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1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지, 레저, 취미, 즐거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목욕탕'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막상 목욕탕에 가려고 하면 약간의 귀찮음이 발생한다. 어쨌든 오고 가는 시간을 포함해 2시간 가까이 시간을 빼앗기니깐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목욕탕에 다녀온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목욕은 달리기, 피트니스 운동과 비슷하다. 하기 전에는 망설이지만 행하고 난 후의 기분이 정말 상쾌해지는 것이 유사하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나의 몸도 깨끗해지지만 정신 역시 맑아진다. 게다가 어깨와 목에 얹혀 있던 온갖 속세의 고민들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덕분에 뻣뻣했던 목도 부드럽게 잘 돌아간다. 특히 요즘 같은 날씨에 목욕탕을 나온 후에 맞는 겨울바람도 얼마나 상쾌한지 모른다.
어제는 '아무튼 목욕탕'이라는 책을 읽고 코로나로 인해 억눌렸던 목욕에 대한 욕구가 다시 깨어났다. 온몸이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피곤하고 찌뿌듯한 날, 어깨에 짊어진 짐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 무언가를 잘 완수해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날은 목욕탕에 들러줘야 한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퇴근 후에 집 청소를 하고 블로그 글 포스팅을 한 후에 바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집에서 도보로 45분 거리에 있는 앞산 홈스파월드까지 뛰어갔다. 일단 탕에 들어가기 전에 문화인의 덕목을 지키기 위해 샤워부터 하고 온탕에 입수한다. 온탕 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때면 열탕으로 들어갈 때가 된 것이다. 한때는 중년 어른들의 세계였던 40도가 넘는 열탕에 나 역시 아저씨가 되어 몸을 담근다. 처음 발을 들일 때에는 쾌감과 비슷한 고통이 동반되지만 이윽고 물속에 있는 것이 시원하고 아늑하게 느껴져 "으으~ 시원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20분 가까이 열탕에 몸을 담갔다 밖으로 나오면 순간 머리가 몽롱하다. 이때 목욕탕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원적외선 수면 공간으로 가서 살짝 눈을 붙인다. 깊은 잠에 빠지지 않더라도 30분 정도 누워 있으면 개운하게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리프레쉬한 상태로 다시 열탕과 냉탕을 반복한다. 그 과정이 조금 지겹다 싶으면 이벤트탕과 폭포 냉탕 그리고 건식 사우나까지 차례대로 투어를 다닌다. 마지막으로 피부의 촉촉함을 위해 습식 사우나에서 목욕의 대미를 장식한다. (참고로 나는 때를 밀지는 않는다. 열탕과 냉탕만 오고 가기만 해도 충분하다.)
목욕탕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들
나에게 목욕탕은 혼자서 사색하기 좋은 공간이다. 혼자 탕 안에 들어가 목욕탕에 얽힌 지난 추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렸을 때는 주로 아버지와 함께 '석수탕'이라는 영천의 작은 목욕탕에 자주 갔다. 그때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무서웠기 때문에 온탕에 들어가서 10분 이상 앉아 있으라는 엄명을 어길 수가 없었다. 몸이 빨갛게 익은 상태로 아버지께서 직접 내 몸 구석구석의 때를 밀어주셨다. 당시의 목욕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2주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숙제와도 같았다. 그래도 목욕 후에 늘 아버지께서는 나와 동생에게 바나나 우유와 같은 음료를 사 주셨다. 목욕탕 안의 음료 가격이 슈퍼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에 늘 목욕탕 밖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를 사 먹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목욕탕 안에서는 한 번도 음료수를 구입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동생과 둘이서 목욕탕을 가게 되었다. 훨씬 더 자유롭게 목욕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동네 친구들도 합류했다. 당시 온탕과 냉탕을 마치 우리들의 전용 놀이 공간처럼 생각하고 즐겼다. 한 번씩 무서운 아저씨들의 호통 소리에 움추려들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목욕탕에 왔다는 것 자체가 무척 신이 나는 이벤트였던 시절이었다. 목욕을 가기 전에 항상 어머니께서 이태리타월을 챙겨주셨는데 나와 동생은 그것을 자주 목욕탕에 두고 나왔다. 집에 도착한 후에야 이태리타월을 깜빡하고 두고 나왔음을 인지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태리타월을 다시 가져오라고 나를 다시 목욕탕으로 보냈다. 목욕탕 들어가는 입구에서 쭈볏거리면서 서 있으면 목욕탕 사장님께서 먼저 "형준이 또 때수건 두고 갔나? 들어가서 찾아봐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부모님을 통해 내 물건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나와 달리한 번 사용한 이태리타월을 목욕탕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리고 나오는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친구에게 이태리타월은 일회용품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부모님의 교육으로 절약하는 습관을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청운의 꿈을 안고 영천을 떠나 포항까지 유학을 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단체 생활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1학년 첫 모의고사에서 전교 200등이 넘는 실망스러운 석차를 받으면서 왜 내가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까지 들었다. 