주셨다. 그 말을 들으니 한결 편해졌다. 고급 식당 분위기가 나는 곳에서 혼술을 하려니 살짝 움츠려드는 기분이 들었는데 점원의 한 마디에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가게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평양냉면과 녹두전 1장(여기는 전을 낱개로 판다. 혼자서 1장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을 부탁했다. 센스 있게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간단히 술안주를 할 수 있도록 잡채를 가져다주셨다.


하지만 첫 잔은 평양냉면 육수와 함께 할 거라도 마음을 먹었기에 냉면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냉면이 나오는데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블로거가 된 이후 기다림의 상황이 오면 블로그 앱을 켜는 편이다. 이럴 때 이웃분의 댓글을 확인하거나 기존의 글을 퇴고하면 되니 그 어떤 기다림의 시간도 그리 두렵지가 않다.




드디어 평양냉면을 만났다. 내가 알고 있던 냉면의 비주얼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얼음이 없다. 고춧가루도 없다. 맑은 육수는 내 얼굴을 그대로 비출 정도였다. 걸레 빤 물과 비슷한 맛이 난다는 악평도 들은 바가 있기에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육수부터 마셔 보았다. 슴슴하면서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구수하고 깊은 고기 육수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깔끔한 국물을 들이키며 왜 '멜로가체질'이란 드라마에서 안재홍 배우가 처음 접했을 때 뭔가 싶지만 자꾸 생각나는 맛이라고 평양냉면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고기 육수로 맛을 냈기에 소주 안주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훌륭했다.


이번에는 소주 한 잔을 마신 후에 국물 대신 면을 흡입했다. 후루룩 소리가 선명히 드릴 정도로 면치기를 하면서 말이다. 메밀면이라 식감이 질기지 않고 쫄깃했다. 메밀이 가을에 수확하는 작물임을 감안하면 지금 냉면을 먹기에 최적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메뉴판의 설명대로 식초를 면에 뿌려 먹기도 했다. 면의 식감과 느낌이 또 달라졌다. 중간중간 곁들어 먹은 녹두전의 맛도 좋았다. 바삭하면서도 적당히 기름기가 있는 것이 소주 안주로 제격이었다. 가끔 느끼하다 싶으면 상큼한 부추와 양파를 곁들어 먹으면 된다. 게다가 주인장께서 서비스로 고추전까지 맛을 보라고 내어 주시니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누군가 평양냉면에 식초 또는 겨자를 넣는 것은 음식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하지만 먹는 것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냉면을 절반 정도 먹고 난 후에는 식초와 겨자를 넣었다. 훨씬 더 입에 감기는 매력적인 감칠맛으로 바뀌었다.


평양냉면과 술의 조합이 주는 기쁨을 알아버렸다. 평냉과 소주 조합은 새로운 즐거움으로 내 인생에 다가왔다. 포스팅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평양냉면 맛이 생각난다. 투명하면서도 부드럽고 깊은 육수의 그 맛! 육수를 들이켜면 소주가 당기고, 소주가 혀끝을 자극하면 다시 육수를 찾게 되는 즐거운 선순환! 그 와중에 탄수화물이 당기면 술의 쓴맛이 남아 있는 혀에 담백한 면을 투척하면 된다. 그래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있나 보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맛의 세상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한 후에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러 갔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감격을 간직한 채 영화를 만났다. (영화에 대한 평은 추후 포스팅에서 다룰 예정이다.) 아직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매일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고 배울 게 많아서 인생은 즐겁다. 이번 가을에는 심심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평양냉면 한 그릇에 소주잔을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다음에는 어느 평양냉면 집에서 즐거움을 누릴지 기대가 된다. 이렇게 나는 인생에 또 하나의 잔재미를 추가했다. 이 작은 재미가 또 다른 재미들과 만나 어떤 행복감을 전달해 줄 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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