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살롱 시즌4 [WANT]
정신은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은 단지 정신에만 관계될 때 의지라고 하며,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 충동이라고 한다. 충동은 곧 인간의 본질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에티카」 제3부 정리9, 스피노자-
SNS를 보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았다. 흑백사진 속 한복을 입은 여인은 무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을 알게 됐다.
1954년 6월 박남옥은 아이를 낳고 몸조리는커녕 보름 만에 영화 제작에 나선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 복구가 채 안된 서울에서 영화 <미망인>을 찍게 된다. 갓 태어난 아이를 등에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든 채 그녀는 배우들 앞에서 ‘레디-고우’를 외친다. 촬영 중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들의 점심까지 직접 준비하며 현장을 지켰다. 조명기사, 밥 아줌마, 연출, 제작자로 1인 5역을 하며 만들어진 첫 영화 <미망인>은 나흘 동안 상영 후 막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박남옥은 이 영화 한 편을 남기고 영화판을 떠난다.
말년을 미국 LA에서 보내던 박남옥 감독의 타계 소식이 2017년 전해졌다. 다행히도 1999년~2002년 사이에 여생을 돌아보며 쓴 육필 원고를 딸이 컴퓨터에 옮겨 출판사로 보내온다. 마음산책에서 우리 여성의 앞걸음 시리즈 안에 「박남옥」 자전 이야기가 그 해 출간되었다.
그녀는 1923년 경북 경산시 하양읍에 태어났다. 영천을 거쳐 대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에 묘한 친근함이 느껴졌다. 늘 움직여야 했고, 뛰어놀아야 했고, 무엇이든지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고 한다.
여고생 시절 극장 출입금지 규칙을 어기고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보고 와서 황홀함에 빠져있던 이야기. 수업이 끝나고 2~3일에 한번 삼덕 파출소 앞 헌 책방에 들러 시나리오, 영화잡지, 미술책을 수집하는 기쁨을 누렸던 이야기를 편다.
일본으로 미술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상한 밀선에 몸을 싣고 가다가 좌초되어 수용소에 갇혔다 돌아온 사건도 있었다. 당시 현해탄에서 물 퍼내다 익사할 뻔 한 이야기는 참 웃프다.
촬영기를 가지러 진주를 갔다가 부산으로 돌아오기 위해 <진주-마산 간 완행열차>를 탔던 이야기는 강렬했다. 짐을 이고 온 장사꾼들로 통로까지 꽉 찬 열차에 올랐다. 촬영기와 아이와 기저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던 기차 안. 한참을 우는 아이를 토닥일 손조차 꼼짝 할 수 없었고 그 7~8 시간 동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기어가다시피 여관에 짐을 풀고 축 늘어진 아이에게 미숫가루를 먹이고는 아이와 촬영기를 꼭 안고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날 밤 그녀의 의욕과 열정, 그로 인한 회의와 외로움과 온갖 복잡한 마음이 한동안 이입되었다.
영화에 미쳐 앞뒤 없이 돌아다니던 처녀시절, 결혼과 출산, 영화감독으로의 첫출발, 흥행 실패, 이혼 이 모든 일들을 겪은 박남옥은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되었다. 참 뜨겁고 절실했고 막무가내로 당찼던 사람이었다.
그 후로 형부의 회사였던 동아출판사에 몸담게 된다. 여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인용한다. 그녀를 덕질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입사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얌전히 일만 하고 있는 나에게 ’ 아시아 영화제‘라는 것이 생겨 제 7회를 동경에서 연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나는 또 발동이 걸렸다.
‘밀선 타고 가려다 실패했던 그 동경에 가봐야지! 영화잡지를 발간하자!’
이렇게 나는 <시네마 팬>이라는 영화잡지를 발간하였고, 첫 표지에는 잉그리드 버그먼이 눈물 흘리는 얼굴을 실었다. 그런데 인쇄가 잘못 나와 너무 속상했다.
-박남옥, 186p-
걸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발동이란 끌리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다. 사그라들지 않는 충동 같은 것이다. 내 안에서 작용하는 꿈틀거리는 욕망과 자의식을 동반한 충동은 같은 말이었다. 박남옥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기쁨을 맛본다.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그에 필요한 노력, 충동, 성향을 뜻하는 라틴어 코나투스(conatus)는 인간의 기쁜 감정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삶의 변곡점이 될 사건마다 유쾌함과 분투가 고스란히 섞여 있는 그녀를 보면서 잘 발현된 코나투스를 본다.
여생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녀는 욕망한다.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 영화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로 진출하는 것도 보고 싶다.’라고.
[참고]
박남옥,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마음산책
영화 「미망인」, 1955, 자매영화사
스피노자, 「에티카/정치론」, 추영현 옮김, 동서문화사
심강현,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을유문화사
-에디터 김정희-