빡빡한 고등학교 생활에는 어떻게든 적응을 해나갔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시기였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일요일마다 학교로 찾아오셨다. 일요일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가 유일한 자유 시간이라 그때 대부분 기숙사생들은 시내로 놀러를 가거나 극장, 노래방과 같은 문화생활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나는 유일한 자유 시간을 늘 부모님과 함께 보내야 했다. 매번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것도 비용이 많이 드는지라 어머니께서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도시락을 사 오셨다. 송도 해수욕장 근처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 가족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때도 목욕탕은 우리 가족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셨다. 어머니께서는 차 안에서 우리 부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뜨거운 탕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탕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내가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잘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격려와 믿음을 지속적으로 주셨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장남인 나를 만나기 위해 포항까지 오셨다. 그렇게 1년 동안 매주 일요일마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고, 꾸준히 아버지께 정신 교육(?)을 받은 덕분인지 그 해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전교 10등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포항의 어느 골목 어귀에 있는 이름도 모를 작은 동네 목욕탕에서 나의 등을 밀어주시던 아버지와 히터도 나오지 않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계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면 코끝이 찡해진다.
스무 살 이후에 목욕탕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취미 생활이 되었다. 나에게는 8명의 대학 남자 동기들이 있었는데, 워낙 수가 적은 만큼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친하게 지냈다. 아쉬운 점은 K 군을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이 나처럼 농구와 술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졸업 후에 그냥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 말고 조금 더 생산적인 취미 생활이 필요했다. 희한하게도 우리 동기들은 목욕탕 앞에서 대동단결할 수 있었다. 각자의 학교에서 바쁘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우리는 일요일 오전에 목욕탕 앞에서 약속을 잡았다. 알몸으로 만난 영향 탓인지 우리는 탕 안에서 온갖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마치 투어를 다니듯이 온탕, 냉탕, 이벤트탕, 건식 사우나, 습식 사우나 등을 옮겨 다니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놀랍게도 탕 안에서 수업에 대한 이야기도 정말 많이 했다. 대부분 고등학교 교사였고 당시만 하더라도 국정 교과서 시절이라 가르치는 단원이 비슷했다. 뜨거운 탕 안에서 서로의 수업 경험을 공유하며 예상 밖의 동료 장학을 실시할 수 있었다. 목욕 후에 상쾌한 상태로 점심 식사를 하며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을 만큼 행복했다. 감사하게도 친구들이 유부남이 되기 전까지 그런 궁극의 행복을 한 달에 한 번은 맛보았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목욕탕에 간다
인생의 위기 순간마다 나는 목욕탕을 찾았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업무가 내 눈앞에 떨어졌을 때, 인간관계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속상할 때, 어려운 난관 앞에 부딪쳤을 때, 그리고 그 난관을 무사히 완수했을 때도 나는 목욕탕을 찾았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나태하게 수험 생활에 임해 임용고시에 떨어진 나는 부모님께 다시 시험에 도전하겠다는 약속 하에 대구의 한 사립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로 취업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충분히 교사로 일을 하면서 공부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교사 초년생의 첫해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첫 학교에서 너무 좋은 동료 선생님들을 많이 알게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결국 충분히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던 방학 때조차 수험서를 펼치지 않았던 나는 임용고시 시험 자체에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영천의 부모님께서는 대구에서 내가 직장 생활과 수험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고 믿고 계셨다. 임용고시 시험 전 날 나는 술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다. 다른 친구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그 시간대에 깨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전체를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었다.
