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지난 달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푹 빠져 지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읽었고 특정 문장에 한참을 머무르고는 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다시 처음부터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을 정도로 여운을 준 책이다. 처음 읽었을 때 보지 못한 문장들을 찾겠는다는 마음으로 여유를 갖고 재독했다. 오늘은 동양적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싯다르타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계층인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바라문의 젊은 딸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감정이 용솟음쳤다는 표현이 있을 만큼 그는 인기남에 엄친아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누구보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친구인 고빈다가 있었다. 모두가 그에게 위대한 현인이자 바라문의 리더로서 살아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했던 그는 정작 자신의 삶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스스로의 삶에 고민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본을 찾고자 했다. 어느 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유랑하는 사문(탁발승) 무리를 만난 그는 맑은 영혼이 담긴 그들의 눈동자를 보고 사문의 길을 걷겠다 다짐했다. 고행을 통해 진리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싯다르타의 선택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의 출타 결심에 화났고 속상했고 두려웠다. 싯다르타의 마음이 더 이상 부모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숲속에 들어가 사문이 되기를 허락한다. 싯다르타가 그의 길을 함께해 줄 친구 고타마와 함께 사문들의 무리에 합류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 속세를 떠나 오랜 기간 사문으로 살아가며 모든 것을 비우고자 했다. 모든 욕망과 충동을 멈추었을 때 더 이상 자아가 아닌 진리에 눈을 뜰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이다. 사문들의 규칙에 따라 고행과 금욕적 생활을 통해 자아를 극복하고자 수행에 전념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는 없었고 다음과 같이 배움에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 친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아트만이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적은 없다고 말이야.
37쪽
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싯다르타의 말에 고빈다는 불안해한다. 그러다 그들은 깨우친 자라 할 수 있는 살아있는 부처인 '고타마'를 만나게 된다. 진리를 꿰뚫고 있는 그의 설법에 감동한 고빈다는 그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을 한 친구의 의사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스스로의 경험과 사색이 아닌 누군가의 가르침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고빈다의 선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가 다른 길을 걸어갈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을 뿐이다. 친구가 가고자 하는 서로 다른 길을 축복해주며 아름다운 이별을 택하는 싯다르타의 선택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를 만나 대화한다. 이 부분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하다.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누군가로부터의 가르침이 아닌 스스로의 구도 행위와 사색, 깨달음을 통해 해탈을 얻었다고 지적한다. 즉, 가르침으로는 자신의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전파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추구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인생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싯다르타의 다음 대사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고 목표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 대하여서만,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저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고, 저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저는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57쪽
돌이켜 보면 지난 3년 동안의 자기혁명 과정은 결국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일상이란 시간을 채워나가고, 무엇을 이루고 싶으며, 그 목표를 위해서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오직 나 자신만이 갖고 있다. 그 어떤 현명한 사람도 내가 가야할 길을 알려줄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이 '싯다르타'가 말하는 깨달음과 비슷한 맥락의 것은 아닐까?
고타마와 친구를 두고 혼자 남게 된 싯다르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처럼 지독한 외로움이 스며 들었던 그때 그는 신속하게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과 삶을 스승으로 삼고 자아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현실 너머에 있는 본질을 추구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 애정을 갖는다. 호기심이 폭발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지금까지 금욕의 끝판왕을 향해 달렸다면 이제 그는 반대편을 향해 가 보기로 한다. 그는 다시 강을 건너 속세의 마을로 향했고 유명한 기생인 카말라에게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그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사색하고 단식하고 시를 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그에게 카멜라는 카와스와미라는 상인을 소개해 준다. 카와스와미를 통해 싯다르타는 장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더 이상 구걸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문이 아닌 끊임없이 돈을 필요로 하는 사업가가 된 것이다.
돈과 사랑을 쟁취한 그는 그렇게 10년을 살아간다. 사색하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알았던 그의 장점은 사라져갔다. 쾌락의 세상은 고통의 윤회로 돌아왔고 그는 즐거움, 태만,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다. 어느 순간 거울을 보며 지금의 삶이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 아님을 깨닫게 된 그는 돈과 사랑을 모두 놓아버리고 다시 강으로 간다.
이번 생은 틀렸다는 마음으로 강에 투신을 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싯다르타는 흐르는 물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여러 물줄기가 모여 하나의 강을 이루듯이 브라만 시절의 나, 사문 시절의 나, 장사꾼 시절의 나 모두가 싯다르타 본연의 모습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각각 존재하는 모든 모습들이 원래 내 안에 있던 것이었다.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늙게 될 터이고,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싯다르타란 덧없는 존재이며, 형상을 지닌 것은 모조리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기는, 이 새로운 싯다르타는 젊고 기쁨에 가득 찬 어린아이이다.