그런데 몇 차례 걸려오는 전화 소리에 나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동생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생과 함께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나와 달리 임용고시를 한 방에 통과했다.)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 '형아야! 지금 엄마랑 아빠랑 형 시험 치는 장소로 가고 있다. 형 시험 끝나고 점심 같이 먹는다고 대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어떡하지?' 동생에게 나중에 아버지께 설명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겉옷을 챙겨 입고 도피하다시피 집 밖으로 나왔다. 그 해 12월도 꽤 추었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내가 즐겨 찾는 목욕탕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일단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께 '사실 올해 공부를 하지 못해 시험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후에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바로 탕 안으로 들어갔다. 열탕에 몸을 담그자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평소의 루틴처럼 열탕과 냉탕을 오고 가고, 습식 사우나로 목욕을 마무리했다. 그제야 부모님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목욕 후 집으로 돌아가자 부모님께서 밥은 먹었냐고 따뜻하게 맞이해주셨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우리 가족은 고깃집에 가서 평소처럼 화목한 분위기로 식사를 했다. 결국 내가 먼저 부모님께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다고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며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다.
예상치 못했던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나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서 나는 목욕탕으로 도피를 했다. 목욕탕으로의 도피는 고민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목욕은 무거워진 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준다. 지금도 나는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목욕탕을 찾는다. 여행 중에 남는 시간을 때우기가 애매해지면 주변 목욕탕부터 찾는다. 여행의 피로도 풀고 다시 새로운 곳을 탐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불필요한 TMI 시간. 중국에 거주할 때도 3일에 한 번씩은 퇴근길에 목욕탕에 들렀고, 여행 중 숙소를 찾기가 애매하면 근처 찜질방부터 찾았다. 참고로 중국은 한국보다 대체로 물가가 저렴한 편인데, 목욕 및 찜질 비용도 우리나라의 3분의 1 수준이다. 게다가 우리 돈으로 7~8천 원이면 세신도 가능했다.)
힘이 들 때마다 내가 목욕탕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목욕탕이 알몸으로의 나를 대면해야 하는 가장 원초적인 공간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뜨끈뜨끈한 온탕에 몸을 담그는 행위가 풍진 세상 속에 던져지기 전 엄마 뱃 속에서 포근하게 머물던 그때를 느끼게 해 주어서 그런 것일까?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인 목욕탕에서 나는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간다. 나의 본능에 가까워지는 곳이라 그런지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편안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상관없이 탕 안에서 나는 나의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대면한다. 몸과 마음 모두 지친 나를 언제나 편안하게 맞이해주는 곳이 목욕탕이다. '아무튼 목욕탕'이라는 책에는 목욕탕이 마음의 치유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소개도 나온다.
목욕탕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할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치료'하기에 적합했다. 탕에 들어앉은 지 10분 쯤 지나면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그럴 때 조용히 눈물을 같이 흘러도 괜찮았다. 얼굴이 좀 벌겋게 되어도 상관없다.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보일 거니까.
한편 감사하게도 대구에는 내가 좋아하는 목욕탕이 4곳이나 있다. '남구 홈스파월드, 동구 궁전라벤더, 달서구 수목원 온천, 월성동 엘리바덴'이다. 남은 2022년 한 달 동안 대구 4대 목욕탕 투어를 할 계획이다. 목욕은 혼자 가도 좋고 함께 가도 좋다. 혼자 가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함께 가면 폭풍 수다를 나눌 수 있다. 이렇게 좋은 목욕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취향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기에 친한 지인이라도 몇 번 거절당하면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감사한 것은 아직 내 주변에 나처럼 목욕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80대까지 혼자서도 목욕탕에 갈 수 있도록 앞으로 건강 관리를 잘해야겠다. 다행인 점은 아직 가 보지 못한 세상의 목욕탕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특색있는 목욕탕들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목욕은 1만 윈으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