145쪽
여러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어제와 오늘 내일이란 각각의 시간이 모여 현재의 삶을 만든다. 강에는 현재만이 존재한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미래에는 특별한 현재들이 기다리고 있다. 시간의 인과성에 사로잡히면 현재에 집중할 수 없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우쭐해지고 미래의 불확실함에 걱정하는 시간으로 현재를 채우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시간의 흐름이 아닌 동시성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오늘을 새로운 날로 만드는 것이 지나가버린 어제와 다가올 내일을 더 빛나게 만들 수 있다.
한편 강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인연이 있었던 뱃사공 바주데다와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헤어진 여인에게는 싯다르타의 아들이 있었다. 운명적으로 싯다르타는 카밀라의 마지막을 함께했고 아들과 함께 오두막에서 살게 된다. 평생을 속세에 몸담았던 아들은 아버지의 수도적 삶에 맞추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아이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느긋하고 다정하게 참고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싯다르타의 삶의 방식이 옳더라도 아들에게 아버지의 방식대로 살아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싯다르타는 지혜는 가르칠 수 없는 거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번뇌와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않게 하려고 애섰다. 불행하게도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삶이 단 하나도 매혹적인 것이 없었다. 결국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고 돌보면 언젠가는 아비의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싯다르타의 기대와 달리 아들은 집에 있던 돈을 훔쳐 다시 속세로 돌아가버린다.
싯다르타는 이성을 잃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 뱃사공의 만류에도 단 한 번이라도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며 예전 여인의 집 앞까지 찾아갔지만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이후 자식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자들을 부러워하며 아들이 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식을 향한 맹목적 사랑, 이성을 향한 거친 열망, 유치한 충동과 같은 것으로 무한한 고통을 감수하는 중생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전의 싯다르타는 자신의 자아에 갇혀 세상과 중생들을 타락한 것으로 평가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해가 아닌 조금 더 완전한 경지의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한 그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 강을 건너다 문득 강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본인이 사문이 되어 떠나겠다고 했을 때 아비의 심정을 똑같이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끝장을 보지 못한 고통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마 나 역시 아들을 사랑하는 만큼 상처도 많이 받을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길이 아닌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때 나는 진심으로 그의 시행착오를 응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아들의 삶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야만 싯다르타처럼 아들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다의 도움으로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삶 역시 각자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저마다의 목적지가 있음을 깨닫는다. 모든 삶은 각자의 가치가 있기에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한 속세로 뛰어들어간 아들의 삶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이후 그는 깨달음을 얻은 자로 널리 소문이 난다. 예전에 헤어졌던 죽마고우 고빈다가 가르침을 얻고자 싯다르타를 찾아온다. 고빈다는 부처가 옛 친구 싯다르타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싯다르타의 입을 통해 그가 부처임을 알게 된 고빈다는 누구에게 어떤 사상과 교리를 배웠는지 물어본다.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204쪽
결국 싯다르타가 겪었던 모든 삶의 과정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했던 과정인 셈이다. 바라문, 사문, 상인, 뱃사공으로서의 각각의 삶이 모두 있었기에 그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속세의 쾌락과 부를 직접 체험했기에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 알게 된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잡고 정진해 나갈 때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자신의 삶 앞에 놓인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의미를 당장 찾을 수는 없다.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새로운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은 과거와의 고리를 끊고 새로 태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 내 삶의 끝에 어떤 깨달음이 있을지 나 역시 모르기에 매일 새로운 나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어제까지는 엑스트라였지만 오늘부터 주연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앞으로도 내가 겪는 모든 경험을 소중히 여기며 내 삶의 흔적들을 하나씩 채워나갈 것이다. 아직 나에게는 남은 삶이 있고, 그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번 생은 망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생의 시작이다.
영원히 변하지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강물을 보며 단일성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에게 정신과 욕망, 선과 악의 대립 모두가 긍정의 대상이 되었다. 싯다르타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선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졌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각의 가치가 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단일성이라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상상 속 완벽한 세상이 아닌 세상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고빈다에게 전하는 그의 가르침은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학생들의 문제 있는 행동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미래에 더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 믿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참고 너그럽게 대했다. 그런데 문제 있는 행동이라는 판단 자체가 학교 시스템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시스템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의 룰을 어기고자 하는 학생들의 문제 행동에 대한 관점이 조금은 바뀌었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모난 행동을 참고 버텼다면 앞으로는 학생의 현재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교사인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랑이다.
각자의 인생이 다르기에 삶의 정답은 제각기 다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책 한 권을 읽고 강연 하나를 들었다고 삶의 정답을 얻을 수는 없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내가 누군인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다. 자아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고자 수행과 명상 등을 통해 정작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된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지금의 삶이 나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지금 나는 삶이라는 여행 중 어디쯤에 도달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사색하고 싶은가?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